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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9년 만주의 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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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9년 |
데뷔 | 1937년 <심청전> |
요약 일제 강점기 조선과 해방 후 남한의 여배우이 김신재는 남편 최인규가 기신양행에서 제작하는 영화 〈심청전〉(안석영 감독)에서 녹음 일을 맡으면서 〈심청전〉의 단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이 작품이 김신재의 조선 영화계 데뷔작이었다.〈심청전〉 출연은 그녀에게 큰 기회를 열어주었다. 맡은 역할이 단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 소녀’라는 인상적인 호평을 받으면서 이후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1938년 〈도생록〉을 필두로 하여, 1939년 〈애련송〉과 〈무정〉 그리고 〈처녀도〉, 1940년 〈수선화〉와 〈수업료〉, 1941년 〈너와 나〉, 〈아내의 윤리〉, 〈집 없는 천사〉, 1942년 〈풍년가〉 등이었다. 그녀의 연기에 따라 붙는 수식어는 ‘소녀’의 이미지에서 기인했다. 〈집 없는 천사〉에서의 가련한 역할은 이후 그녀의 연기에 ‘가련한 이미지’를 덧입혔고, 그녀 역시 이러한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그녀는 식민지시대를 겪으면서 모성 이미지로 이러한 연민의 이미지를 변화시켰고, 그로 인해 ‘총후의 모성’이라는 상징적인 위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생애와 이력
일제 강점기 조선과 해방 후 남한의 여배우. 김신재는 1919년 만주의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기록에 따라서는 그녀의 고향이 황해도 의주라는 설도 있다. 김신재는 여학교를 중퇴하고 일하던 직장에서 만난 최인규와 결혼했다. 당시 최인규는 〈춘향전〉의 전 조선 배급권을 확보한 고려영화사의 일을 맡아, 작품을 배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 최인규는 〈춘향전〉의 전 조선 배급권을 확보한 고려영화사의 일을 맡아, 작품을 배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고려영화사는 고려영화협회의 전신에 해당하는 단체로 보인다. 이때부터 최인규는 고려영화협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1937년 오덕섭의 후원으로 고려영화협회가 경성으로 근거지를 옮길 때 그의 영화계 진출도 함께 이루어졌다.
최인규가 영화계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이필우의 녹음조수 일이었다. 기신양행에서 제작하는 영화 〈심청전〉(안석영 감독)에서 녹음 일을 맡고 있었던 이필우의 조수로 전격 합류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의 아내 김신재는 〈심청전〉의 단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이 작품이 김신재의 조선 영화계 데뷔작이었다.
작품 세계
〈심청전〉 출연은 그녀에게 큰 기회를 열어주었다. 맡은 역할이 단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 소녀’라는 인상적인 호평을 받으면서 이후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1938년 〈도생록〉을 필두로 하여, 1939년 〈애련송〉과 〈무정〉 그리고 〈처녀도〉, 1940년 〈수선화〉와 〈수업료〉, 1941년 〈너와 나〉, 〈아내의 윤리〉, 〈집 없는 천사〉, 1942년 〈풍년가〉 등이었다. 1943년에 접어들면서 점차 〈조선해협〉이나 〈우러르라 창공〉 등의 국책영화에 출연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그녀는 뒤늦은 데뷔에도 불구하고, 문예봉이나 김소영 등과 함께 조선의 영화계를 이끄는 주요한 여배우로 격상되었고, 이떼 따라 그녀에 대한 세인의 관심 또한 높아졌다.
이 중에서 최인규가 감독을 맡았던 〈집 없는 천사〉에서 고아 소녀의 역할은 특히 주목되었다. 동생을 데리고 꽃을 팔면서 거리를 누비며 집 없는 소녀의 이미지를 남긴 이 작품에서, 가련한 이미지를 남기고 있으며 식민지 시대 조선인의 애처로운 처지를 상징적으로 대변하였다.
영화사적 평가
그녀의 행보는 해방 후에도 이어져서, 최인규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서 변함 없이 소중한 그녀의 비중을 과시했다. 1948년에 발표된 〈희망의 마을〉, 〈독립전야〉, 〈그 얼굴〉 등이 이러한 작품에 해당했다. 하지만 최인규가 납북되면서 그녀의 영화 인생에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한동안 다방을 경영하면서 어렵게 살던 그녀가 다시 영화계에 발을 내민 것은 1954년이고 〈고향의 노래〉와 〈탁류〉를 필두로 하여 1981년 〈종군수첩〉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녀의 연기에 따라 붙는 수식어는 ‘소녀’의 이미지에서 기인했다. 〈집 없는 천사〉에서의 가련한 역할은 이후 그녀의 연기에 ‘가련한 이미지’를 덧입혔고, 그녀 역시 이러한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그녀는 식민지시대를 겪으면서 모성 이미지로 이러한 연민의 이미지를 변화시켰고, 그로 인해 ‘총후의 모성’이라는 상징적인 위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년부인 역할도 이러한 단아한 이미지와 연계되는 것이었다. 이순진은 그녀가 평생을 이룩한 이미지의 배반한 역할이 〈장마〉였다고 기록했는데, 이 작품에서의 악착스러움은 그만큼 낯선 이미지였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1999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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