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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화상전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나는 예술가다!' 자화상으로 세상을 향해 외치다

요약 테이블
출생 1471년
사망 1528년
국적 독일
대표작 〈장미 화관의 축제〉, 〈동방박사의 경배〉, 〈네 명의 사도>, 〈풀밭>, <산토끼>

'화공'이란 기능인에서 '화가'라는 예술가로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500, 67×49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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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에 있어서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시기는 르네상스이고, 그 중심지는 이탈리아다. 특히 미술에서는 가히 독보적이다. 당시 이탈리아 출신 화가들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이름만 들어도 엄청난 거장들이 여럿 있다. 이러한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독일 출신 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알브레히트 뒤러'다. 당시 독일은 철학과 인문학 분야와는 달리 미술에서만큼은 변방 취급을 받았다.

뒤러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바로 자화상 때문이다.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처음으로 자화상을 그린 화가로 뒤러를 꼽는 데 미술사가들은 주저하지 않는다. 르네상스가 태동하기 전인 중세에는 화가라는 신분이 석공이나 구두 만드는 사람들과 비슷한 수공업자 취급을 받았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화가'가 아니라 '화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뒤러는 스스로 이름 없는 화공이길 거부했다. 화가로서 남달랐던 뒤러의 자존감은 그가 남긴 자화상에 짙게 배어있다.

자화상의 아버지

인물을 그리는 초상화(portrait)는 'portray'의 어원인 라틴어 'protrahere'에서 유래한다. '발견하다'라는 의미가 담긴 protrahere 앞에 '자신'을 뜻하는 'self'를 붙여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인 자화상(self-portrait)을 태동시켰다. 자화상은 화가가 자기 자신을 모델로 그리는 초상화인 셈이다. 흔히 모델료가 없는 가난한 화가들이 궁여지책으로 자신을 모델삼아 그리기 시작한 데서 자화상의 유래를 찾기도 하지만, 뒤러의 자화상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자화상이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화가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하는 그림이다. 자화상은 냇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한 나르시스의 나르시즘(narcissism, 자기애–역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뒤러는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자화상을 회화의 한 영역으로 개척했다. 그는 평생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가운데서도 최고의 걸작은 스물아홉 살에 그린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에는 화가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절정을 이룬다.

뒤러가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을 그린 시기는 스물아홉 살 생일이 돌아오기 바로 전이다. 그림 속 화가의 모습은 그 크기가 실제와 같다. 화려한 모피 코트를 차려 입은 화가는 정면을 응시한 채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심장을 가리키고 있다. 뒤러가 활동하던 당시에 정면을 응시한 자세는 오로지 그리스도나 왕에게만 허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족이나 귀족만이 입을 법한 모피 코트를 화가가 걸치고 있는 모습도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이었다.

비록 서른이 채 안된 젊은 화가였지만, 뒤러는 이 작품을 통해 '나는 (기술 좋은 화공이 아닌) 예술가다!'라고 세상을 향해 당당히 외쳤던 것이다. 실제로 뒤러는 그림 안에 "뉘른베르크 출신의 나 알브레히트 뒤러는 스물아홉 살의 나를 내가 지닌 색깔 그대로 그렸다"라고 써 놓았다. 일각에서는 이 작품을 두고 뒤러가 예술가의 창의력이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능력과 동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당시 뒤러의 패기와 열정을 감안하건대 아주 근거 없는 얘기만도 아닌 듯싶다.

뒤러는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에서 엄격함과 치밀함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북유럽 화풍에 인체를 부드럽고 풍만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인 르네상스 화풍을 접목시켰다.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을 가리켜 뒤러가 자신의 화풍에 변화를 시도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껏 섬세해진 뒤러의 화법은 라파엘로마저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에서 굵고 풍성한 머릿결을 표현한 기법을 보고 베네치아파를 대표하는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는 "뒤러의 그림 속 머리카락은 아마도 특수한 붓으로 그렸을 것이다"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뒤러는 배경을 비롯한 모든 사소한 주변 환경을 생략하고 오로지 인물의 신체만을 돋보이게 강조함으로써 보는 이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림 속 뒤러는 삼각형 구도 속에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얼굴, 머리카락, 의상은 물론 빛에 반사된 일정한 공간까지 정밀하게 묘사함으로써 풍부한 질감을 전달한다.

