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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333년 일본에서 가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진 뒤 고다이고 덴노의 주도 아래 전개된 덴노친정체제.
겐무 신정(新政)이라고도 함.
조큐[承久]의 난 이후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는 점차 강대해져 마침내 황위계승문제를 비롯한 조정 대사에 간섭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대해 황실은 일찍부터 이를 타도하려 했다. 1318년 즉위한 고다이고[後醍醐] 덴노는 1321년 인세이[院政]를 폐하였으며 기록소(記錄所)를 부활시켜 덴노친정을 실시함과 동시에 바쿠후 타도를 꾀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331년에 타도 계획이 발각되자 덴노는 오키[隱岐]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모리나가 친왕[護良親王]과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가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바쿠후 타도 운동이 전개되자 1333년 덴노는 오키를 탈출했다.
한편 무장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교토에 있던 로쿠하라단다이[六波羅探題: 조큐의 난 뒤 설치된 가마쿠라 바쿠후의 조정 감시기관]를 토벌하고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가 가마쿠라를 함락시키자 가마쿠라 바쿠후는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덴노는 같은 해 6월 교토로 돌아와 인세이와 간파쿠[關白]를 폐하고 덴노친정체제를 수립했다. 이듬해인 1334년 1월에 연호를 겐무라 했으며 이리하여 겐무 중흥이 성립되게 되었다. 덴노는 논공행상을 하는 한편 기록소를 다시 부활시키고 신설기관을 설치해 공가와 무가의 인재를 두루 등용시키는 한편 지방행정제도를 쇄신하기 위해 고쿠시[國司], 슈고[守護]를 두는 등 대대적인 변혁을 꾀했다.
그러나 급격한 정치변혁으로 인해 무사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과세의 증가로 농민의 원성이 잦아지자, 이 틈을 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사, 특히 호족 영주층의 무사를 규합하여 신정부 반대의 태도를 분명히 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겐무 정권은 붕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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