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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일본 나고야[名古屋], 1860. 1.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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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6. 1. 28, 도쿄 |
국적 | 일본 |
요약 1920년대 중반의 일본 총리.
그의 내각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에서 가장 민주적인 정치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가토는 처음에 미쓰비시 그룹에서 일하였다. 이 인연으로 미쓰비시는 그가 정치가로 있는 동안 계속 후원하였으며 그도 미쓰비시에게 여러 혜택을 주었다. 1887년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외상의 비서관이 된 데 이어 대장성의 국장을 역임하였다. 주영(駐英) 특명전권공사를 지냈으며(1894~99), 1900년과 1906년에 잠시 외상으로 일했다. 그는 미쓰비시의 이해에 상반되는 철도의 국유화에 반대하여 외상을 사임한 뒤 공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908년 다시 주영 특명대사로 임명되었다.
1913년 본국으로 돌아와, 지지를 받지 못하던 신임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의 제3차 내각에서 외상을 맡았는데 이 내각은 단명하였다. 그는 가쓰라가 설립한 입헌동지회(立憲同志會)를 헌정회(憲政會)로 개편한 뒤 1913년에 총재가 되었다. 가토의 지도 아래 헌정회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에 대항하는 제1야당이 되었다.
1914년 4월에 오랫동안 후원해준 오쿠마 밑에서 다시 외상직을 맡게 되었다. 외상 재임기인 1915년 1월 18일 일본은 중국측에 이른바 21개조를 요구하였고 이로 인하여 일본의 중국에서의 특권과 산업개발권이 대폭 증대되었다. 3월의 총선거 뒤에 그는 오쿠마의 부정 선거운동에 항의하며 사임하였다.
그뒤 10년 동안 정계에서 물러나 있다가 1924년 6월에 새 연립내각의 총리가 되었다. 이듬해 그의 정당이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하게 되자, 가토는 내각을 재편하였으며 이로써 새로운 민주정치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자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었고 군대의 규모나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으며 귀족원의 권력이 약화되는 한편 온건한 사회입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가토 내각은 체제 전복을 기도하거나 사유재산제의 폐지를 주장하는 단체의 회원에 대해 최고 10년의 형을 구형한다는 내용의 치안유지법도 제정하였다. 또한 중고등학교에 군사교육을 도입하였고 군대를 현대화하였다. 1926년 임기를 남겨두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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