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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연주자>기악 연주자>건반 연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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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7년 9월 26일, 스위스 니옹 |
사망 | 1962년 06월 15일 |
유형 | 피아노 연주자 |
데뷔 | 1897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
레퍼토리 | 쇼팽, 슈베르트, 슈만, 드뷔시 등 |
요약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피아니스트. 바그너의 음악극 〈신들의 황혼〉 파리 초연을 이끌며 지휘자로도 데뷔했다. 자크 티보, 파블로 카잘스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했고, 파리의 음악학교 ‘에콜 노르말 드 무지크’를 창설하기도 했다. 특히 매혹적인 색채감과 낭만적인 루바토를 바탕으로 쇼팽의 해석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이성적인 논리와 낭만적인 리리시즘을 조화롭게 구현해내는 그의 연주는 다수의 레코드를 통해 남아있다.
현대 프랑스의 피아니즘을 이어받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는 1877년 스위스의 니옹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누나들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던 그는 9세가 되던 1886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음악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15세가 될 때까지 쇼팽의 제자였던 에밀 데콩브(Émile Decombes)를 사사하며 쇼팽 음악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고, 자유로운 루바토와 투명한 음색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당대 프랑스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손꼽히던 루이 디에메(Louis Diémer)를 사사하면서 현대 프랑스의 피아니즘을 접하게 되었으며, 1896년 파리음악원을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인 1897년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으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선보이면서 음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지휘자, 실내악 주자, 교육자 등 다양한 역할 수행
그러나 이 시기부터 바그너의 음악에 매료되기 시작한 코르토는 급기야 1898년 바이로이트로 달려가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의 부지휘자로 활동하기에 이른다. 바그너의 모든 극작품을 외울 정도로 바그너에 몰두했던 그는 1902년 〈신들의 황혼〉을 직접 지휘하여 파리 초연 무대를 선보인 뒤 바그너의 음악을 알리는 데 정열을 쏟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피아노에 대한 애정을 저버리지 않았고, 1905년에 바이올리니스트 티보(Jacques Thibaud), 첼리스트 카잘스(Pablo Casals)와 함께 ‘카잘스 트리오’를 조직하여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1907년에는 파리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어 1923년까지 재임하면서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을 길러내었다. 한편, 파리음악원의 영향력이 쇠퇴하던 것을 안타까워하던 그는 오귀스트 망조(Auguste Mangeot)와 함께 1919년 에콜 노르말 드 무지크(École Normale de Musique)를 설립하여 프랑스 음악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그의 바람대로 에콜 노르말은 현대 프랑스 음악을 견인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 이본느 르페브르(Yvonne Lefebure), 디누 리파티(Dinu Lipatti), 상송 프랑수아(Samson François), 블라도 페를레무터(Vlado Perlemuter) 등의 수많은 명연주자를 배출했다. 특히 시적 감성과 상상력을 강조하는 코르토의 수업은 학생들에게 전설적인 강의로 추앙받으면서 현대 프랑스 피아니즘을 이끌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레코딩의 선구자
코르토는 동년배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특히 클래식 음악으로는 최초로 전기녹음 방식으로 음반을 취입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그는 1925년 쇼팽의 〈즉흥곡〉과 슈베르트의 〈리타나이〉를 빅터 레코드에서 녹음함으로써 최초의 전기녹음 음반을 선보였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코르토는 특히 매혹적인 색채감과 낭만적 루바토로 유명하다. 그는 작곡가와 작품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악보에 충실하면서도 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펼쳐 보이는 음악 세계는 학구적인 논리와 낭만적인 리리시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꿈의 세계이다. 그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정신을 프랑스 음악계에 주입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통해 외적 효과보다는 주관적인 해석을 강조하려 했다. 쇼팽과 슈만, 드뷔시의 음악에서 특히 그 개성을 눈부시게 드러내었던 코르토는 특히 쇼팽의 해석에 있어서는 현재까지도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귀감이 되는 독보적인 존재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쇼팽의 음악에서 이성적 논리와 낭만적 감성을 함께 구현한 최초의 피아니스트였으며, 풍부한 시정과 유연한 프레이징, 자유로운 루바토와 감각적인 터치와 투명한 음색을 통해 쇼팽의 음악을 더없이 매혹적이고 극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그는 쇼팽의 〈연습곡〉과 〈전주곡〉을 전곡 녹음함으로써 전체 악곡의 극적구조를 처음으로 구현해내었다. 또한 그는 편곡자와 편집자로서 수많은 에디션을 남겼으며 음악 평론가와 음악 저술가로서도 활동한 전인적 예술가의 표본으로 평가된다.
나치 괴뢰 정권에 협력하기도
그러나 코르토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괴뢰 정권이었던 프랑스 비시 정권에 협력함으로써 크나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고국에서 추방되었고 20년 동안이나 함께 연주했던 카잘스와의 우정에도 금이 가고 말았다. 스위스 로잔에서 말년을 보내던 그는 자신의 전력을 공개적으로 사과한 뒤에야 프랑스에서의 활동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1958년에는 카잘스와의 관계를 회복하며 다시 함께 연주했다. 코르토는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62년에 심장마비로 85년의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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