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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남북한 학생들이 통일의 구체적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서로 상대방에게 내놓았던 제의.
정부수립 이후 남북학생회담 제안은 4·19혁명 직후와 1988년 통일운동 시기에 2차례 제기되었다. 4·19혁명은 그동안 집권층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이용되던 통일문제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 11월 1일 서울대학교에서는 민족통일연맹 발기대회가 열려 '남북분단에 대한 기성세대의 책임과 통일외교' 등의 내용을 포함한 4개항의 대정부·사회 발표문을 공표했다.
이어 1961년 5월 3일 민족통일연맹 대의원대회 개최 결의문에서 "조국의 마지막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남북한 학생들의 힘뿐이므로 구체적인 학생회담과 학생기자·학술토론회·예술·학문·창작의 교류 및 학생친선체육대회 등을 단시일 내에 실현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결정하고 정부에 편의제공을 요구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5월 4일 학생위원회가 '남한학생들의 제안과 관련하여'라는 지지서한을 발표하고, 5월 5일 내무상이 남한학생대표들이 평양에 온다면 그들에게 활동자유와 신변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고 남한정부 역시 북한학생대표들의 신변안전 보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1961년 5·16군사정변의 발발로 무산되었다.
군사정부는 남북교류 주창자들을 일제히 검거하고 7월 4일 통일논의 자체를 금지하는 반공법을 공표했다. 이후 학생들의 남북학생회담제안은 1988년 다시 제기되었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의 남북공동개최 요구를 계기로 그동안 전면화되지 못했던 학생들의 통일논의가 전국민적 관심사가 될 만큼 열기가 고양된 한해였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한 김중기가 '김일성대학 청년학생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에서 "민족화해를 위한 남북한 국토종단순례대행진"과 "민족단결을 위한 청년학생체육대회"를 제안하면서 6월 10일 판문점에서 실무회담을 가질 것을 제의하자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위원회는 1988년 4월 4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남한학생들의 제안을 적극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남한학생들은 회담성사를 위해 전국적인 시위를 전개했지만 정부는 통일문제 논의의 주체는 국민의 의지를 대변하는 정부여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밝힘으로써 회담제안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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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남북학생판문점회담제의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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