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근현대 영화
인사전

이명세

다른 표기 언어 Lee Myung-se , 李明世
요약 테이블
출생 1957년 충남 아산
수상 2008 제9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데뷔 1989년 <개그맨>

요약 1957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영화감독에 대한 꿈을 꾸었고, 동대문상고를 졸업한 후 서울예술전문대학 영화과에 입학했다. 이명세의 유년기를 사로잡은 것은 영화가 아닌 만화였다. 대학 졸업 후 김수용 감독의 연출부에 참여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김수용의 아동영화 <달려라 만석아>(1979)와 <빨주노초파남보>(1979)에 참여한 후 군 입대를 하였고, 제대 후 홍파, 김정일, 배창호 감독의 밑에서 연출부, 조감독 생활을 했다. 배창호 문하에서는 10년 간 현장 경험을 쌓았다. 그는 <개그맨>(1989)으로 데뷔했다. 후속작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첫사랑>(1993)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환상과 몽환의 세계는 이명세의 이러한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젊은 부부의 아기자기한 일상과 사랑을 그린 이야기로, 이명세의 영화와 인간에 대한 시각을 분명히 드러낸 작품이었다. 당대에 유행했던 장르인 로맨틱코미디를 자신의 방식으로 차용했던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흥행 성공으로 이명세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 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국제적으로 이명세가 주목받는 호재가 되기도 했다. 미국의 선댄스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고, 조나단 드미(Jonathan Demme) 감독이 절찬을 보내면서 미국에도 배급되었다.

생애와 이력

이명세 Lee Myung-se 李明世 (1957~ )

한국의 영화감독. 1957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영화감독에 대한 꿈을 꾸었고, 동대문상고를 졸업한 후 서울예술전문대학 영화과에 입학했다. 이명세의 유년기를 사로잡은 것은 영화가 아닌 만화였다. 틈만 나면 그는 만화방으로 달려갔고,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만큼 엄청난 양의 만화를 보았다. 그림 그리는 재주도 남달라 직접 만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이명세 본인의 말에 따르면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장편만화만 10편 정도를 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학창시절에 영화를 총체예술로 이해하고 다양한 예술의 특성들을 수용하고자 노력하면서 주위의 모든 것에 적극적으로 부딪쳤다. 하나의 화두에 사로잡히면 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집요함을 가지고 파고드는 태생적 기질이 그를 단련시켰다.
대학 졸업 후 김수용 감독의 연출부에 참여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김수용의 아동영화 <달려라 만석아>(1979)와 <빨주노초파남보>(1979)에 참여한 후 군 입대를 하였고, 제대 후 홍파, 김정일, 배창호 감독의 밑에서 연출부, 조감독 생활을 했다. 배창호 문하에서는 10년 간 현장 경험을 쌓았다.

