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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근현대 영화
인사전

이영춘

다른 표기 언어 Lee Yeong-choon , 李英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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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1939년 <귀착지>

요약 일제 강점기 조선의 감독인 이영춘은 나운규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한양영화사 제작 〈아리랑 제 3편〉의 ‘미술’로 활동한 바 있다. 한양영화사의 감독으로 입봉하여 네 번째 작품을 지휘한 이가 이영춘이었다. 이것은 한양영화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후속 세대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경제적 곤란으로 제작 중단되었고, 한양영화사는 잠정 휴업 상태에 빠져든다. 이영춘의 감독 활동은 이 작품 하나로 마무리되었다. 그러한 면에서 이영춘은 조선영화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감독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운규의 조감독으로서, 그리고 한양영화사의 단원으로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고 끝까지 작품 세계를 이어가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생애와 이력

이영춘 Lee Yeong-choon 李英椿(?~?)

일제 강점기 조선의 감독. 이영춘은 나운규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한양영화사 제작 〈아리랑 제 3편〉의 ‘미술’로 활동한 바 있다. 본래 이영춘은 감독 지망생이었기 때문에, 차후 그는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쌓아, 연출자로 입봉하게 된다.

한양영화사는 〈아리랑 제 3편〉의 제작 실패와 흥행 부진으로 인해 재정적인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이후 금강키네마사와 합작으로 〈인생항로〉를 제작하지만 결과적으로 침체되는 제작사의 운명을 거부하지 못했다. 네 번째 작품으로 나운규 원작의 〈도회의 뒷골목〉, 일명 〈도회의 부두〉 제작에 임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때 출연한 배우로는 김한영, 박경주, 조춘방, 임경옥, 이미선, 박창혁, 함춘이, 박덕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인력은 나운규와 윤봉춘과 전택이 그리고 현순영과 현방란이 빠진 상태의 한양영화사를 보여준다.
즉 한양영화사에서 나운규의 힘이 줄어들었고, 대표 배우들이 사라진 상태였던 것이다. 이때 한양영화사의 감독으로 입봉하여 네 번째 작품을 지휘한 이가 이영춘이었다. 이것은 한양영화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후속 세대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경제적 곤란으로 제작 중단되었고, 한양영화사는 잠정 휴업 상태에 빠져든다. 이때가 1937년 6월이었다.

한양영화사는 1939년 재기작품 〈귀착지〉를 개봉할 때까지 이러한 휴업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이영춘은 도일하여 영화감독에 관련된 공부를 해나갔다. 한양영화사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전택이는 〈도회의 뒷골목〉이 제작 중단된 이래 여러 영화사를 전전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양영화사의 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부호 김갑기를 만나면서 한양영화사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영춘 원작․감독의 영화 〈귀착지〉가 그 재기작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전술한 대로 이영춘은 나운규의 조감독 출신 감독으로 〈도회의 뒷골목〉에 이어 〈귀착지〉의 감독으로 한양영화사에 복귀했다.

작품 세계

1938년 7월 한양영화사는 사무실을 무교정 33번지에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부활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부호 김갑기(제작자)의 후원으로, 과거의 한양영화사 인력이 거의 동원된 체제를 꾸릴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배우 윤봉춘과 전택이, 촬영감독 이신웅, 영화감독 이영춘 등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자본주 김갑기의 재정 후원에 힘입어 의욕적으로 한양영화사의 갱생을 주도했으며, 재기 작업인 〈귀착지〉의 크랭크 인도 1938년 8월 1일에 이루어졌다. 〈귀착지〉는 크랭크 인한 지 1달도 안 되는 1938년 8월 16일 무렵에 촬영을 완성했고, 곧이어 녹음에 착수했다. 제작 일정이 신속했던 만큼 당초에는 1938년 내에 개봉할 수 있을 것이라 예측되었지만, 이후에 촬영이 보충되면서 제작 일정이 연장되었고, 1939년 3월 4일(~10일) 황금좌에서 개봉하였다.

〈귀착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강영철(최엽 분)’은 고향에 아내 ‘순옥(노재신 분)’을 둔 유부남이지만, 서울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중 기생 ‘월매(고영란 분)’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의 시작은 영철의 아버지(윤봉춘 분)가 영철의 요구에 따라 돈을 붙이는 사연이다. 기생 월매에게 쓸 돈을 영철이 변통했기 때문이다.
기생 ‘월매’ 역시 기구한 운명을 지닌 여인으로, 본래 이름은 ‘정숙’이었다. 그녀는 동경 유학까지 한 여자 재원이었지만, 남편 ‘응수(전택이 분)’가 자신과 아이를 버리고 사라지자 기생이 되었다. 월매는 아들 ‘복동이(윤옥동 분)’를 ‘유모’(문지방 분)에게 몰래 맡겨 키우며 하루하루를 견디다가, 3년 동경 유학 끝에 미전에 특선하고 돌아온 남편과 재회한다. 처음에 월매는 그 동안의 원망 때문에 남편 응수를 용서하지 않지만, 차츰 자식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되찾게 된다.
한편 영철은 월매에 빠져 집안과 아내와 부모를 돌보지 않다가, 어머니(김영순 분)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영철은 그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오지만, 장사를 핑계로 돈 천 원만 융통한 채 서울로 돌아온다. 영철은 융통한 돈을 월매에게 전하려 했으나, 월매는 이 돈을 거절한다. 월매의 태도에 충격을 받은 영철은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고, 아내가 야학원을 운영하는 고향으로 내려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영화사적 평가

김정혁은 이 영화에서 “이 작품에서 무엇을 그리려 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진의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혹평했다. 서항석도 이 작품에서 기생을 앞세운 설정은 흥행을 위한 시대적 유행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비판은 정숙이 월매가 되는 설정 자체가 인기에 영합한 설정이며, 그 이후 월매와 응수의 결합 혹은 영철의 농촌 회귀가 작위적인 구성이라는 점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이 작품은 당시의 유행이었던 기생을 등장시키고, 이러한 기생을 중심으로 한 삼각관계 ‘응수/월매/영철’을 구성하여 혹은 영철의 심적 방황을 그려내기 위해 ‘월매/영철/순옥’의 삼각구도를 표방한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영춘의 감독 활동은 이 작품 하나로 마무리되었다. 그러한 면에서 이영춘은 조선영화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감독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운규의 조감독으로서, 그리고 한양영화사의 단원으로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고 끝까지 작품 세계를 이어가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당대의 다른 감독과 달리 가망이 없는 한양영화사를 떠나 새로운 작품 활동을 시도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제작사로 간주하고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은 귀감이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목록

〈아리랑(3편)〉(Arirang(part 3), 조선, 1936, 미술)
〈귀착지〉(Return Spot(Gui-chak-ji), 조선, 1939, 각본‧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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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근현대 영화인사전
근현대 영화인사전 | 저자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 김이석/차민철 | cp명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전체항목 도서 소개

이 사전은 전 세계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명사전으로, 온라인 서비스를 위한 데이터베이스 형태로 작성되었다. 본 사전의 표제어는 1) 한국권 (북한 포함), 2) 영..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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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영춘근현대 영화인사전,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 김이석/차민철,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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