우아한 기품이 돋보인 쾌남 화가

〈스물두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493, 56×44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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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는 소묘와 유화 등 다양한 형식을 이용하여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는 렘브란트 이전의 서양 미술사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에 해당한다.

뒤러는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을 그리기에 앞서 이십 대 초반에도 자화상 몇 점을 그렸다. 이 가운데 〈스물두 살의 자화상〉은 뒤러가 정식으로 그린 첫 번째 자화상이다. 여행 중에 그린 이 작품은 휴대의 편의를 고려해 송아지 가죽에 그렸다. 당시 그는 도제로서의 수련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 작품을 그렸던 장소는 아마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도시–역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 화가는 매우 세련되고 사랑스런 청년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주름을 많이 잡아 몸에 꼭 끼는 흰색 상의와 좁은 소매의 검은 외투는 당시 북유럽에서 유행하던 패션을 짐작케 한다. 긴 곱슬머리는 양쪽 어깨에 흘러내리고 이제 막 나기 시작한 옅은 갈색의 수염은 풋풋한 남성미를 자아낸다. 그림 밖을 응시하는 두 눈에는 뒤러 특유의 자신감이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뒤러가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을 받기 전에 그린 것이어서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북유럽 화풍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뒤러만의 뛰어난 조형 능력과 색채미가 돋보인다.

〈스물두 살의 자화상〉에서는 뒤러가 손에 들고 있는 푸른 나뭇가지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이는 엉겅퀴에 속하는 식물로 독일에서는 '남자의 충절'을 의미한다.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을 두고 뒤러가 약혼녀인 아그네스(Agnes Frei)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장갑을 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498, 52×41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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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스물두 살의 자화상〉 등 뒤러의 자화상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작품이 바로 〈장갑을 낀 자화상〉이다. 〈장갑을 낀 자화상〉까지 이렇게 세 점의 작품을 가리켜 뒤러의 3대 자화상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장갑을 낀 자화상〉은 뒤러가 스물일곱 살 때 그린 것이다. 이때 그는 남유럽을 두루 다니며 이탈리아 미술의 화풍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 작품의 오른쪽에 살짝 보이는 알프스 풍경은 뒤러가 수년 전 이탈리아를 여행하기 위해서 알프스산을 넘었을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작품의 배경에 풍경과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창을 그려 넣는 회화 기법은 15세기 네덜란드 지역(오늘날의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부 지방까지 포함한다–역주)에서 시작되어 유럽 각지로 유행했는데, 세속적인 초상화 외에 종교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림 속 뒤러를 보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자신감 외에도 우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그는 베네치아 풍의 복장을 입고 당시 유행하던 흑백의 줄무늬 모자를 썼다. 머리 스타일과 수염의 세부 묘사는 화가가 여전히 북유럽 화풍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묘로 시작해 소묘로 완성한 자화상

〈열세 살의 자화상〉, 소묘, 1484, 27.5×19.6cm,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베르티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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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가 처음 그린 자화상은 소묘 작품인 〈열세 살의 자화상〉이다. 이 그림은 서양회화사에 전해오는 가장 초기의 자화상으로 꼽힌다. 뒤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금세공 기술을 배웠다. 이 작품을 그렸을 당시 그는 아직 전문적으로 그림을 공부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림에 나타난 소묘 기법은 다빈치에 견줄 만큼 뛰어나다. 뒤러는 이 작품에서도 가는 선을 표현하는 데 유리한 은필(銀筆)을 사용하여 치밀한 데생을 강조하는 북유럽 미술의 엄격한 화풍을 보여준다.

