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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구양순(歐陽詢:557~641)·우세남(虞世南:558~638)·저수량·설직을 함께 묶어 부르는 통칭.
(병). Ouyang·Yu·Chu·Xue. (웨). Ouyang·Y·Ch’u·Hs
eh.
이들은 중국 당대 전기 약 100년 동안의 저명한 서예가들이다. 모두 해서에 뛰어났다.
구양순은 담주 임상 사람으로 관직은 홍문관학사에 이르렀고 〈예문유취 藝文類聚〉 100권을 편집했다. 서법은 왕희지(王羲之)를 계승하고 북비의 힘차고 빠른 필치를 융합시켜 힘차고 거칠면서도 순수하고 소박한 품격을 이루었다. 〈구성궁농천명 九成宮醴泉銘〉과 〈화도사 化度寺〉의 2개 비문이 그의 대표작이다.
해법에 있어서 으뜸으로 인정받았던 그가 후대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유명한 〈구양순36법 歐陽詢三十六法〉은 후세 사람들이 그의 서법을 분석하여 지은 것이다. 그의 서법은 멀리 해외에까지 전파되어 일본과 조선에서 다투어 모방했다. 그의 아들 통(通)은 가학을 전수받아 더욱 거칠고 험한 서풍을 이루었다.
우세남은 자가 백시로 월주 여요 사람이다. 벼슬이 비서감에 이르렀고 〈북당서초 北堂書鈔〉 100권을 편집했다. 당 태종은 그에게 5절, 즉 덕행·충직·박학·문사·서한이 있다고 칭찬했다. 어려서 지영으로부터 서도를 배웠고 이왕(二王 : 왕희지·왕헌지 부자)의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서법은 "온아하며 내부에 강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가지고 있다", "풍채가 심원하다"라고 일컬어진다. "구양순은 금과 같고 우세남은 순수한 옥과 같다"라고 하여 구·우로 함께 불려진다. 〈공자묘당비 孔子廟堂碑〉가 우세남의 손꼽히는 작품이다. 일찍이 서론으로 〈필수론 筆髓論〉을 지었고 이를 배운 이들이 많은 유파를 만들었다. 당 태종도 우세남에게 서도를 배웠다.
저수량은 집정대신을 지냈는데 맡은 일에 충직하고 엄정했으나 좌천되어 애주자사로 있다가 63세에 죽었다. 그의 서법은 이왕을 계승하고 구양순과 우세남의 장점을 더불어 갖추고 있어 힘차면서도 아름답다. 그의 서법은 왕희지의 정기를 깊이 이어받았기 때문에 당시 황금보다 더 가치가 있었으며 당대 사람들 가운데 왕희지의 서체를 배우고자 한 사람들은 대부분 저수량으로부터 시작했다.
안진경(顔眞卿)도 역시 저수량으로부터 배웠다. 대표작에는 〈이궐불감비 伊闕佛龕碑〉와 〈안탑대당삼장성교서 雁塔大唐三藏聖敎序〉 등이 있다. 또한 그는 작품에 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뛰어났다. 당 태종이 모두 3,000여 점에 달하는 왕희지의 필적을 대대적으로 수집하자 당시에 그것의 진위를 분별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수량이 이것들의 출처를 완전히 가려냈는데,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이는 후대에 왕희지의 서법을 연구하는 데 견실한 기초가 되었다. 설직은 다른 3사람보다 후배지만 서도와 그림에 두루 뛰어났고, 저수량파의 서법을 이어받았지만 역시 새로운 경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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