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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3년 1월 2일 전라남도 광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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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박규열 |
데뷔 | <맹인 대협객>(1971) |
요약 박우상은 1943년 1월 2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조선대학교 국문과에 3학년으로 재학 중일 때, 임권택 감독의 권유로 영화를 시작했다. 그는 임권택 감독의 <망부석>(1963)의 연출부를 시작으로 7년이 넘는 시간동안 임권택 감독 아래에서 영화 연출을 배웠다. 박우상은 임권택 감독과 약 40여 편의 영화를 함께 했는데, 박우상이 특히 시대극이나 액션물에 능했던 것은 임권택 감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우상의 감독 데뷔는 <맹인 대협객>(1971)을 통해 이루어졌다. 박우상이 태창영화사에서 처음 연출한 작품은 <죽음의 승부>(1975)로, 그의 두 번째 영화이기도 했다. 동시에 태창영화사에서 세계시장을 목표로 제작한 첫 번째 영화였다. 당시는 태창영화사가 “방화를 세계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을 노리고 있던 때였다. 이후에도 박우상은 무협 액션영화를 연이어 연출했다. <파라문>(1975), <내 갈 길을 묻지마>(1976), <대련의 해당화>(1976), <귀문의 왼발잽이>(1977) 등이 그것이다.그는 1980년대 중반 할리우드로 진출해서 ‘리처드 W 박’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 이후 헐리우드에 진출한 두 번째 동양 감독이었고, 한국 감독으로는 최초였다. 박우상은 한국적 액션 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영화감독이다.
생애와 이력
박우상 Park Woo-sang 朴祐相 (1943~ )
한국의 영화감독. 본명은 박규열이다. 박우상은 1943년 1월 2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조선대학교 국문과에 3학년으로 재학 중일 때, 임권택 감독의 권유로 영화를 시작했다. 그는 임권택 감독의 <망부석>(1963)의 연출부를 시작으로 7년이 넘는 시간동안 임권택 감독 아래에서 영화 연출을 배웠다. 박우상은 임권택 감독과 약 40여 편의 영화를 함께 했는데, 박우상이 특히 시대극이나 액션물에 능했던 것은 임권택 감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세계
박우상의 감독 데뷔는 <맹인 대협객>(1971)을 통해 이루어졌다. 영화는 장님인 승현이 무술을 배워서 자신의 가족을 몰살한 혁진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었다. <맹인 대협객>은 1972년에 개봉해 만 명 이상의 관객을 기록했고, 이 영화로 박우상은 태창영화사의 전속 감독이 되었다.
박우상이 태창영화사에서 처음 연출한 작품은 <죽음의 승부>(1975)로, 그의 두 번째 영화이기도 했다. 동시에 태창영화사에서 세계시장을 목표로 제작한 첫 번째 영화였다. 당시는 태창영화사가 “방화를 세계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을 노리고 있던 때였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인도네시아의 수출되기도 하였다. <죽음의 승부>는 팽, 신따로, 한동욱이라는 세 인물이 불상 속에 숨겨진 천만달러를 찾기위해 배신을 일삼으며 서로를 죽였지만, 결국 그 돈이 용광로에 불타 사라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박우상은 영화배우 이소룡의 친구이며 미국경찰의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했던 배우 바비 김(金)(본명 김웅경)을 미국에서 초청해 영화를 제작하면서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경향신문』, 1974년 11월 22일 ; 『매일경제』, 1975년 01월 25일).
그러나 1970년대는 군사정권의 통제가 거세지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영화에 대한 검열과 탄압 역시 심해졌다. 특히 활극영화는 폭력적이고 무국적적이라는 이유로 제작 자체가 힘들어졌다(이호걸, 「영화」). 박우상 역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박우상은 자신의 영화인 <대련의 해당화>와 <내 갈길을 묻지마>가 상영 불가 판정을 받고 그도 구치장에 수감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고, 결국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했다. 박우상은 1977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세인트루인스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며 평범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는 1980년 한국으로 돌아와 <돌아온 용쟁호투>(1980)를 연출했다. 박우상은 미국에서 자신과 친분을 쌓았던 재미(在美) 태권도 사범인 이준구를 <돌아온 용쟁호투>의 주인공으로 결정하고, 이준구의 제자였던 제프 스미드, 랜드 앤더슨을 영화에 출연시켰다(『동아일보』, 1980년 08월 16일).
