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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9. 2. 9,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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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7. 8. 18, 서울 |
국적 | 한국 |
요약 한국 전통음악 및 궁중무용의 명인. 조선의 마지막 무동이기도 하다. 14세에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로 들어가 해금을 비롯한 아쟁, 양금을 배웠고 15세에 순종황제 탄신 51주년 잔치에서 무동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1968년 종묘제례악 중 일무로 중요무형문화제 제1호, 1971년 처용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후배양성과 중요무형문화재의 올바른 전수를 위해 힘쓰며 한국무용 및 전통음악과 관련된 저서를 남겨 국악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한국 전통음악·궁중무용 명인. 호는 심소. 1916년 정동보통학교 입학, 1920년 균명학당에 다녔다. 1922년 가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제2기생으로 들어갔다. 박영복·이병성·이병호·김선득 등과 함께 김영제·함화진·이수경 등으로부터 일반악·궁중악·궁중춤 기본 등을 배웠다. 전공으로는 해금을, 부전공으로는 아쟁과 양금을 수업했다.
1923년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순종황제 탄신 51주년 잔치에서 무동으로 봉래의·처용무·춘앵전 등 10여 종의 궁중춤에 출연하여 첫발을 내디뎠다. 1926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졸업한 후 여러 궁중행사의 악사로 활약했다. 1932년경 민속춤의 대가인 한성준이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열자 그곳에서 민속춤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무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31년 같은 아악부원인 박덕인의 누이 박준주와 결혼하였고, 1940년 아악수장직을 사임하고 잠시 권번과 무악계 악인생활을 했다.
1943년 함화진·현철·박헌봉 등이 관계했던 조선음악가협회의 조선악부회원으로 '산업전사위문 전국각지 순회공연'을 하며 해금을 연주하였다. 한편, 민속춤과 민속악에도 대단한 열성을 쏟았다. 1945년 조선음악협회가 대한국악원으로 바뀌면서 국악원 이사를, 1951년 국악원예술사를 지냈다. 1·4후퇴로 부산에서 구왕궁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정식 발족되었을 때 그곳에서 활동하며 정종술을 중심으로 2회에 걸친 발표회를 가졌다. 서울로 돌아온 후 1958년부터는 한국가면극연구회 이사직을 맡으며 탈춤 연구를 하였다.
1955년 김천흥고전무용연구소를 열고, 이듬해 궁중춤을 재현한 제1회 한국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75년까지 7회의 개인무용발표공연을 갖게 되는데 특히 1959년 처용의 설화를 극화한 <처용랑>과 1969년 대금에 얽힌 아름다운 전설을 극화한 <만파식적>으로 서울시문화상과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1968년 종묘제례악 중 일무로 중요무형문화재 1호, 1971년 처용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1940년대초 이화여자전문학교, 1956년 이화여자대학교 체육과에서 강의한 것을 시작으로 1988년까지 한국 고유의 전통음악과 춤을 지도하며 후배양성에 힘썼다. 1962년부터 시작된 미주·유럽·동남아 지역으로의 여러 차례 해외공연에서는 한국 전통예술의 진수를 세계 속에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1973년 사단법인 대악회 이사장, 1977년 정농악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예술단을 창단하여 중요무형문화재의 올바른 전수·보존·보급을 위해 주력했다.
이밖에도 2004년 심재 정악단 창단 고문, 2007년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및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으며, 궁중춤을 출 수 있는 마지막 생존자로 국립국악원에 남아 연주와 무용지도에 힘쓰는 한편 <한국무용의 기본무보>·<정악 양금보>·<정악 해금보>·<심소 김천흥 무악 칠십년>·<정재무동홀기 창사보 1·2> 등의 저서를 남겨 국악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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