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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5년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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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2년 |
데뷔 | 1919년 〈고종인산실경(高宗因山實景)〉(제작) |
요약 일제 강점기 조선인 영화제작자로, 일본인 제작자 사이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 영화의 초기 유산을 지켜온 영화인이다. 실제로 그는 단성사를 운영하면서 영화 외에 연극, 구극 분야에서 한국 문화 보존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생애와 이력
박승필 PARK Seung-pil 朴承弼(1875~1932)
일제 강점기 조선인 영화 제작자.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에는 한학을 공부했으나 신학문은 거의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1900년대 초 서구의 문화 유입에 맞서, 조선의 예능과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광무대(光舞臺)를 인수하여, 판소리나 탈춤 등의 한국 전통연희 공연장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박승필 일행’을 조직하여 실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1918년에는 단성사를 인수하여 운영하면서, 10 여 년 간 흥행분야에서 독점적인 위상을 확보하였다.
작품 세계
박승필은 신극좌 대표였던 김도산으로 하여금 조선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 일명 〈의리적 구투〉(義理的 仇鬪))를 만들도록 후원했고,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이 작품을 공연함으로써 조선의 영화 제작 가능성을 확대하였다. 연쇄극은 연극 중의 일부 장면을 미리 촬영한 영화 장면으로 대체하여, 연극적 특성에 영화적 장점을 가미한 혼합 장르였다. 연쇄극은 조선 영화의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데, 〈의리적 구토〉는 이러한 연쇄극의 첫 작품으로 조선 영화의 효시로 인정받기도 하는 작품이다.
연쇄극으로 제작되기 이전 〈의리적 구토〉는 1919년 7월에 공연된 신파연극작품이었는데, 박승필이 경영자의 감각으로 이 작품을 연쇄극으로 변형하도록 후원한 것이다. 김도산 일행은 박승필의 자금을 지원받아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완성할 수 있었고, 박승필은 이 작품을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박승필은 선각자의 눈으로 연쇄극의 필요성을 예견했고, 〈의리적 구토〉의 흥행 성공을 이끌어내면서 연쇄극 제작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의리적 구토〉의 촬영은 미야가와 소우노스케(宮川早之助)가 맡았고, 김도산․이경환․윤혁․김영덕 등이 출연하였다.
1923년 일본인 하야가와 고슈(早川孤舟)가 한민족의 고유 문화유산인 〈춘향전〉을 영화로 제작하여 큰 인기를 끌자, 단성사의 한국인 경영자였던 박승필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장화홍련전〉 제작에 돌입하였다. 장화 역은 김옥희가 맡았고, 홍련 역은 김설자가 맡았으며(안종화는 여주인공이 ‘심연홍’ 혹은 ‘김연홍’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원님 역은 변사인 우정식이 맡았고, 아버지 역은 최병룡이 맡았다. 각본은 광무대 소속 변사였던 김영환이 맡았고, 영사 기사 출신인 박정현이 감독을 맡았으며, 단성사 박승필연예부가 제작을 담당했다.
하야가와의 〈춘향전〉 제작에 자극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답게 〈장화홍련전〉의 제작진과 배우들이 모두 조선인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조선인 중에서 촬영과 편집에 적임자가 마땅하지 않았다. 이때 박정현이 이필우를 추천했다. 안종화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현과 이필우는 우미관 영사실의 책임자와 조수로 함께 일한 경력이 있어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필우는 이기세의 극단에서 연쇄극을 촬영한 경험이 있었지만, 박승필은 이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필우는 조선여자정구대회를 촬영하여 현상해 보여주어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촬영 업부를 맡았다고 한다.
〈장화홍련전〉은 여름에 촬영되어 1924년 9월 5일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원래 11일까지 상영할 예정이었으나 몰려드는 관객으로 인해 12, 13일에도 상영되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작품의 인기가 대단하여 매일 밤 표를 사고도 입장하지 못하는 관객이 많았고 시간이 맞지 않아 애를 태우는 관객들이 많았다고 한다. 유감없이 볼 수 있게 해달라는 투서가 빗발치듯 들어와서 단성사 측도 이틀을 연장 상영하게 되었다. 그 신문기사는 〈장화홍련전〉의 개봉과 성공을 ‘조선에 활동사진이 생긴 이래 초유의 성황’이라고 표현하며 당시의 반응을 전하고 있다.