그는 1980년대 중반 할리우드로 진출해서 ‘리처드 W 박’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 이후 헐리우드에 진출한 두 번째 동양 감독이었고, 한국 감독으로는 최초였다(「‘무등산 타잔’이 돌아온다」, 『한겨레21』, 2002년 11월 20일). 박우상이 미국에서 연출했던 영화는 <킬 더 드래곤>(1984), <닌자 터프>(1985), <마이애미 커넥션>(1987)으로, 모두 쿵푸영화였다. 그 중에서 <닌자 터프>는 콜럼비아사를 통해 배급되어 미국 1,600여개의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1987년에는 제작사 ‘박우상 필름’을 설립하기도 했다.
2000년에 그는 <제이슨 리>를 제작하려고 했지만 에서 주연배우를 맡았던 유승준이 촬영을 거부해(『한국일보』, 2000년 05월 02일). 필립 리를 다시 캐스팅하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이후 박우상은 <무등산 타잔, 박흥숙>(2005)을 통해 무등산에서 무허가 건축을 철거하던 직원을 죽인 박흥숙 사건을 영화화했지만(『한겨레21』, 2002년 11월 20일), 관객들에게 외면받았다.
영화사적 평가
박우상은 한국적 액션 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영화감독이다. 그는 영화계의 암흑기였던 70년대에 홍콩 영화를 기반으로 한 권격 영화를 발표하며 한국 액션 영화의 붐을 일으켰고, 80년대에는 암흑가를 배경으로 한 남성들의 세계를 그렸다. 그리고 세련된 액션과 함께 대중적인 소재와 드라마 등이 결합하여 관객들에게 영화적인 재미를 전달하였다. 이처럼 박우상은 지속적으로 무협 활극 영화만을 연출하며 액션 영화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열정 덕분에 동남아시아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헐리우드에 진출하면서 한국 액션영화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작품 목록
<맹인 대협객> (The blind swordsman (Maeng-in daehyeobgaeg), 한국, 1971)
<죽음의 승부> (Mortal Battle (Jug-eum-ui seungbu), 한국, 1975)
<파라문> (Pa Ra Moon (Palamun), 한국, 1975)
<내갈길을 묻지마> (Don't Ask My Way To Go (Naegalgil-eul mudjima), 한국, 1976)
<대의> (Great Cause (Dae-ui), 한국, 1976)
<대련의 해당화> (Wild Rose Under Great Trial (Daelyeon-ui haedanghwa), 한국, 1976)
<대적수> (The Big Opponent (Daejeogsu), 한국, 1977)
<귀문의 왼발잽이> (Noble Warrior (Gwimun-ui oenbaljaeb-i), 한국, 1977)
<돌아온 용쟁호투> (The Return of the Great Fighter (Dol-a-on yong-jaenghotu), 한국, 1980)
<내이름 쌍다리> (My Name is 'Twin Legs' (Nae-ileum ssangdali), 한국, 1981)
<소림관 지배인> (Manager of the Shaolin Hall (Sorimgwa jibaein), 한국, 1982)
<광동관소화자> (Soh Hwa-ja of Guangdong Hall (Gwangdonggwansohwaja), 한국, 1983)
<사대소림사> (The Fourth Largest Shaolin Temple (Sadaesorimsa), 한국, 1984)
<차이나타운> (Chinatown (Cha-inata-un), 한국, 1984)
<킬 더 드래곤> (Kill the Dragon, 미국, 1984)
<닌자 터프> (Ninja Turf, 미국, 1986)
<마이애미 커넥션> (MIAMI CONNECTION, 미국, 1986)
<나를 보라 아메리카> (Look at Me America, 한국, 1991)
<차이나타운 2> (Chinatown 2, 한국, 1993)
<무등산 타잔, 박흥숙> ((Mudeungsan Tajan, Bakheungsuk), 한국,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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