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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주

다른 표기 언어 金龜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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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40년(영조 16)
사망 1786년(정조 10)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 사도세자를 탄핵해 죽게 한 벽파의 영수.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영조의 장인인 오흥부원군 한구(漢耉)이다.

여동생이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홍양해(洪量海)의 문인이며, 심낙수(沈樂洙)와는 동문 사이이지만 나중에 심낙수는 홍문관수찬의 자격으로 김귀주를 탄핵하다가 흥양현(興陽縣)에 유배되었다.

여동생이 영조의 계비가 되자 이를 계기로 20여 세에 음보로 벼슬에 올랐다. 1762년(영조 38) 아버지 김한구·홍계희(洪啓禧) 등과 함께 당시 왕세자였던 사도세자를 탄핵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때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사도세자를 동정하던 시파(時派)와, 사도세자를 공격하고 영조를 두둔하던 벽파가 생기게 되었다.

시파는 주로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소론 측에 많았고,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이 중심이 되었다. 벽파는 주로 노론 계통인데 김귀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176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교리가 된 뒤, 여러 청환직을 거쳐 1767년 강원도관찰사·좌승지 등을 지냈다. 1772년 공조참판으로 있을 때 청명류(淸名流)라는 정치적 결사가 발각되었는데, 이 결사가 영조의 탕평책에 역행하는 것이라 하여 유배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촌동생 관주(觀株)와 함께 이 일을 영의정 홍봉한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홍봉한을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으나, 영조가 죽은 세자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는 등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기 시작했고,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의 양자로서 그와 함께 홍봉한을 공격했던 정후겸(鄭厚謙)이 시파로 돌아섬에 따라 어려운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전날의 상소가 당시 왕세손의 외가였던 홍봉한을 공격하는 것이어서, 이는 곧 왕세손의 지위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역적으로 지목되었다. 홍인환(洪麟煥)·정이환(鄭履煥) 등과 결탁하여 정조를 해치려 했다 하여 흑산도에 유배되고, 1779년(정조 3)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784년 왕세자의 책봉 때 특사령으로 감등되어 나주에 이배(移配)되었다가, 1785년에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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