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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

다른 표기 언어 金鐘漢 동의어 을파소, 乙巴素

요약 시인.

호는 을파소(乙巴素), 창씨명은 월전무(月田茂). 1940년부터 폐병으로 요절한 1944년까지 짧은 기간 활동했다. 친일 매체에서 활동하였고 집중적으로 창작활동에 참여한 기간이 태평양전쟁 시기와 겹치면서 총 22편의 친일 저작물을 발표했다.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를 졸업했다.

니혼대학에 재학중이던 1936년 〈동아일보〉에 시 〈망향곡〉을 발표하였고, 1937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 1939년 〈문장〉지에 〈귀로 歸路〉·〈고원의 시〉·〈할아버지〉·〈그늘〉·〈계도 系圖〉 등이 추천되면서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정지용은 추천사에서 "솔직하고 명쾌하고 단순하며 비애를 기지로 포장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김종한의 시는 속도감과 공간성을 활용한 기교적인 면모와 함께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1939년 〈문장〉지에 〈나의 작시설계도(作詩設計圖)〉에서 '최고의 순간'을 표현하는 단시를 주장했는데, 이는 한국현대시사에 등장한 최초의 선시(禪詩)이론으로 꼽힌다. 〈인문평론〉과 〈매일신보〉의 기자를 지냈고, 1942년 부일(附日)문학지인 〈국민문학〉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친일문학자로 전향하였다. 〈시문학의 정도(正道)〉에서 시적인 상황을 그 자체로서 파악하여 시화해야 한다는 현대의 시정신을 다룬 순수시론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일본 도쿄에서 〈이인 二人〉이라는 시동인지를 발간하여 민요풍의 서정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시단의 진로〉(1942)라는 평론에서 '국민시운동이 대동아공영권 운동'이라는 개념을 수립하고 동양에의 복귀, 흙에 투철한 정신, 민족융화의 사상 등을 주장했다. 시 〈원정 園丁〉(1942)에서 일본과 조선의 동조동근론을, 시 〈거종 巨鐘〉(1943)에서는 대동아공영권 문화에 대한 향수를, 〈용비어천가〉(1944)에서는 대동아건설에 참여하는 반도인의 풍모와 감격을 노래하는 내용 등을 썼다. 또한 전사한 군인의 유가족을 찾아가 만난 뒤 쓴 수필〈영예의 유가족을 찾아서〉(1943)를 쓰기도 했다.

이밖에 주요작품으로 〈해협의 달〉(1938)·〈하기휴가〉·〈길〉(1939)·〈연봉제설 連峰霽雪〉·〈살구꽃처럼〉(1940)·〈항공애가 航空哀歌〉(1941)·〈유년징병(幼年徵兵)의 시〉(1942) 등과, 일본어판 시집 〈수유근지가 垂乳根之歌〉(1943), 한시일역집〈설백집 雪白集〉(1943), 수필 〈남방에의 초대〉·〈바다, 효석, 하숙〉등이 있다.

이효석의 작품 〈황제〉를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부문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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