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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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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무장독립군으로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항일군대의 활동 내용. 광복군은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해야 했기 때문에 중국과의 대립이 불가피했는데, 처음에는 중국 군대의 보조가 된다는 협정이 있었다가 이를 거부하고 교섭을 시도하여 끝내는 중국군의 간섭을 최소하는 데 성공했다. 초기의 광복군은 총사령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개편을 거쳐 3개 지대로 구성되었다. 다른 나라와의 연합을 통해 독립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중국과 미국 등의 군대와 협력했으며, 미국과의 작전의 경우 가장 심혈을 기울였으나 일본이 패전하고 광복을 이루게 되어 작전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한국광복군

ⓒ 5a1amm60/wikipedia | Public Domain

중국군사위원회와의 관계

광복군은 중국의 지원하에 중국 내에서 활동해야 하는 한계성을 지니고 출발했기에 처음부터 중국정부와의 군사협정문제가 현안문제로 되었다.

중국군사위원회는 1941년 11월 15일 광복군의 '한국광복군구개행동준승'을 일방적으로 임정에 통고했다. 임정으로서는 중국측 지원 없이는 활동이 불가능했으므로, 11월 19일 제8차 임정 국무회의에서 행동준승을 승인했다. 행동준승에 의하면, 광복군 총사령부는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인사·경리·훈련·공작 등 일체 사항에 대해 중국군의 명령·허가를 받도록 규정했으며, 광복군과 임정과의 관계는 '고유한 명의관계(名義關係)'를 유지할 뿐이라고 했다.

이는 광복군이 중국군의 일개 보조·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 군사협정이었으며, 임정의 지위도 의문시되는 것이었다. 또한 광복군은 중국 내에서뿐 아니라 국내에 진공할 때도 중국 군사당국의 명령계통에 복속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주요직책에 중국군 장교를 앉혀 광복군을 완전히 통제했다.

이에 임정에서는 광복군의 현황을 타개하기 위해 준승폐기 교섭을 추진했다.

교섭은 행동준승 수락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1944년 중국 군정부장 허잉친[何應欽]이 '폐기용의공한'을 임정에 보내올 때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공한 이후에도 1945년 4월 4일에야 중국측의 최후 승낙을 받아냈다. 신협정은 광복군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중국 군사당국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중국의 통수권을 광복군이 중국 국경 내에서 작전할 때에만 한정하여,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 이후의 독자성을 보증했다.

그리고 중국의 원조가 일단 임정을 거쳐 전달됨으로써 광복군에 대한 임정의 위신과 권위가 되살아났으며, 원조를 차관형식으로 대체함으로써 임정의 국제적 위신도 서게 되었다.

한편 중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갇힌 한인사병을 광복군에 흡수함으로써 광복군 병력증강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불과 해방 4개월 전에 성립되어 광복군을 발전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조직편제

광복군의 성립 초기에는 항일전을 전개할 전투부대의 편성과 전선홍보전에 주력했다.

초기에 편성된 광복군지대는 대원확보를 위한 임시적인 편제였으나, 점차 대원을 확보하고 조선의용대가 합편됨에 따라 실질적인 단위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초기의 조직편성은 먼저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다음에 각 지대·구대 조직 및 대원을 충당하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광복군은 성립 당시 최고통수부에 김구·유동열(柳東說)·조성환(曺成煥)·조완구(趙琬九) 등이 있었고, 총사령에 이청천(李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 부관장에 황학수(黃學秀), 주계장에 조경한(趙擎韓), 참모에 이복원(李復源)·김학규(金學奎)·공진원(公震遠)·이준식(李俊植) 등 불과 12명으로 창설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만주독립군 출신으로 낙양군관학교의 교관·학생으로 연결된 인물들이었다. 1940년 11월 임정은 광복군 총사령부를 시안[西安]으로 옮기고 4개 지대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4지대는 설치되지 못했으며, 제1지대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산시[山西] 방면으로, 제2지대장은 고운기(高雲起)를 임명하여 쑤이위안[綏遠] 방면으로, 제5지대장은 나월환(羅月煥)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개편한 것이었다.

한편 1941년 3월 강남일대 초모공작을 위해 김문호를 단장으로 4명의 특파단을 설치하여 장시 성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초모공작의 결과, 총사령부 창설 1년 만에 광복군은 300명의 인원을 확보하였다.

