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93(고종 30) |
---|---|
사망 | 1952 |
국적 | 한국 |
요약 독립운동가.
의열단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여 일제의 주요 요인 및 기구를 암살·파괴하는 등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본관은 현풍. 김광삼(金光三)·김재만(金在萬)이라고도 한다. 자는 경(敬). 아버지는 지엽(芝燁)이다. 서울에서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청주에서 청남학교 교사를 지냈다.
1909년 항일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에 가담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7월에 황상규(黃尙奎)·윤소룡(尹小龍)·김기득(金奇得) 등과 함께 만주로 갔다. 같은 해 11월 9일 만주 지린 성 파호문 밖에서 김원봉(金元鳳)·황상규·윤치형(尹致衡)·신철휴(申喆休)·이종암(李鐘巖)·이성우(李成宇)·윤소룡·서상락(徐相洛)·김태희(金台熙)·배중세(裵重世)·이낙준(李洛駿)·강세우(姜世宇)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은 첫번째 행동으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총독부기관신문사인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 각지 경찰서 등을 대상으로 파괴와 교란, 암살 등을 실천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그는 1920년 2월에 상하이로 가서 폭탄 3개와 이에 사용할 약품을 사서 경상남도 밀양청년단장 김병환(金鉼煥)에게 보내고, 6월 서울로 와서 조선총독부의 기관을 폭파하고자 정황을 살피던 중 경기도경찰부에 붙잡혔다.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27년 1월 22일 출옥했다. 1930년 다시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 상하이, 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