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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영국 잉글랜드 노퍽 샌드링엄, 1961. 7.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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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7. 8. 31, 프랑스 파리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 국민과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영국의 왕세자비였다.
집안간 오랜 친구 사이인 찰스 왕세자와 1981년 7월 29일 세인트폴 성당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은 전세계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첫 아기인 웨일스 공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스 왕자가 1982년 6월 21일에, 둘째 헨리(별칭은 해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 왕자가 1984년 9월 15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매력과 카리스마를 발휘하면서 다이애나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가난한 어린이들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들을 돕는 등 자선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그러나 화려함의 이면에서 남편 찰스와의 불화가 깊어가고 있었다. 오랜 협상 끝에 1996년 8월 두 사람의 이혼이 최종 확정되었다. 1997년에 다이애나는 '도디' 알 파예드와 연인 관계가 되었는데, 두 사람은 파리에서 파파라초의 추격을 피하고 고속 질주하다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다이애나는 파크하우스에서 어너러블(Honorable) 다이애나 스펜서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샌드링엄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영지에 있는 파크하우스를 빌려쓰고 있었고 그녀는 여기서 여왕의 아들인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와 뛰놀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다이애나는 스펜서 백작 7세의 계승자 올소프 자작 에드워드 존 스펜서와 그의 첫번째 아내이자 퍼모이 남작 4세의 딸 프랜시스 루스버크 로치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이이며 막내딸이었다. 1969년 불화 끝에 부모가 이혼해 오빠, 두 언니와 함께 아버지와 살았다. 그녀는 리들스워스 홀(노퍽 세트퍼드 근처)과 웨스트히스 스쿨(켄트 세븐옥스)에서 공부했고, 여름 휴가철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1975년 아버지가 백작작위를 받자 레이디 다이애나 스펜서가 되었다. 스위스 몽트뢰의 샤토되에서 공부를 끝낼 무렵에는 훌륭한 프랑스어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스키도 능숙하게 탔다. 영국에 돌아와 런던 사우스켄징턴의 아파트에서 여자 친구 3명과 함께 살면서 핌리코에 있는 '영잉글랜드 스쿨'이라는 상류사회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왕실 사람들과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찰스와는 1980년에 친해졌다.
집안간 오랜 친구 사이인 찰스 왕세자와의 약혼은 1981년 2월 24일에 발표되었다. 다이애나의 미모와 수줍어하는 태도는 즉각 언론 매체와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981년 7월 29일 세인트폴 성당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은 전세계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첫 아기인 웨일스 공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스 왕자가 1982년 6월 21일에, 둘째 헨리(별칭은 해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 왕자가 1984년 9월 15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매력과 카리스마를 발휘하면서 다이애나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가난한 어린이들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들을 돕는 등 자선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그녀를 숭배하는 군중들이 뒤를 좇아다녔으며, 그녀의 헤어 스타일의 변화와 값비싼 의상은 유행을 이끌었다. 출판업자들은 파파라초라는 공격적인 자유 사진작가들에게 거액을 제공하고 다이애나의 모든 움직임을 몰래 촬영해 수백 종의 신문 및 잡지 표지에 그녀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함의 이면에서 남편 찰스와의 불화가 깊어가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심한 산후우울증과 의기소침, 식욕부진 등으로 고통받았으며, 왕실을 공식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시달렸고, 시도 때도 없이 사생활을 침해하는 타블로이드판 신문기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파파라초들에게 끊임없이 추적당하는 데서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이들 부부는 상호 비방과 상대방의 모든 것을 까발리는 전기 출판, 양측 모두의 불륜 인정 등의 사태 전개를 거친 끝에 마침내 1992년 공식 별거에 들어갔다. 다이애나는 앤드루 모턴이 쓴 〈다이애나 : 그녀의 진실 Diana : Her True Story〉(1992)과 1995년의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왕실이 오랜 협상 끝에 왕세자비와 왕족의 지위는 박탈하는 대신, 두 왕자의 어머니로서 왕실가족의 대우와 '웨일즈의 공주(The Princess of Wales)'라는 공식 직함은 유지하고, 상당한 재산을 주는 것으로 합의함으로써 1996년 8월 두 사람의 이혼은 최종 확정되었다.
자유 신분이 된 다이애나는 자선활동을 줄였지만, 인도주의를 추구하는 인물로 활동을 계속했으며, 특히 대인지뢰 금지를 촉구하는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7년에 다이애나는 '도디' 알 파예드와 연인 관계가 되었는데, 두 사람은 파리에서 파파라초의 추격을 피하고 고속 질주하다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국민의 왕세자비'에 대한 대중들의 깊은 애도와 왕실의 침묵에 대한 비난에 당황한 영국 왕실은 관례를 깨고 왕실 장례식을 텔레비전을 통해 전세계에 방영할 수 있도록 했으며, 영국 정부는 항구적인 기념 사업을 도모할 위원회를 설치했다.
다이애나는 죽은 후에도 여전히 뉴스의 전면을 차지했다.
프랑스 경찰이 파예드의 운전사가 법적으로 음주 상태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자동차 사고의 정확한 원인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중에도 다이애나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었다. 다이애나를 헐뜯는 사람들은 그녀가 불안정했으며 천박한 인기를 추구했다고 비난한 반면, 그녀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관대한 마음과 케케묵은 군주제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고 칭송했다. 다만, 장래 영국 왕의 아내이자 왕자의 어머니이던 다이애나가 영국 군주제를 변화시켰으며, 20세기 후반에 가장 사랑받은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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