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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6년 전라남도 장성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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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2007년 두바이국제영화제 평생공로상, 2007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2016년 제21회 춘사영화상 특별상 공로상 |
데뷔 |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 |
요약 한국의 영화감독인 임권택은 1936년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남 장성읍에서 100여 마지기의 땅을 가진 부농으로 내로라하는 벌족이었다. 임권택은 정창화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영화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창화의 연출부에서 일하게 된 그는 정창화의 <장화홍련전>(1956)을 시작으로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노다지>(1961), <지평선>(1961), <장희빈>(1961) 등의 작품에서 조감독을 하면서 영화연출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그가 26살이 되던 해에 첫 번째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를 연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누구나 영화를 찍으면 개봉이 되고, 관객동원이 되었기 때문에 임권택은 영화감독으로서 사명감이나 의무감을 가지지 못했다. 그는 1972년까지 악 50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당시의 영화계 관행에 따라 ‘콩볶기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임권택은 <잡초>(1973)를 시작으로 자신이 경험한 질곡의 세월을 담아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70년대 <왕십리>(1976),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상록수>(1978), <깃발없는 기수>(1979) 등의 작품을 선보이면서 작가적 역량을 축적하였다. 1981년 작품인 <만다라>(1981)를 통해 더욱 선명해진 작가의식을 표출하고 있는데, 자기완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리얼하게 표현해 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임권택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생애와 이력
임권택 Im Kwon-taek 林權澤 (1936~ )
한국의 영화감독. 임권택은 1936년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남 장성읍에서 100여 마지기의 땅을 가진 부농으로 내로라하는 벌족이었다. 그러나 부친이 한국전쟁 때 빨치산 활동을 전개한 것을 계기로 크게 몰락하면서 부친은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이후 임권택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임권택은 학비를 내지 못해 숭일중학교 3학년을 끝으로 학업을 포기해야 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가출을 하여 부산으로 내려왔다. 당시 부산은 그나마 다른 지역에 비해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임권택은 부산에서 지게를 지면서 끼니를 이어나갔다.
그는 그곳에서 군화 가공업자 김경주와 함께 일을 하면서 큰 돈을 벌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국영화계는 1955년 이규환의 <춘향전>(1955)과 한형모의 <자유부인>(1956)이 성공하면서 자본과 인력이 넘쳐났고, 임권택은 이 시기에 서울로 올라와 이들과 함께 영화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영화는 임권택에게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었고, 그는 여배우들의 화장품 배달, 이동 촬영용 레일을 조립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작품 세계
임권택은 정창화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영화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창화의 연출부에서 일하게 된 그는 정창화의 <장화홍련전>(1956)을 시작으로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노다지>(1961), <지평선>(1961), <장희빈>(1961) 등의 작품에서 조감독을 하면서 영화연출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정창화는 임권택에게 촬영에서 잘못된 부분은 없었는지 항상 물었는데, 그래서 임권택은 신경을 곤두세워 배우들과 촬영 스태프들을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임권택은 이것이 자신의 연출실력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고 회상하면서 감독으로서 최고의 공부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듯 조감독으로서 경력이 쌓이자 임권택에게도 감독 데뷔를 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가 26살이 되던 해에 첫 번째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를 연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누구나 영화를 찍으면 개봉이 되고, 관객동원이 되었기 때문에 임권택은 영화감독으로서 사명감이나 의무감을 가지지 못했다. 그는 1972년까지 악 50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당시의 영화계 관행에 따라 ‘콩볶기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10여 년 동안 영화제작자들의 입맛에 맞는 상업영화를 찍어내던 그때 임권택은 회의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제작비를 조달해서 ‘내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첫 번째 영화를 완성했는데, <잡초>(1973)가 그것이었다. <잡초>(1973)는 재취자리에 들어간 분례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이야기인데, 남편이 죽자 분례가 전 처의 자식 둘을 친자식처럼 따뜻한 모성애로 키워나간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임권택은 <잡초>(1973)를 시작으로 자신이 경험한 질곡의 세월을 담아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70년대 <왕십리>(1976),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상록수>(1978), <깃발없는 기수>(1979) 등의 작품을 선보이면서 작가적 역량을 축적하였다. 1960년대 다양한 장르영화에 손대면서 흥행감독으로 기반을 다졌던 임권택은 1970년대 국책영화, 반공영화 등을 연출하여 방황하는 세대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휴머니즘과 진정성 있는 자세를 보이면서, 상업영화로 변질되었던 자신의 과오를 채찍질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어필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가 스스로 다시 제작하고 싶은 영화라고 회고하는 <짝코>(1980)가 그 첫 번째였다. <짝코>(1980)는 전투경찰 송기열과 짝코로 악명이 높은 잔류 공비 백공산의 쫓고 쫓기는 30년 간의 추적이 주된 줄거리이다. 백공산을 놓쳐버린 잘못으로 경찰에서 쫓겨나게 된 송기열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평생 백공산을 찾아해맨다. 그러나 둘은 행려병자가 되어 갱생원에서 만나게 되고, 송기열은 백공산을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 태워 자신의 무죄를 위해 힘든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백공산은 송기열의 어깨에 기대어 숨을 거두고 만다. 이 영화는 플래시백 기법을 사용하여 송기열과 백공산의 쫓고 쫓기는 30년 세월을 보여주고 있다.
1981년 작품인 <만다라>(1981)를 통해 더욱 선명해진 작가의식을 표출하고 있는데, 자기완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리얼하게 표현해 내었다. 임권택은 1980년대 주옥같은 작품들을 연속적을 발표하면서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안개마을>(1983), <불의 딸>(1983), <길소뜸>(1985), <씨받이>(1986), <아제아제바라아제>(1989) 등 임권택 영화세계의 정점을 이루는 작품들이 이 시기에 생산되었다. 특히 <씨받이>(1986)는 개인의 삶이 집단의 삶 속에서 유린되었던 사실을 끄집어내면서 대가집의 종손을 생산하기 위해 자행되었던 비인간적인 처사를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으로 강수연은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임권택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93년 발표한 <서편제>(1993)는 이청준의 소설『남도사랑』연작 중 하나인「서편제」를 영화화한 것으로, 현실과 예술 사이에 내재된 비극성의 정서를 한으로 드러낸 작품이었다. 이후 임권택은 <축제>(1996), <창(노는 계집 창)>(1997), <춘향뎐>(2000) 등을 연출하면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2001년에는 임권택의 또 다른 역작인 <취화선>(2001)을 연출했는데, 조선 후기 천재 화가로 호방한 필묵과 정교한 묘사력으로 생기 넘치는 작품을 남겼던 오원 장승업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하류인생>(2004), <천년학>(2006)을 연출했는데, <천년학>(2006)은 임권택의 100번째 영화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달빛 길어올리기>(2010), <화장>(2014)등의 작품을 선보이면서 현재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14년에는 장진과 함께 인천아시안게임 개막식과 폐막식의 공동연출자로 선정이 되어 한국적인 미를 세계에 알리는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임권택은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영화연출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전달하면서 현재까지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영화사적 평가
임권택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1962년에 데뷔한 이래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역 감독이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질곡의 세월을 재구성하여 영화를 만들고, 이를 통해 지치고 유린당한 이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치유의 영화이자, 한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화면은 여백의 활용과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여 한국의 아름다운 산천과 고유의 풍속도를 동양화적인 미감으로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어 지친 이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기에 충분하다. 여전히 그는 뒤쳐지지 않는 자신만의 색깔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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