〈1492년 자화상〉은 종이에 깃펜으로 그린 것으로 뒤러가 에를랑겐(Erlangen)에 있을 때 작업한 것이다. 에를랑겐은 독일 남부의 뉘른베르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이다. 1490년경 뒤러는 스승인 미하엘의 공방에서 도제 생활을 마친 뒤 안목을 넓히기 위해 독일의 인접 국가들을 여행했다. 그림 속의 뒤러는 오른손을 들어 크게 뜬 눈초리를 감추고 있는데 마치 외부 세계를 경험한 뒤의 놀라움과 감탄을 묘사한 듯하다. 이 소묘는 깃펜의 특성인 거친 선을 사용하여 화가의 감정을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1492년 자화상〉, 소묘, 1492, 20.4×20.8cm, 소장처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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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손과 베개의 연구〉, 소묘, 1493, 28×20cm,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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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는 만년필로도 자화상을 그렸는데, 〈자화상, 손과 베개의 연구〉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뒤러가 종이에 만년필로 그린 소묘 초안이다. 만년필이 만들어 내는 선에서 세밀하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진다. 그늘지거나 겹쳐지는 부분에서 가는 선을 교차해 가며 거친 듯 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했다. 이 그림은 뒷면에 '1493'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1493년에 유화로 그린 〈스물두 살의 자화상〉의 사전 작업으로 추정된다.

뒤러는 치밀한 세부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북유럽 화풍과 이탈리아 미술 특유의 웅장하고 활력 넘치는 화풍을 융합하려 시도했고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커다란 미술적 성과를 거뒀다. 그의 초기 작품 대부분은 복잡한 구도에 감정을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지만 이후 조금씩 표현이 절제되면서 〈나체의 자화상〉과 같은 고전적인 화풍으로 전환되었다.

1505년부터 1507년까지 뒤러는 이탈리아를 두 번째 여행했다. 이때 그는 볼로냐, 피렌체, 로마 등을 방문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베네치아에 머물며 다빈치와 라파엘로의 작품을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유럽에서 나체 인물상을 그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림 속 인물은 실제 화가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며 몸은 앙상하게 말랐고 얼굴 표정마저 어둡고 무거워 보인다. 당시 서른 중반의 뒤러는 이미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나체의 자화상〉은 우아함과 자신감으로 대표되던 이십 대의 자화상과 크게 다르다. 비록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내적 성찰이 자신 앞에 놓여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체의 자화상〉은 깃펜에 잉크를 찍어서 녹색의 종이에 그린 뒤 빛에 반사되는 부분을 백분을 사용하여 강조했다. 깃펜의 예리한 펜촉은 매우 경쾌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선을 표현해서 마치 판화와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나체의 자화상〉, 소묘, 약 1505~1507, 29.2×154cm, 독일 바이마르 시립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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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신 회가들의 입을 다물게 하다

뒤러는 당시 대부분의 화가와 마찬가지로 대형 종교화나 역사화에 자신의 얼굴을 즐겨 그려 넣었다. 제단화인 〈장미 화관의 축제〉는 뒤러가 이탈리아를 두 번째 여행할 때 베네치아에 머무는 동안 독일인이 주로 모이는 산 바르톨로미오 성당의 부탁을 받아 그린 것이다. 당시 그는 베네치아 화가들이 색채 조절 기법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그들은 내가 '판화를 그리는 화가로서는 실력이 뛰어나지만 회화에서 색채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장미 화관의 축제〉가 완성됨에 따라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다." 뒤러는 이 그림을 불과 다섯 달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장미 화관의 축제〉는 성모와 성자가 교황 율리우스 2세(왼쪽에 무릎 꿇은 사람)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1519)(오른쪽)에게 장미 화관을 하사하는 장면이다. 이 두 사람은 각각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대표한다. 그림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전 세계가 기독교로 하나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그림에서 뒤러는 오른쪽 가장자리의 나무 아래에 매우 만족스런 얼굴로 서 있다.

