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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55경, 콘스탄티노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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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50/52, 모레아 미스트라 |
국적 | 비잔틴 |
요약
비잔틴 제국의 철학자·인문주의자.
Pletho라고도 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차이를 명확히 규명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철학방향을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콘스탄티노플과 그에 인접한 에디르네에 있는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궁정에서 연구활동을 했고 미스트라에서 비밀 종교철학 학파를 창설했다. 미스트라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중요한 요새로 그는 이곳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마누엘 2세(1391~1425 재위)와 요한네스 8세(1425~48 재위)의 자문관으로 일하면서 사회·행정 개혁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특히 1438~45년에 열린 페라라-피렌체 공의회때는 평신도 신학자로서 비잔틴 대표단과 함께 참석했는데, 이 회의는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급습하자 이에 맞서 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가 재통합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종교문제보다는 신플라톤주의 철학발전에 관심이 많았던 플레톤은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한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에게 자신의 논문〈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차이에 관하여〉를 전해주었다. 중세 서방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플라톤은 무시해왔는데, 그의 논문은 피렌체 인문주의자들 사이에 플라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논문은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또 그때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스트라본의 〈지리학〉을 서방에 소개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잘못된 지리학 이론을 뒤엎을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지구의 외형에 관한 르네상스 시대의 생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콜럼버스가 자신의 생각에 영향을 준 주요 권위자들 가운데 하나로 스트라본을 든 것을 미루어 플레톤은 간접적이긴 하지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플레톤은 펠로폰네소스로 돌아온 뒤 플라톤의 〈법률 Nomoi〉을 연상시키는 저작 〈법전〉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고대 아테네 문화를 원형으로 하면서 플라톤주의, 스토아주의, 이슬람교 숙명론, 황제숭배사상 등의 요소를 덧붙여 사회적·정치적 이상향을 그렸다.
그는 연설문과 조로아스터·천문학·음악·역사·수사학 및 그밖의 여러 가지 신학적 주제에 관한 논문도 썼다. 그가 쓴 거의 모든 저술에는 그리스에 대한 정열적 사랑과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하는 바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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