한편 임정은 광복군에 대한 최고 통수기관으로서 총사령부의 창설을 계획하였으나, 1941년 11월에 중국측이 요구한 행동준승을 수락함으로써 좌절되었다. 행동준승에 따라 광복군 요직에는 중국군 장교가 배치되었으며, 총사령부 소속 장교 56명 중 한인장교가 불과 13명인데 중국인 장교는 43명에 달하고 각 지대에도 중국인 장교를 임명·배치했다.

총사령부 기구도 종전의 10개 참모부서에서 참모·총무·정훈처 등 3개 부서로 축소, 개편되었다. 그러던 중 1942년 4월 20일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부사령제를 신설하여 부사령에 김원봉을 임명했다.

조선의용대가 제1지대로 개편됨으로써 종전의 제1·2·5지대는 통·폐합되어 제2지대로 개편되고, 이범석이 지대장에 임명되었다. 제2지대는 시안에 본부를 두고 산시 성[陝西省], 허난 성, 산시 성[山西省]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무렵 푸양[阜陽]에 특파된 김학규가 제3지대를 창설, 광복군은 모두 3개 지대로 재편되었다.

개편된 광복군의 1942년 10월을 전후한 시기 병력은 제1·2지대 270여 명, 제3지대는 70명 내외였다.

광복군의 재편성은 곧 중국관내 한인무력의 통일을 뜻하며, 광복군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광복군은 화북이나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처럼 독자의 강령, 즉 운동노선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광복군 자체가 당시 중국관내의 통합된 독립운동세력인 임정의 무장세력이었던만큼 임정의 운동노선이 곧 광복군의 운동노선이었다.

이런 점에서 1941년 11월 임정이 해방을 대비하여 채택한 건국강령이 곧 광복군의 지향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44년 4월 임정에서는, 행동준승 폐기와 신군사협정의 체결, 국내활동을 하던 제무장대오(諸武裝隊伍)를 임정의 통일지휘하로 편입, 연합국에 의한 한적사병포로(韓籍士兵捕虜)의 인도와 훈련, 적진정세공작 등 13개항의 군사정책안을 구체화한 군무부공작계획대강을 작성, 실천에 옮겼다.

1943~44년 광복군의 각 지대는 본격적인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는 한인청년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들 한인청년의 대부분은 광복군 제3지대 김학규 지대장의 지휘하에 중국 제10전구 사령부에 부설된 중앙군관학교 제10분교 한광반(韓光班)에 입교하여 광복군의 간부로 양성되었다.

군사활동

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전투력 배양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를 뒷받침할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특히 행동준승으로 광복군의 활동은 중국군측의 요청에 의한 것이나, 독자적인 활동이라 하더라도 제한된 여건 속에서 대적선전·정보수집·포로심문 등 정보선전에 국한되었다. 초모공작과 더불어 광복군의 주요임무였던 선전공작은 대내적으로는 광복군의 존재와 사명을 국내에 인식시켜 동포들의 총궐기를 촉구하고, 일본의 대중(對中) 작전에 대한 방해공작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독립국으로서의 민족문화와 역사를 알리면서, 광복군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할 자격과 의사가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발발과 동시에 동남아로 전선이 확대되고, 일본군 내에 한적(韓籍) 사병이 늘어나자 광복군은 점차 연합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영국군은 버마(지금의 미얀마) 작전에서 일본군에 대한 선전 및 정보수집을 위해 광복군의 협조를 필요로 했다. 광복군은 중국측과 협의를 거친 후 1943년 6월 한영군사협정을 체결하고, 8월 한지성(韓志城) 대장 등 8명을 선발하여 인도버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에 참여했다.

한편 광복군이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미국과의 합동작전이었다.

1945년 3월 15일 제6징모분처 주임 김학규는 쿤밍[昆明]의 미군 제14항공대 사령관이며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O. S. S.)의 최고책임자인 센놀트(Claire L. Chennault)와 협의, 공동작전을 위한 6개항에 합의했다.

O. S. S.에서는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 편입된 학생들을 중심으로 특수공작교육을 실시, 이들을 국내에 투입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45년 4월부터 이들은 중국의 시안과 푸양에서 훈련에 들어갔으나, 곧이은 일제의 항복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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