〈장미 화관의 축제〉, 제단화, 1506, 162×195cm, 체코 프라하 국립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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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의 경배〉, 제단화, 1504, 100×114cm,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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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는 초기 제단화인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자신의 얼굴을 좀 더 부각시켰다. 그림 중앙에 녹색 망토를 쓴 금발의 남자가 바로 뒤러이다. 이 그림은 뒤러가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마친 뒤 두 번째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완성한 것이다. 그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1463~1525)의 부탁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원래는 왕궁의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유화처럼 선명한 색과 세부 묘사를 중시한 것은 전형적인 북유럽 미술의 특징이다. 화면 가운데 인물을 두고 펼쳐진 피라미드 구도는 남부 이탈리아 화풍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네 명의 사도〉는 뒤러가 인생의 말년에 마지막으로 그린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1526년 그는 이 그림을 고향인 뉘른베르크 시의회에 기증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신약성서의 저자인 요한, 베드로, 마르코, 바울이다. 뒤러는 청년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의 남성을 통해 인간의 네 가지 성격인 충동, 신중, 열정, 근심을 표현했다.

아울러 그는 〈네 명의 사도〉에서 불필요한 장식이나 사소한 디테일을 생략하고 다른 성화에서 자주 보이는 광환(光環)도 넣지 않았다. 네 명의 사도가 함께 만들어 내는 신성함은 개인적인 신성함을 합한 것보다 더욱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이들이 작품 속에서 전통적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평등한 개체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전해지는 느낌이다. 뒤러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종교적 관점을 깊이 주입했을 뿐만 아니라 인성(人性)에 관한 신교의 교리도 표현했다.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사도들의 형상은 그들이 쓴 복음서를 연상시킨다. 뒤러는 친구인 신학자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젊었을 때 나는 변화와 새로움을 조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단순함이야말로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깨달았다."

〈네 명의 사도〉, 캔버스에 유채, 1526, 215×76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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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사도〉, 캔버스에 유채, 1526, 215×76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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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재능

북유럽 화풍을 계승한 뒤러는 동시대의 이탈리아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자주 비교된다. 그는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에 관심이 많았다. 〈풀밭〉, 〈산토끼〉 그리고 〈푸른 비둘기의 날개〉는 자연과 동물에 대한 뒤러의 호기심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작품들 모두 불투명 수채 안료를 사용하여 그린 것이다. 이 기법은 서양 미술사에서 18세기 이후 풍경화를 제작할 때 비로소 활발히 사용되었지만 수채화의 매력을 일찌감치 간파한 뒤러는 한발 빨리 이 방식을 도입했다. 수채 안료에 흰색의 초크를 섞으면 불투명 수채 안료가 된다. 뒤러는 하나의 작품에 투명 수채와 불투명 수채 안료를 동시에 사용했다. 뒤러의 이러한 시도는 '현대 수채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풀밭〉, 수채, 1503, 40×32cm,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베르티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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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 수채, 1502, 25×23cm,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베르티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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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비둘기의 날개〉, 수채, 1512, 20×20cm,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베르티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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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는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회화 이론에 관한 저술로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1512년 그는 젊은 화가들을 위해 미술 교과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의 평생지기였던 인문학자 빌발트 피르크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 1470~1530)는 뒤러가 예술과 건축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525년에 출판된 『측량론』은 독일 최초의 미술 이론서이다. 『축성법-도시, 성곽, 부락의 방어공사』는 1527년에 출판되었고, 마지막으로 『인체비례론』은 뒤러가 세상을 떠난 해인 1528년에 출판되었다.

