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59. 12. 3, 오카야마[岡山] |
---|---|
사망 | 1933. 11. 5, 모스크바 |
국적 | 일본 |
요약 일본 노동운동의 지도자, 혁명가.
본명은 야부키 간타로[藪木菅太郞]였는데 징병기피를 위해 가타야마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이름을 바꾸었다. 1881년 상경하여 활판공으로 일하며 고학하다가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존스홉킨스대학, 예일대학 신학부 등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에 영·미의 사회 현실과 노동운동에 대한 견문을 통해 사회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1895년 귀국하여 이듬해에 도쿄 가네다[神田]에 킹슬리 관(館)을 세우고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로서 노동조합기성회·철공조합 등의 결성에 힘썼다. 잡지 〈로도세카이 勞動世界〉를 발간하면서 일본의 초창기 노동조합운동의 중심인물로서 활동했다. 1898년 아베 이소오[安部幾雄] 등과 '사회주의 연구회'(1900년대에 사회주의 협회로 개조)를 조직했고 1901년 아베 이소오,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와 함께 사회민주당을 결성했으나 결성 당일로 금지되었다.
1904년 제2인터내셔널의 암스테르담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석하여 당시 러일전쟁으로 교전중이던 러시아의 대표 플레하노프와 반전에 동의하는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귀국 후 1906년 일본사회당에 참여하면서 고토쿠 등의 직접행동파와 노선상으로 대립하여 의회정책파를 지지했다. 그는 노동자의 일상적 요구와 초보적 조직을 중시할 것을 주장했다.
1910년 대역사건 시에는 〈유마니테〉지 등을 통해 일본정부의 탄압을 세계에 알려 국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 이후의 탄압으로 일본에서의 활동이 곤란해지자 191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잡지 〈헤이민 平民〉(1916~19)을 발행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로 전환하여 미국·멕시코의 좌익운동을 지도하면서 재미 일본인 사회주의자단(團)을 조직했다.
1912년 극동인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소련으로 입국한 이래 코민테른 상임집행위원으로 소련에 머물면서 국외에서 일본의 공산주의세력을 지도하는 한편, 국제반제동맹·국제적색구원회(모플) 등의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모스크바의 크렘린 병원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크렘린의 붉은 벽에 안치되어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일본의 노동운동 日本之勞動運動〉(1901, 공저)·〈나의 사회주의 我社會主義〉(1903) 및 자서전 등이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