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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 내에서 발달한 물질자료, 즉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지난 시대의 인류활동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
개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서 고대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이해의 단편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여러 지역을 답사하고 문헌기록과 유적·유물을 견주어 평가하는 안목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발견, 판독한 것은 물론 북청토성을 답사하고 돌화살촉을 발견하여 그것이 문헌에 나오는 숙신의 석노(石弩)임을 주장했다. 또한 경주평야에 있는 신라무덤을 조산(造山)이 아닌 왕릉으로 해석하고, 평양 부근에서 나온 기와에 '千秋萬歲'(천추만세)란 명문이 있는 것을 보고 글자체로 보아 전한대의 유물로 추정하는 등 고고학의 방법에 접근된 연구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통사회의 학문성과가 이어지지 못하고 근대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제국주의 침략에 따라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고고학도 자생발전의 길을 잃게 되었다.
일제에 의한 고고학 조사는 침략의 기초자료 수집을 위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역사·민속·산업 조사의 일환으로 문화재 및 유적조사가 전국에서 진행되었다. 1916년에는 조선고적연구회가 설립되어 평양·경주·김해 지역들에서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제하의 고고학 발굴은 도굴에 가까운 보물찾기식이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의 참여가 철저히 금지된 채 일본 사람들에 의한 지시와 감독에 따라 조사되었고, 어떤 종류의 유물이 얼마나 나왔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조사가 집중된 곳이 평양과 김해 지역으로, 평양에서는 한의 낙랑군 설치를 증명하기 위해 애썼고 김해에서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 의도적인 조사를 했다.
그밖에 경주·개성·강화 등지에서는 신라ㆍ고려 때의 값진 유물들이 많이 나오는 무덤들을 파헤쳐 엄청난 양의 도자기, 귀금속 장신구, 질그릇 들을 일본에 가져갔다.
뒤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비롯해 개성·평양 등에 박물관을 지어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발굴품뿐만 아니라 석탑·불상·그림 들까지 일본으로 들여간 것이 많았다. 일본 사람들은 철도공사에서 드러난 1만 기가 넘는 유적을 파헤치고 유물을 캐가기도 했다. 한편 경성제대 의학부에서는 우리 겨레의 체질과 생활수준이 낮음을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체질과 토막민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이와 같이 잘못된 방향으로 진전된 고고학은 광복이 되어 일본이 물러가고 난 뒤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또다시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남과 북이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해방 이후의 상황은 고고학을 전문으로 훈련받은 인력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일제의 조사로 흩어진 유물들을 수습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8·15해방). 그나마 서구에서 고고학 훈련을 제대로 받고 돌아온 도유호·한흥수 등 고고학자는 북으로 들어가 남한의 경우는 더 어려웠다.
우선 문화재를 보존·관리할 수 있는 시설로서 남에서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정비하였고 북에서는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을 새로 설립하였다. 고고학 발굴의 경우 남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조사했던 나머지 것들을 이어 받아 경주·개성 등지의 무덤을 정리하는 데 머물고 있을 때, 북에서는 일찍이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법령을 발표하고 각지에 지방박물관을 세워 유적발굴을 진행하였으며 과학원 산하에 물질문화사연구소를 두고 조직적인 발굴사업을 진행했다.
북에서는 6·25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계획경제체제로 들어가면서 건설공사장에서 드러난 유적을 공사에 앞서 치밀하게 정리하였고, 민속조사도 아울러 진행시켜 1960년대에 이미 고고학의 기반을 닦아나가고 있었다. 한편 남에서는 일부 유적에 대한 시굴 및 발굴조사가 있기는 하였으나 고고학 조사를 담당할 전문기관이나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인회 수준의 모임을 통해 연구되다가, 1961년 서울대학교에 고고인류학과가 개설되면서 전문인력이 양성되기 시작했다.
북에서는 과학원 산하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와 지방박물관이 고고학 발굴의 중심구실을 하며 국가사업으로 진행되었는 데 비하여, 남에서는 국립박물관 중심의 조사로부터 차차 대학박물관이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고고학 연구의 큰 맥을 이루게 되었고, 이제는 전국의 공·사립대학에 고고학 관련학과들이 개설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연구성과
8·15해방 이후 우리나라 고고학의 연구성과는 비록 짧은 기간, 적은 인원으로 이룩된 것이기는 하나 몇 가지 두드러진 업적을 쌓은 바 있다.
특히 일제의 왜식사관에 의해 비뚤어진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는 데 큰 몫을 했다. 선사시대의 경우 일본 학자들은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지 않았고 청동기시대라는 것도 없이 석기와 금속기를 함께 쓰던 금석병용기시대가 오랫동안 이어져 문화가 뒤떨어진 민족이었던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북에서는 1950년대에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유적들을 발굴하여 우리에게 독자적인 청동기문화가 있었음을 밝혀내었고, 1963년에는 웅기굴포리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을 찾아 이 땅의 구석기문화 실체를 확인했다.
이어 남에서도 1964년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공주석장리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어 수만 년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주인공들의 모습을 뚜렷이 알게 되었다.
선사고고학에서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밝혔다는 것은 왜식사관의 극복일 뿐 아니라 구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시대를 이어 청동기시대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이른 시기의 역사를 체계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그후 구석기시대 유적은 전국에 걸쳐 확인되었고, 적어도 70만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옛 사람의 뼈화석도 평양 역포, 단양 상시, 평양 용곡, 평양 만달리, 청원 두루봉 유적 등에서 드러났다. 구석기시대에 이어 신석기시대에는 농사를 지으며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것이 봉산 지탑리, 평양 남경, 일산 유적의 발굴을 통해 알려졌다. 청동기시대 유적들도 남과 북에서 대규모로 발굴되어 우리나라·요동·만주지역이 함께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고고학
역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다루는 역사고고학에서도 해방 이후에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북에서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보충하는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과 공동으로 요동반도에서 발굴한 강상·누상 무덤유적은 고조선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틀을 제공하였다. 새로 찾은 고구려 무덤벽화는 삼국시대 생활상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하였고 궁터·산성터 발굴에서 나온 자료들도 역사 기록의 부족함을 채워주었다. 남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공주 송산리고분군에서 드러난 무령왕릉은 백제왕릉으로서는 처음 알려진, 도굴되지 않은 왕릉으로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매지권(買地券), 각종 장신구, 신상 등이 나와 백제문화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경주평야의 신라 무덤들 가운데 천마총(155호)과 황남대총(98호)이 발굴되어 신라왕릉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도 고대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경주 황룡사터와 익산 미륵사터의 계속된 발굴로 〈삼국유사〉의 기록을 새롭게 이해함은 물론 부족한 역사기록을 메워줄 수 있었다.
의창 다호리 움무덤유적, 삼천포 늑도, 해남 군곡리 등의 생활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초기역사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하였다. 그밖에도 고려·조선 시대의 도자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마터들이 강진·용인 등지에서 발굴되어 도자기의 제작연대와 만듦새 등을 뚜렷이 밝힐 수 있었다.
한국의 고고학이 그동안 이룩한 성과는 크다. 그러나 남과 북이 갈라져 서로의 성과를 교환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어려움 또한 많이 있다. 고고학은 유물의 관찰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실물을 접하지 못한 채 그림과 사진 등 간접 자료와 글만을 활용할 뿐이다. 유물의 교환전시, 상호방문연구 등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져 한국고고학이 하나로 통일된다면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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