작품 세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 Daum 영화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작품 세계그는 <개그맨>(1989)으로 데뷔했다. <개그맨>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한국영화 사상 가장 독특한 데뷔작 중 한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몽환적인 분위기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기존 한국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스토리와 형식미를 가진 작품이었다. 하지만 <개그맨>은 불운의 영화였다. 그해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으로 극장에 걸기로 돼 있었지만 이 영화를 제작했던 태흥영화사가 수입한 영화 <다이하드>(Die Hard, 1988)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해 장기상영하면서 <개그맨>의 개봉은 속절없이 미뤄졌다. 결국 1년 뒤 조촐하게 개봉하는 불운을 겪었다. 평단의 반응도 미미하여 조용히 사라졌으나 후일 열혈 지지자들에 의해 발견되어 재평가되었다. 영화평론가 이효인은 이명세의 영화에 대해 “그의 영화에는 삶의 모습,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라고 평가하였다. 이명세의 영화에는 어느 한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나 특정 집단의 경험을 무시하고, 역사적 상황과 시간을 배제시키는 특징이 있다.
후속작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첫사랑>(1993)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환상과 몽환의 세계는 이명세의 이러한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젊은 부부의 아기자기한 일상과 사랑을 그린 이야기로, 이명세의 영화와 인간에 대한 시각을 분명히 드러낸 작품이었다. 당대에 유행했던 장르인 로맨틱코미디를 자신의 방식으로 차용했던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흥행 성공으로 이명세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 했다. 연극반 지도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여대생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린 영화 <첫사랑> 역시 비관적 삶을 피하지 않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극복하는 아름다운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첫사랑>에서는 참담한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쓴 잔을 마셨다.
<남자는 괴로워>(1995), <지독한 사랑>(1996)은 전작과는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40대 남성들의 피곤한 일상을 그린 <남자는 괴로워>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묘사하고 있다. <지독한 사랑>은 사랑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영화는 시인이자 대학교수인 최영민과 기자 김영희와의 불륜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영화평론가 김수남은 “<지독한 사랑>은 그의 과감한 영화예술가적 기질이 어수룩하게 세속과 결탁한 탓으로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낯선 현실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두 주인공의 일상의 현실로부터 관객들은 동떨어지게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내러티브의 결핍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이처럼 영상 미학적으로 세련되고 풍요로운데 반해 서사가 빈약하다는 상반된 평가는 이명세 영화에 대한 중평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성공 이후 자신 만의 스타일에 도취되어 퇴행적인 몽상가가 되었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한국영화계에는 고집불통 예술가 이명세가 자신의 뜻대로 하게 놔두었다간 낭패를 보고 만다는 소문까지 돌았고, 이명세는 요주의 감독 중 하나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러나 여섯 번째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에서 이명세는 극적 반전을 이루었다. 연쇄살인범을 쫓는 형사와 그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살인범과의 이야기를 다룬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그의 연출력이 한껏 힘을 발휘한 영화였다. 만화적인 요소, 이미지의 속도감, 강렬한 색감과 음악의 사용, 이미지의 질감을 풍부하게 만든 촬영, 장르의 차용, CG 효과 등이 뛰어났고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이전까지 사랑이나 소소한 일상에서 소재를 취했던 그가 상업영화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법으로 ‘액션’이라는 장르를 택했고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잠재력이 폭발적으로 드러났다. 자신의 스타일을 버리지 않으면서 다른 가능성을 찾아 성공한 셈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국제적으로 이명세가 주목받는 호재가 되기도 했다. 미국의 선댄스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고, 조나단 드미(Jonathan Demme) 감독이 절찬을 보내면서 미국에도 배급되었다. 급기야 할리우드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이명세는 2000년 뉴욕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4년간의 뉴욕 체류 기간 동안 그는 한 편의 영화도 만들지 못했다.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받았지만, 할리우드로 간 아시아 감독들의 부정적인 전철을 되밟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창작자로서 최소한의 권리라고 생각한 편집권을 주장하면서 버텼다. 가시적인 성과 없이 2004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명세는 자신의 영화제작사 '프로덕션 M'을 설립하고 복귀작으로 <형사 Duelist>(2005)를 연출했다. 복귀한 뒤 만든 <형사: Duelist>와 (2007)에서도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노선을 굽히지 않고 표현했다. 뛰어난 영상미와 이미지에 대한 장인적 세공력, 섬세하고 몽환적인 감성은 대명사로 남았지만, 스타일에 치중한 나머지 내러티브의 부재를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이 두 편의 영화는 관객들에게도 외면을 받았다.

영화사적 평가

이명세는 관습적인 영화 만들기를 거부하며 고유한 영화관과 스타일로 독보적인 영화세계를 구축했다.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시각적인 기법들을 통해 이미지와 사운드의 표현 방식을 확장하려 했고, 스타일리스트로서 영화 예술의 한계를 시험한 영화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시나리오를 직접 쓰면서 영화의 미학적 가능성을 집요하게 추구했다. 영화평론가 강한섭은 “나는 이명세가 항상 다음 영화를 만들다가 녹음실에서 사망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목숨을 걸고 작품의 완벽을 추구하는 장인이기 때문”이라고 영화에 대한 그의 집념을 표현했다.

작품 목록

<개그맨>(Gagman (Gaegeumaen), 한국, 1988)
<나의 사랑 나의 신부>(My Bride My Love (Na-ui salang na-ui sinbu), 한국, 1990)
<꿈>(The dream (kkum), 한국, 1990, 각본)
<첫사랑>(The First Love (CheosSaRang), 한국, 1993)
<남자는 괴로워>(Affliction of Man (Namjaneun goelo-wo), 한국, 1995)
<지독한 사랑>(Their last love affair (Jidoghan salang), 한국, 1996)
<인정사정 볼 것 없다>(Nowhere to Hide (InJeongSaJeong Bol Geot Eopda), 한국, 1999)
<형사: Duelist>(The Duelist (Hyung-sa Duelist), 한국, 2005)
(M (Em), 한국, 2007)
<미스터K>(Mister K, 한국, 2012)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출처

근현대 영화인사전
근현대 영화인사전 | 저자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 김이석/차민철 | cp명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전체항목 도서 소개

이 사전은 전 세계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명사전으로, 온라인 서비스를 위한 데이터베이스 형태로 작성되었다. 본 사전의 표제어는 1) 한국권 (북한 포함), 2) 영..펼쳐보기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이명세근현대 영화인사전,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 김이석/차민철,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