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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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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17(태종 17) |
사망 | 1464(세조 10) |
요약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 시인으로 주요 작품은 <고사관수도>와 <교두연수도>와 <강호한거도>. 본관은 진주,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로 이조판서를 지낸 석덕의 아들이었다. 정인지와 함께 <훈민정음>을, 최항과 더불어 <용비어천가>를 주해했으며 <동국정운> 편찬에도 참여한 바 있다. 일찍이 시·글씨·그림에 두루 재주를 갖추고 있어 삼절로 일컬어졌다. 글씨는 왕희지, 조맹부에 비견되기도 하며 세종 때에는 옥새에 새긴 글씨를 쓰기도 했다. 그림은 남송의 원체화풍과 명초의 절파화풍을 따라 당시 유행했던 웅장한 산수와는 다른 기법으로 그렸다. 저서로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 <양화소록>을 남겼다.
본관은 진주.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 이조판서를 지낸 석덕(碩德)의 아들이고, 좌찬성 희맹(希孟)의 형이다.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4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섬서주부(司贍署主簿)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돈녕부주부·이조정랑·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1443년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1445년 최항(崔恒) 등과 더불어〈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주해했다. 또한 1444년 신숙주(申叔舟) 등과 같이 〈고금운회 古今韻會〉를 번역했으며, 1447년에는 신숙주·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동국정운 東國正韻〉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사헌부장령·지사간원사 등을 두루 거치고 1454년(단종 2)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이해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팔도 및 서울의 지도를 제작하는 데 참여했다.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1456년에는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그는 관계하지 않았다는 성삼문의 진술로 화를 면했다. 이어 1463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예술세계
동생 희맹과 함께 일찍부터 시·그림·글씨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시·서·화의 삼절로 일컬어졌다. 그의 시는 위응물(韋應物)·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가를 들었으나 문집은 전하지 않는다.
글씨는 전서(篆書)·예서·팔분(八分)에 두루 능하여 왕희지(王羲之)·조맹부(趙盟頫)에 비견되기도 한다. 1445년 세종이 보옥을 얻어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의 8자를 새겨 옥새를 삼았을 때 글씨를 썼으며, 1455년 주조한 을해자의 글씨도 그가 썼다.
그림은 남송의 원체화풍(院體畵風)과 명초의 절파화풍(浙派畵風)을 받아들여, 웅장한 모습의 산수를 주로 그렸던 당시의 추세·기법과는 다른 작품을 그렸다. 예컨대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에서는 주변의 산수가 배경에 불과하고 수면을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의 그림은 흔히 송나라의 유용·곽희에 견주어진다. 그러나 "서화는 천한 기술이므로 후세에 전해지면 다만 이름에 욕될 뿐이다"라고 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저서로는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인 〈양화소록 養花小錄〉이 있으며, 그림으로는〈고사관수도〉·〈교두연수도 橋頭烟樹圖〉·〈산수인물도〉·〈고사도교도 高士渡橋圖〉·〈강호한거도 江湖閑居圖〉 등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강지돈녕석덕묘표 姜知敦寧碩德墓表〉와〈윤공간공형묘비 尹恭簡公炯墓碑〉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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