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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8년 6월 20일 러시아 상트 페테스부르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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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3년 2월 11일 러시아 상트 페테스부르그 |
수상 | 2013년 로마국제영화제 평생공로상 |
데뷔 | 1968년 <일곱 명의 친구>(Sedmoy sputnik, The Seventh Companion, 소련) |
요약 알렉세이 게르만은 40여 년 동안 단 6편의 영화만을 남겼지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키라 무라토바와 더불어 1960년대 시작된 소비에트 뉴웨이브의 주축 멤버 중 하나였다. 게르만의 대다수 영화들은 철권통치 시대인 스탈린 집권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소련 역사의 전환기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생애와 이력
러시아의 영화감독, 작가, 배우. 1938년 6월 20일 러시아 상트 페테스부르그(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알렉세이 유리에비치 게르만(Aleksei Yuryevich German)이다. 알렉세이 게르만은 「이반 라프신」(Ivan Lapshin, 1937), 「젊은 러시아」(Young Russia, 1952) 등의 작품을 쓴 러시아의 저명 작가 유리 게르만(Yuri German)의 아들로 유년기부터 유복한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영화를 만들기 전 연극 연출에 먼저 손을 댔던 게르만은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Bolshoi Theater)에서 일하면서 1964년 레닌그라드 연극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 명문 영화제작사 중 하나였던 렌필름 스튜디오(Lenfilm Studio)에 합류하여 당대 최고의 감독 중 한 사람이었던 그리고리 코진체프(Grigori Kozintsev) 휘하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작품 세계
알렉세이 게르만은 1967년 그리고리 아로노프(Grigory Aronov)와 공동연출로 <일곱 명의 친구들>(The Seventh Companion)을 만들어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보리스 라브레네브(Boris Lavrenev)의 소설을 원안으로 한 이 영화는 내정 기간 동안 러시아 전역을 휩쓴 레드 테러를 소재로 한 이야기이다. <일곱 명의 친구들>은 역사적 전환기를 배경으로 한 스토리로 뿌리를 잃은 인물들의 유랑, 혼종의 시공간, 주 인물과 보조 인물,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의 경계를 허무는 카오스적인 연출방식 등 알렉세이 게르만의 세계를 특징짓는 요소들을 두루 갖춘 영화였다.
아버지 유리 게르만이 쓴 소설을 각색한 두 번째 영화 <길 위에서의 재판>(Trial on the Road, 1971)은 1942년 나치 점령기 서부 러시아를 무대로 한 전쟁영화였다. 독일군 옷을 입은 전직 붉은 군대의 중위 라자레프가 소련의 저항군에 붙잡힌 뒤 전향하여 저항군과 함께 싸운다. 나치를 추종하는 부역자가 소련을 위해 전향한다는 내용, 주인공 라자레프를 나약하고 초점을 상실한 캐릭터로 묘사했다는 대목 등이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게르만은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다. 이 영화는 게르만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영화들이 다루지 않는 민감한 주제를 초점화 하였는데, 소련의 검열기구는 게르만의 실험을 용납하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비하와 왜곡’이라는 혐의가 붙은 이 영화는 정부로부터 상영금지를 당했다.
연방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게 되어 <전쟁 없는 20일>(Twenty Days Without War, 1977)를 만들었다. 스탈린상(Stalin Prize)을 수상한 작가 콘스탄틴 시모노프(Konstantin Simonov)의 책을 각색한 이 영화는 당대의 국민감독으로 명망이 높았던 레노니드 가이다이(Leonid Gaidai)의 스크루볼 코미디로 유명세를 얻었던 코미디 배우 유리 니쿨린(Yuri Nikulin)을 평소 이미지와 판이하게 다른 심각한 인물로 변모시켜놓았다. 이 영화에서 게르만은 <길 위에서의 재판>보다 더 깊숙이 들어갔는데, 이 전쟁영화 안에는 영웅도 없었고 표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전쟁에 대한 묘사도 실종되었다. 니쿨린의 캐릭터는 일련의 파편화된 에피소드들의 관찰자였다.
유리 게르만의 원작을 다시 한 번 영화로 옮긴 <내 친구, 이반 라프신>(My Friend Ivan Lapshin, 1984)은 부인이자 오랜 협력자였던 스베틀라나 카르마리타(Svetlana Karmalita)와 함께 작업한 작품이었다. 영화는 1982년 완성되었지만, 검열에 의해 몇 군데가 잘려나간 뒤 1984년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 대한 회고로서 기획된 이 영화는 게르만의 다른 영화들처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구분이 없는 흩뿌려진 내러티브를 고수하였다. 이반 볼트네프(Ivan Boltnev)가 연기한 경찰관이 중심인물로 있었지만, 많은 사건들 중에 어떤 것도 거대한 사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스토리를 채우는 것은 우연한 디테일과 인물들, 대화로 구성된 과거의 꼼꼼한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친구, 이반 라프신>은 로카르노국제영화제(Locarno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어네스트 아타리아 상(Ernest Artaria Award)을 수상하였다.
<내 친구, 이반 라프신> 이후 게르만은 10여 년 간의 기나긴 침묵에 들어간다. 스탈린의 숙청을 소재로 한 영화 <크루스탈리오프, 나의 차!>(Khrustalyov, My Car!, 1998) 제작에 소요된 7년을 제외하더라도 10년에 이르는 예술적 가택연금의 시기였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도래와 함께 <길 위에서의 재판>은 개봉할 수 있었고, 게르만의 세 영화는 서유럽에도 소개되었다. 검열의 종식은 또한 그가 오랫동안 계획했던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크루스탈리오프, 나의 차!>는 스탈린 집권기인 1953년에 소위 의사음모사건(doctors' plot)에 참가한 혐의로 체포된 군의관 글렌스키의 이야기이다, 10여명의 인물들의 등장하는 카오스적인 스토리와 롱테이크, 딥포커스 쇼트로 구성된 이미지, 초현실주의적이고 그로데스크한 정서 등 게르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이 영화는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칸영화제에 모인 많은 저널리스트들은 소련의 역사에 관한 일종의 복수극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의 낯선 형식을 당혹스러워했다.
