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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15년 이선평(李仙坪)이 서울에서 창시한 신종교.
이선평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성장한 후 중국으로 구법을 위해 떠났으나, 도중에 평양 근교에서 '천하대보정진무외'(天下大寶正眞無外)라는 글귀가 허공에 나타난 것을 보고 각세(覺世)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뒤 그는 구월산으로 들어가 천일기도를 하던 중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圓覺天地 無窮造化 解脫死滅 永歸靈界)라는 주문을 천명(天命)으로 받았다. 이 주문을 '각세진경'(覺世眞經)이라고 한다.
그는 이 주문 속에 유교·불교·선교·그리스도교의 4가지 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며, 후천(後天)의 새로운 세상에서 사용할 언어의 자모법(字母法)인 원사(源史)를 내놓기도 했다.
각세도의 교리는 중국적인 역학과 오행설에 근거하고 있다. 즉 역학과 오행설에 따라 시간과 방위(공간)의 개념을 도입하고, 모든 것이 귀일(歸一)하는 중앙을 수도의 이상적 목표로 삼았다. 또한 역학에 의거하여 운수변역(運數變易)에 따른 선천과 후천의 관념을 상정하여 조선 후기 이래 대부분의 신종교에서 볼 수 있는 후천개벽 또는 종말론적인 이상세계의 도래를 선언했다.
그러나 각세도의 교리는 상당한 학문적 수련을 배경으로 하여 꽤 이론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또, 다른 신종교에 비해 종말론적인 색채를 강조하지 않고 주술성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으며, 내면화된 종교체험을 강조, 은둔적인 자가수도(自家修道)의 경향을 띠었다. 이는 교조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크게 부각되지 못한 점과 더불어 대중의 일반적 신앙요구를 채워주지 못함으로써 교세가 크게 신장되지 못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선평은 창교 후 몇 년 만에 수만의 신도를 얻는 등 활발한 포교활동을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서울에 은거하면서 은밀히 교법을 펼치기도 하였다. 8·15해방 후에는 방위의 개념에 따라 동서남북의 사관(四觀)체제로 교단을 운영하였으며, 천지운행에 맞추어 30명의 제자를 두고 30암(菴)이라 부르며 각각의 소임을 맡겼다.
그러나 1956년 이선평의 사망을 전후하여 각세도의 사관이 분열되어 독자교단이 형성되면서 교세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중 북관을 맡았던 신태제(申泰濟)가 대전에서 만든 정도교(正道敎)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으나, 후천의 조화정부(造化政府)를 현실화시킨다는 혐의를 받고 교단간부들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각세도는 교주 이선평이 6·25전쟁 후 잠시 기거하였던 충북 영동군 학산면 일대와 서울에 각세도본원(覺世道本源) 등의 여러 군소교단이 존립하고 있으나, 대개 자가수도하는 소수의 신도로 구성되어 본격적인 교단활동은 거의 없는 편이다. 다만 서울 동대문구 상봉동에 있는 각세도천지원리교본관(覺世道天地原理敎本觀)만이 〈각세훈사 覺世訓詞〉·〈응지효행 應志孝行〉 등 각종 경전을 간행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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