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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이다. 이 조직은 1977년 1월 '한국민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및 기관지인 〈민중의 소리〉를 8차례에 걸쳐 배포하는 등 반유신투쟁을 전개했다.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하여 '민주구국학생연맹', '민주구국교원연맹', '민주구국농민연맹'의 결성을 시도하다가 1979년 10월 4일 이재문·이문희·차성환·이수일·김남주 등을 비롯 84명의 조직원이 구속되었다. 남민전이 북한과 관련된 '무장간첩단'이라고 밝힌 경찰과 달리 재야에서는 '사상 최대의 사상범 조작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재판 결과 39명이 석방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은 이재문은 옥사했다. 신향식은 사형이 집행되었고, 전수진은 병 보석 후 죽었다. 나머지는 1988년까지 차례로 풀려났다.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이다.
이 조직은 1977년 1월 '한국민주투쟁위원회(이하 민투)'를 결성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및 기관지인 〈민중의 소리〉를 8차례에 걸쳐 배포하는 등 반(反)유신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등 학생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하여 '민주구국학생연맹', '민주구국교원연맹', '민주구국농민연맹'의 결성을 시도하다가 1979년 10월 4일 이재문·이문희·차성환·이수일·김남주 등을 비롯하여 그 해 11월까지 84명의 조직원이 구속되었다.
당시 경찰은 3차에 걸쳐, 남민전은 불순한 세력을 규합하여 지하조직을 완성하고 도시 게릴라 방법으로 사회혼란을 조성하여 민중봉기와 국가반란을 유도, 베트남 방식의 적화를 획책해 왔으며, 단순한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이 아니라 북한과 관련된 '무장간첩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재야에서는 이를 유신 말기 상황에서 공안당국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상 최대의 사상범 조작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재판 결과 사건의 총 관련자 84명(불구속자 포함) 가운데 1심과 2심에서 39명이 석방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은 이재문은 옥사했으며, 신향식은 사형이 집행되었고, 전수진은 병 보석 후 죽었다. 나머지는 1988년까지 차례로 풀려났다. 1992년 사망한 김남주 시인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1988년 12월 말 마지막으로 풀려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2006년 3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고 김남주 시인을 포함한 남민전사건 관련자 29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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