이후 알렉세이 게르만은 1964년 출간된 스투르가츠키 형제(Arkady and Boris Strugatsky)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하드 투 비 어 갓>(Hard to be a God, 2013)의 제작에 돌입하였다. 기획부터 완성까지 무려 13년의 시간이 소요된 이 대작은 전제주의적인 악이 지배하는 카르카나르라는 행성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다. 영화는 중세의 지옥을 연상하게 하는 카르카나르에 인본주의의 관념을 이식하기 위해 지구로부터 보내진 전령들이 행성을 횡단하면서 겪게 되는 사건들을 다룬다. 말년의 쇠약해져가는 육체를 끌고 영화를 완성하려던 게르만은 2013년 2월 11일 러시아 상트 페테스부르그에서 막바지 편집을 하던 중 사망하였다. 그가 죽은 뒤 게르만의 아들인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Aleksei German Jr.)가 남은 편집과 후반작업을 대신하여 영화는 완성되었다.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 역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페이퍼 솔저>(Paper Soldier, 2008)를 만들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영화감독이다. 게르만의 유작으로 남게 된 <하드 투 비 어 갓>은 2013년 로마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문화를 다루는 저널 『칼버트 저널』(The Calvert Journal )에 실린 「<하드 투 비 어 갓: 알렉세이 게르만의 오래 기다린 마지막 영화는 그를 위대한 감독의 위치에 보증할 것인가?」(Hard to be a god: will Alexei German’s long-awaited final film secure his place among the greats?)라는 글에서 영화평론가 안드레이 카르타쇼프(Andrei Kartashov)는 “뚜렷한 중심 서사 없이 흘러가는 이 영화는 어떤 관습과도 타협하지 않고 만들어진 초우주적인 역작이다. 영웅적 인물이나 웅대한 역사관을 포기한 자리에서 게르만은 우주의 위계라는 근원적인 문제(신)에 도전하려 한다”라고 썼다. 아들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는 “어떤 러시아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아버지는 권력과 시대, 국가와의 내적 독백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 <하드 투 비 어 갓>은 러시아에 대한 영화였다. 그리고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의미, 감성을 찾아가는 것에 대한 영화였다”라고 말했다.
영화사적 평가
알렉세이 게르만은 40여 년 동안 단 6편의 영화만을 남겼지만 지난 30년 동안 가장 중요한 러시아의 감독으로 꼽힌다. 그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키라 무라토바( Kira Muratova)와 더불어 1960년대 시작된 소비에트 뉴웨이브의 주축 멤버 중 하나였다. 게르만의 대다수 영화들은 철권통치 시대인 스탈린 집권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소련 역사의 전환기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일곱 명의 친구>는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적색 테러를 주도했던 1918년에 시작된 이야기이고, <내 친구, 이반 라프신>은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대숙청의 절정기인 1935년을 배경으로 한다.
반체제적인 태도와 작품 세계 때문에 그의 영화들은 제작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소비에트 연방 정부로부터 가혹한 핍박을 받았다. 많은 등장인물들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파편화된 내러티브는 전통적 극작법의 관습에 도전한다. 대다수의 영화들은 흑백 또는 절제된 컬러로 찍혔고, 어두운 룩으로 처리되어 오래 묵은 느낌을 전한다. 2013년 로마국제영화제는 알렉세이 게르만의 사망을 추도하고 반체제 영화감독으로서 그가 이룬 영화적 성취를 기리는 의미로 공로상을 수여하였다.
작품 목록
<일곱 명의 친구>(Sedmoy sputnik, The Seventh Companion, 소련, 1968)
<길 위에서의 재판>(Proverka na dorogakh, Trial on the Road, 소련, 1971)
<전쟁 없는 20일>(Dvadtsat dney bez voyny, Twenty Days Without War, 소련, 1977)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은퇴>(Sergey Ivanovich ukhodit na pensiyu, 소련, 1980, 출연)
<래퍼티>(Rafferty, 소련, 1980, TV영화, 출연)
<라이프 스타일 디렉터>(Lichnaya zhizn direktora, 1981, TV영화, 출연)
<내 친구, 이반 라프신>(Moy drug Ivan Lapshin, My Friend Ivan Lapshin, 소련, 1984)
<카누브쉬 브레미아>(Kanuvshee vremya, 소련, 1989, 출연)
<행복한 나날들>(Schastlivye dni, Happy Days, 소련, 1991, 제작)
<폴 오브 오트라르>(Gibel Otrara, The Fall of Otrar, 소련/카자흐스탄, 1991, 제작)
<성>(Zamok, The Castle, 러시아/독일/프랑스, 1994, 출연)
<지젤의 마니아>(Maniya Zhizeli, Gisele’s Mania, 러시아, 1995, 출연)
<기차의 도착>(Pribytiye poyezda, The Arrival of a Train, 러시아, 1996, 출연)
<크루스탈리오프, 나의 차!>(Khrustalyov, mashinu!, Khrustalyov, My Car!, 러시아/프랑스. 1998)
<하드 투 비 어 갓>(Trydno byt bogom, Hard to be a God, 러시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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