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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

다른 표기 언어 金宏弼 동의어 대유, 大猷, 사옹, 簑翁, 한훤당, 寒暄堂, 문경, 文敬
요약 테이블
출생 1454(단종 2)
사망 1504(연산군 10)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소학〉에 제시된 생활규범을 실천하기에 진력했으며, 그의 도학 실천 의지는 지치주의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의 청정적멸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척불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다.
1486년 당시 이조참판으로 있던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올려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사제지간에 사이가 벌어졌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다.

개요

김굉필의 글씨

김굉필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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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에 제시된 생활규범을 실천하기에 진력했으며, 그의 도학 실천 의지는 지치주의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성장배경

본관은 서흥. 어렸을 때의 이름은 효동이며, 자는 대유, 호는 사옹·한훤당. 아버지는 충좌위사용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 승순의 딸 청주한씨이다.

서흥의 토성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경기도의 성남·미원과 야로(처가)·가천(처외가)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손(金馹孫)·정여창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 등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누가 혹 시사를 물으면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답할 정도로 〈소학〉에 심취했다.

관직생활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의 청정적멸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척불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다. 1486년 당시 이조참판으로 있던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올려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사제지간에 사이가 벌어졌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은일지사로 천거하여 남부참봉이 된 뒤, 전생서참봉·군자감주부·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소학〉을 배운 것은 이때의 일이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으로 옮겨졌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 등의 상소로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학통과 사상

김굉필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노불을 사도라 하여 배격하고 유학의 도통에 참여할 때 참다운 진리를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수기의 대요는 언행을 삼가는 것[謹言行]과 위의를 바르게 하는 것[正威儀]에 있으며, 수기의 근본이 정심·성의에 있으니만큼 수기를 위한 궁행의 요체는 경외를 숭상하는 것[崇敬畏]과 일욕을 경계하는 것[戒逸慾]에 있다고 파악했다. 이러한 수기의 행(行)이 있은 다음에야 도술을 밝히는 것[明道術], 인재를 가리는 것[辨人才], 정치의 대체를 파악하는 것[審治體], 인정을 살피는 것[察人情] 등의 치인의 대요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수기의 궁행을 의리실천의 필수 전제조건으로 여기는 점이 학문은 〈소학〉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여 〈소학〉이 제시하는 생활규범을 실천하는 데 힘썼던 까닭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조선 주자학의 기본문제였던 이발과 기발의 문제가 아직 논의되고 있지 않았으나, 그는 이미 이일분수설을 간략하나마 다루고 있었다. "천하의 만물은 이(理)가 있고 분이 있으니, 이(理)는 만가지 것이 모여 하나가 된 것이고 분은 가지로 나뉘어도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하여 보편과 특수의 일체성을 강조했다. 한편 "작은 털에도 태극이 갖추어져 있으며 태산이 크다고 하지만 그 역시 하늘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으로 보면 천지도 또한 일물이 되고 형이하로 보면 사물마다 무극이 된다"고 이일분수설을 설명했다.

그의 학문은 조광조·김안국(金安國) 등에 전해져 뒷날 지치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김안국·이장길(李長吉)·윤신(尹信)·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 등이 있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이황은 그를 '근세도학지종'으로 칭송했다. 아산 인산서원, 서흥 화곡서원·희천 상현서원, 순천 옥천서원, 현풍 도동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 景賢錄〉·〈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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