현재 뒤러의 작품은 판화, 유화, 수채화와 소묘 등 일천여 점이 전해온다. 그 중 판화가 가장 많으며 독립된 작품(목판과 동판 포함)으로 4백여 점이 있다. 뒤러는 당시는 물론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판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목판화는 1420년경 유럽에 처음 전해졌는데, 뒤러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책의 삽화 혹은 독립된 작품으로 제작되어 크게 성행했다. 대량 복제가 가능한 판화는 화가의 이름을 매우 효과적으로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축성법-도시, 성곽, 부락의 방어공사』에 수록된 목판 삽화, 1527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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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량론』에 수록된 목판 삽화, 1525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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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비례론』에 수록된 목판 삽화, 1528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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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판화는 15세기 중엽에 시작됐다. 동판이 목판에 비해 더욱 세밀한 표현이 가능했기 때문에 16세기 들어서는 차츰 목판을 대체했다. 뒤러는 동판을 이용해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의 동판화 제작 방법은 이전 시대의 어떤 작품보다도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그는 매번 주제를 바꾸어 작업하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작품에 반영했다. 뒤러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필코 세상 곳곳에 전파하고 말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뒤러의 작품들은 고객의 주문을 받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그림에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1513년에 완성한 〈기사, 죽음, 악마〉는 동판화 기법으로 만들어 낸 작품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림 속의 기사는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여행길에서도 의연하게 전진하고 있다. 죽음의 신이 나타나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굳건한 믿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뒤러는 후원자의 요구에 따라 작품을 만드는 중세의 전형적인 예술가에서 벗어나 창작자 개인의 의식을 표현하는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난 것이다.

〈기사, 죽음, 악마〉, 동판화, 1513, 24×19cm, 소장처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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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속 당당함만큼이나 성공한 삶

뒤러는 1471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와 이름이 같은 아버지는 헝가리 국적의 금 세공사였고 어머니는 금 세공사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슬하에 열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뒤러는 그 중에서 셋째였다. 뒤러는 형제자매 중 열다섯 명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뜬 특이한 가족사를 지니고 있다.

뒤러는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금세공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1486년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의 공방을 떠나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이름난 화가인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 1433~1519)의 도제가 되었다. 미하엘이 삽화를 많이 그린 화가였던 점을 감안하건대 뒤러는 그에게서 목판화로 삽화를 제작하는 기술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뉘른베르크의 풍경〉, 채색판화 삽화, 1493, 출처 : 하르트만 셰델(Hartmann Schedel)의 『세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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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는 뉘른베르크의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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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는 1490년부터 1494년까지 독일 각 지방과 이웃 나라를 떠돌아 다녔다. 이 시기를 가리켜 '뒤러의 방랑기'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특히 그가 한동안 머물렀던 바젤(Basel, 지금의 스위스 지역–역주)은 당시 유럽에서 출판업이 가장 발달한 도시였다. 뒤러는 이곳에서 책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리는 작업을 했다. 1494년 결혼을 위해 잠시 고향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혼자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듬해 봄에 다시 고향에 돌아온 그는 뉘른베르크에서 개인 목판화 작업실을 열었다.

1505년부터 1507년까지 뒤러는 두 번째로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이때의 여행에서 그는 사람의 몸과 고전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더욱 성숙해졌다.

뒤러의 고향 뉘른베르크는 유럽에서 문화와 상업이 발달한 곳으로 당시 인구가 5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였다. 뉘른베르크는 유럽의 중심에 위치하여 동서남북이 교차하는 지리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에 세금을 납부했지만 자유도시였던 뉘른베르크에 학문과 예술 분야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1466년 뉘른베르크에 거주했던 수학자 존 무어(John Moore)는 이곳을 거주지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뉘른베르크는 이미 유럽의 중심이 되었다. 상인은 이곳을 거쳐 각지를 다니며 장사를 하고, 각국의 학자들은 이곳에서 학문을 교류할 수 있었다." 뒤러의 대부(代父)였던 안톤 코베르거(Anton Koberger, 1440~1520)가 경영하던 대형 출판사도 이곳에 세워졌다. 이처럼 뉘른베르크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너무나 매력적인 곳이었다. 뒤러는 1509년 안톤의 출판사 건물을 매입한 뒤 152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여기서 살았다. 이 건물은 현재 뒤러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뒤러의 서명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로 불리는 뒤러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고, 화가의 사회적 지위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전 시대의 화가들과 달리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 자신의 이름 첫 글자인 A와 D를 가지고 하나의 복합적인 문양을 만들어서 자의식 강한 화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명은 화가의 신분을 확인해주고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아울러 화가의 작품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뒤러는 홍보의 중요성과 자신의 작품을 유통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제대로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외국으로 판매하기 위해 특별히 전문 대리상을 고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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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빈 집필자 소개

