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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다른 표기 언어 金鍾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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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6. 1. 7, 충남 부여
사망 2018. 6. 23, 서울
국적 한국
직업 정치인

요약 정치가. 육사 8기 졸업생 출신으로, 1961년 5·16군사정변에 적극 가담하고, 중앙정보부 창설을 주도하여 1963년까지 초대부장으로 재임했다. 중앙정보부장 재임시 한일회담의 특사로 파견되어 회담을 매듭지었으며, 공화당 소속으로 의장과 부총재를 지내고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유신체제 유지에 역할을 했다. 이후 연이은 대통령 선거에서 1992년 여야합당, 1997년 야당연합으로 참여했다. 2004년 제17대 총선이 끝난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2018년 6월 23일 타계했으며, 사후 국가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김종필

ⓒ Helene C. Stikkel/wikipedia | Public Domain

9선 국회의원과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가. 호는 운정(雲庭)이었으며, 흔히 영어 약자로 'JP'라고 불렸다. 5.16 군사정변의 주역인 박정희의 조카딸 박영옥과 1951년 결혼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초대 중앙정보부장, 국무총리 등을 지내면서 유력한 정치인으로 도약, 이후 50년간 한국 정계의 주요 인물로 주목받았다.

초기 생애

1926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김상배와 어머니 이정훈 아래 7남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에는 한학을 수학했고, 대전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잠깐 교편을 잡았다. 1945년 해방 후 경성사범학교(같은 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에 입학, 194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2년 수료한 후 1948년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를 졸업했다.육사 8기 졸업생인 그는 군에서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하다가 1958년 중령으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에 임명되었다.

5.16 군사정변 참여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에 적극 가담했다. 박정희와는 이미 1951년 박정희의 딸 박영옥과 결혼, 조카사위의 인연을 맺은 바 있으며있었다. 김종필은 같은해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창설을 주도하고 1963년까지 중앙정보부 초대부장으로 재임했다. 중앙정보부장 재임시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에 특사로 파견되어 '김·오히라[大平] 메모'라는 비정상적인 외교방법을 통해 한·일회담의 결말을 짓기도 했다.

정치활동 시작

1963년 준장으로 예편하고 민주공화당(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에 취임해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충청남도 부여지역의 공화당 후보로 출마, 당선되고 공화당 의장에 취임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으나 극심한 부정·타락 선거라는 이유로 그 이듬해에 의원직을 사퇴했다.

1970년 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을 역임한 후 1971년 공화당이 겨우 과반수를 얻은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선 의원(전국구·공화당)이 되었다. 제8대 국회는 초반부터 여야가 심하게 격돌하게 되었고, 또한 공화당 내의 김종필계와 4인체제 간의 갈등이 10·2항명파동으로 표면화되자 공화당은 심각한 내부 분열 양상을 보였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4인체제의 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친정체제를 구축했으며, 김종필은 1971년 5월말에 공화당 부총재 그리고 6월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박정희 친정체제의 공고화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유신체제하의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정회(維政會) 국회의원으로 다시 국회에 진출했다. 국무총리 재임기간중 초기 유신체제 유지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1976년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에 취임했고, 1977년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을 맡았다.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역시 공화당 후보로 당선되었다(부여·서천·보령). 그 해에 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을 지내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후 공화당 총재 및 의장을 맡아 공화당을 이끌었다. 그 후 1979년 12·12사태와 1980년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에 정치활동이 정지당한 채 1987년까지 야인생활을 하며 지냈다.

정계복귀와 대통령 출마

1987년 6·29선언 이후 정치 흐름을 관망하던 중 9월 28일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잇달아 10월 5일 신민주공화당 창당발기인대회를 개최, 12월의 제13대 대통령 선거전에 나섰다. 10월 30일 구(舊) 공화당 시절의 각료·의원 출신을 중심으로 신민주공화당 중앙당 창당대회가 열렸고 김종필이 총재 및 대통령 후보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 충남에서 1위, 충북에서 3위를 했을 뿐 그밖의 지역에서는 거의 표를 얻지 못한 채 총 180만여 표를 획득하여 4위에 그쳤다.

3당 합당과 민주자유당 창당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그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은 총35석(전국구 8석 포함)을 차지하여 원내 제4당의 지위에 머물렀다. 김종필은 지지기반 약화라는 상황을 타개하고 정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1990년 1월 당시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과의 3당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민자당) 창당에 참여하고 공화계의 대표로서 민자당 최고위원직을 맡았다.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자당 후보로 부여에서 출마, 당선되었으나 그를 추종하는 공화계가 지지기반이던 충남지역에서 대거 낙선함으로써 그의 정치 입지는 약화되었다. 1992년 5월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포기하고 김영삼의 후보추대위원회 명예위원장직을 수락했고, 5월 전당대회에서 민자당 최고위원으로 재추대되었다.

자유민주연합 창당

그러나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이 3당합당시의 약속을 저버리고 오히려 자신을 출당할 움직임을 보이자 1995년 2월 민자당을 탈당해 3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고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민련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부여).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 논의가 거듭되는 가운데, 1997년 11월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와 집권 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로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그리고 영남권에 지지 기반을 가진 박태준을 자민련 총재로 영입해 이른바 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지역적 지지 기반을 충청권·영남권으로 확대해 김대중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마침내 유신 정권, 민자당 정권 이래 또다시 집권여당의 실권자로 변신한 그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가진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인준거부 파동을 겪은 뒤 약 6개월 후에야 국회의 인준을 받았다.

그는 명실상부한 공동정권의 2인자로 실세 총리를 역임한 후 2000년 1월 총리직에서 물러나 자민련 총재로 복당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자민련은 17석을 얻는 데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2001년 9월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한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결별하면서 김종필은 소수야당의 총재로 남게 되었다.

정계 은퇴와 말년

그는 2004년 제17대 총선거에서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서며 헌정 사상 초유의 10선 고지를 노렸다. 그러나 정당득표율이 2.8%에 그치며 그의 마지막 꿈은 좌절되었다. 결국 4월 19일 자민련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저서로는 〈JP 칼럼〉·〈JP 수첩〉·〈새 역사의 고동〉 등이 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개인적인 발언 외에는 거의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 2008년 12월 뇌졸중이 발병, 이후 재활치료를 거듭해왔다. 2018년 6월 23일 아침 8시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숙환이 악화되어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했다. 민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국가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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