영화사적 평가
그러나 이러한 반응과는 달리 전문가들의 견해는 냉혹했다. 소품과 의상의 부주의한 점을 지적하기도 했고, 미숙한 배우들의 연기를 꼬집기도 했다. 상황 설정의 의문점을 제기하기도 했다. 심지어 한마디로 ‘언급할 가치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영화’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안종화). 이러한 평가를 종합했을 때 〈장화홍련전〉은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영화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 제작진만으로 영화를 제작한다는 당초 계획은 민족정신을 드높이고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중요한 요건으로 작용했지만, 아무래도 앞선 일본의 기술과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일본인이 영화계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기념비적인 의의는 찾을 수 있어도 완성도 있는 작품을 산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단성사 촬영부의 운명은 이러한 당시 영화계의 판도와 대세를 말해준다. 단성사 촬영부는 〈장화홍련전〉을 찍은 후에는 주로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본부로 사용되었다. 그 후 박승필은 나운규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여 〈잘 있거라〉, 〈옥녀〉, 〈사나이〉 등의 제작에 출자한다. 단성사 촬영부는 이 과정에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 것이다. 나운규의 작품이 대부분 단성사에서 개봉된 것도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박승필은 나운규를 후원하여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도록 도왔을 뿐만 아니라, 이필우, 이경손 등에게 프로덕션을 설립하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박승필이 운영했던 단성사는 조선 자본으로 운영되는 유일한 영화관이었으며, 조선의 영화를 산출하는 수원지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조선 영화 초창기 기록물 성격의 필름들과, 조선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 순주 조선인의 인력으로 제작된 〈장화홍련전〉(1923), 〈잘 있거라〉(1927), 〈옥녀〉(1928), 〈사나이〉(1929) 등이 박승필의 자본이 투입되어 제작될 수 있었다. 1928년 박승필은 단성사 영화구락부를 창설했으며, 영화잡지 『단성가』를 발행하기도 했다. 1932년에 별세했는데, 그의 사후 단성사는 그 힘을 소실하기 시작했다.
박승필은 서구 문화에 맞서는 조선 문화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했고, 극장과 자금을 통해 이를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민족자본의 유일한 거처였던 단성사의 사주로 활동하면서,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제작과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장화홍련전〉의 제작을 이끌어내었다. 이러한 박승필의 공로는 조선 영화의 전개와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 영화사의 독립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박승필은 초기 조선 영화 제작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작품 목록
〈고종인산실경(高宗因山實景)〉(The Real Scenes of the National Funeral of Gojong (Gojong-insansilgyeong), 조선, 1919, 다큐멘터리, 기획․제작)
〈형사의 고심〉(A Detective's Great Pain(Hyeongsa-ui gosim), 조선, 1919, 기획․제작)
〈경성교외전경(京城郊外全景)〉(The Suburban sceneries of Kyongsung (Gyeongseonggyo-oejeongyeong), 조선, 1919, 다큐멘터리, 기획․제작)
〈시우정(是友情)〉(This Friendship(Si-ujeong), 조선, 1919, 다큐멘터리, 제작)
〈경성전시의 경(京城全市의 景)〉(The Panoramic view of the whole city of Kyeongsung (Gyeongseongjeonsi-ui gyeong), 조선, 1919, 다큐멘터리, 기획․제작)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Uirijeok Guto, 조선, 1919, 기획․제작)
〈학생절의〉(The Fidelity to A Student's Principle(Hagsaengjeol-ui), 조선, 1920, 제작)
〈의적〉(The Chivalrous Robber(Uijeog), 조선, 1920, 기획․제작)
〈국경〉(The Border(Guggyeong), 조선, 1923, 제작)
〈장화홍련전〉(The Story of Jang-hwa and Hong-ryeon(JanghwaHongryeonjeon), 조선, 1924,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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