베이징에 있는 중앙미술대학교(中央美術學院)에서 미술사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술사를 연구하면서 저자가 특히 천착한 분야는 화가의 자화상이다. 아울러 2000년대 들어 세계 최대 미술 시장으..펼쳐보기

출처

자화상전
자화상전 | 저자천빈 | cp명어바웃어북 도서 소개

거장들의 자화상으로 미술사를 산책하다!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뒤러에서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다빈치와 라파엘로를 거쳐 홀바인, 틴토레토, 루벤스, 렘브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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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들의 자화상 컬렉션 젠틸레 벨리니의 자화상 필리피노 리피의 자화상 로렌초 디 크레디의 자화상 조르조네의 자화상 한스 발둥의 자화상 한스 홀바인 1세의 자화상 주 반 클레베 1세의 자화상 자코포 다 폰토르모의 자화상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자화상 줄리오 로마노의 자화상 루드거 톰 링 2세의 자화상 안토니스 모르의 자화상 소포니스바 앙귀솔라의 자화상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자화상 조르조 바사리의 자화상 조반니 파올로 로마초의 자화상 페데리코 바로치의 자화상 카라바조의 자화상 안니발레 카라치의 자화상 폴 브릴의 자화상 엘 그레코의 자화상 크리스토파노 알로리의 자화상 조반니 다 산 조반니의 자화상 로렌츠 슈트라흐의 자화상 안토니 반 다이크의 자화상 주 반 크레스벡의 자화상 야콥 요르단스의 자화상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의 자화상 살바토르 로사의 자화상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 사무엘 반 호흐스트라텐의 자화상 로렌조 리피의 자화상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자화상 빌렘 드로스트의 자화상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의 자화상 카를로 돌치의 자화상 안토니오 치오치의 자화상 장 에티엔느 리오타르의 자화상 크리스티안 세이볼트의 자화상 조슈아 레이놀즈의 자화상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자화상 조지프 라이트의 자화상 프란츠 사버 메써슈미트의 자화상 벤저민 웨스트의 자화상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의 자화상 안젤리카 카우프만의 자화상 제임스 배리의 자화상 조지 롬니의 자화상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의 자화상 조지프 뒤크뢰의 자화상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자화상 존 컨스터블의 자화상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자화상 새뮤얼 팔머의 자화상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자화상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자화상 귀스타브 모로의 자화상 제임스 티소의 자화상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자화상 피에르 오그스트 르누아르의 자화상 필리포 발비의 자화상 윌리엄 홀먼 헌트의 자화상 존 러스킨의 자화상 아돌프 폰 멘첼의 자화상 클로드 모네의 자화상 베르테 모리소의 자화상 외젠 카리에르의 자화상 오딜롱 르동의 자화상 피에르 보나르의 자화상 앙리 루소의 자화상 오귀스트 로댕의 자화상 한스 토마의 자화상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자화상 카미유 피사로의 자화상 에곤 실레의 자화상 알렉세이 야블렌스키의 자화상 앙리 고디에 브르제스카의 자화상 로트렉의 자화상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자화상 피트 몬드리안의 자화상 앙리 마티스의 자화상 파울 클레의 자화상 막스 베크만의 자화상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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