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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학파
Stoicism스토아학파는 기원전 3세기에서 로마제정 말기에 이르는 고대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한 경향으로, 헬레니즘 철학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 4세기 남짓 그리스 · 로마의 수많은 지식인이 스토아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다. 스토아학파는 키프로스의 제논(Zenon)이 만들었는데, 아테네 광장의 공회당 기둥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기둥(스토아, Stoa)을 뜻하는 스토아학파로 불렸다. 크뤼시포스(Chrysippos, 기원전 280~207),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 세네카(Seneca, 기원전 4~기원후 65), 노예 출신 철학자 에픽테토스(Epiktetos, 55~135),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 등이 이 학파의 주요 인물이다. 크뤼시포스를 비롯한 초기 인물의 저술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지 않아 후대 철학자의 인용을 통해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도시국가 중심의 정치적 삶을 강조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개인 행복과 세계시민적 삶을 중시했다. 거대한 형이상학적 철학체계와 이상주의 요소는 약화되고 현실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개인의 지혜와 윤리적 삶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에게 철학이란 금욕과 절제를 통해 개인에게 행복을 얻는 힘을 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자연과 일치된 삶을 추구했다. 인생의 목표인 행복을 위해서는 이성의 길을 따라야 하는데, 특히 부동심의 경지를 강조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크게 자연학과 논리학, 윤리학의 세 부분으로, 그 근본은 자연학이지만, 목적은 윤리학의 실현이었다. 자연학, 논리학, 윤리학으로 철학을 구분한 것은 형이상학을 배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들은 형이상학적 물음, 추상적 · 계산적 사고를 비판하고 삶의 깨달음과 지혜를 중요하게 여겼다.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크뤼시포스를 묘사한 조각상 〈크뤼시포스〉는 이들이 갖고 있던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한 철학자가 의자 앉아 사색에 잠겨 있다. 그가 걸친 망토는 아무런 장식이나 꾸밈이 없이 소박하다. 그들이 설파한 절제, 내핍 생활과 어울리는 복장이다. 얼굴과 손을 보면 헬레니즘 예술의 특징인 섬세한 감정 묘사가 느껴진다. 그의 표정을 보면 기쁨 · 두려움 · 걱정과 같은 정념에서 벗어난 듯하다. 스토아철학이 강조한, 욕망이나 격정의 감정에서 벗어난 부동심의 경지를 보여준다.
자연관과 존재론
스토아학파의 모든 견해는 자연학에 기초를 둔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불 철학 즉 변화의 철학에 기초한다. 세계는 물질로 되어 있고, 변화를 일으키는 모든 운동과 작용도 물질의 성질을 갖는다. 존재의 근원적 근거를 탐구할 때 존재 자체를 넘어서는 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세계의 근거는 세계 자체 안에 있다. 그렇다고 우주와 자연에 어떠한 목적도 부여하지 않는 순수하고 철저한 유물론자는 아니었다. 우주와 자연을 지배하는 통일의 원리가 있다고 보았고, 이를 로고스(Logos)라고 생각했다.
크뤼시포스는 “보편적 자연과 그것의 합리성(로고스)에 맞지 않는다면, 아무리 작은 사물이라 해도 개별 사물이 생길 수 없다.”각주1) 라고 주장한다. 우주는 로고스 즉 세계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 법칙이 적용된다. 세계는 목적을 갖는 원리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사물과 인간이 배열되어 있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연관과 구별된다.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자연과 운동은 오직 다양한 원자의 집합으로 이뤄진 물질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가 보기에 세계는 물질의 우연한 결합과 분리가 아니라 합리적 이성의 힘과 법칙이 적용된다. 자연의 모든 사건은 전체 안에서 서로 체계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합리적 인과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신을 이해하는 데도 자연관의 차이가 반영된다.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신은 인간과 완전히 동떨어진 초월적 존재로서, 인간의 사건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하지만 스토아학파에게는 자연 자체가 신이다. 자연 속에 작동되는 합리적 이성 법칙이 곧 신이다. 신의 작용으로 세계가 필연의 인과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신의 섭리란 자연 법칙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에서 스토아학파의 신 개념은 범신론 성격을 지닌다.
이들의 자연학은 자연의 원리를 파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산다.”는 계율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자연의 질서가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인 이상 그 방향은 바람직하고 좋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행복은 자연의 원리에 일치하는 삶 속에서 실현 가능하다. 스토아학파의 자연주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핵심인 정치적 삶에서 이탈해서 개인의 삶으로 나아가는 논리적 가교 역할을 했다.
인과론과 결정론
세계를 규정짓는 질서가 이성 법칙인 이상, 모든 사건은 분명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이어져 있어야 했다. 그래서 스토아학파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앞의 사건은 따라 나오는 사건의 원인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사물이 서로 연관되며, 그래서 어떤 다른 것이 그것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으로 귀속되는 일은 세계 안에 생기지 않는다. ··· 생겨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 밖의 원인인 그것에 필연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따라 나온다.”각주2)
엄격한 인과법칙이 모든 현상을 지배한다. 어떤 사건은 반드시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결과와 원인의 관계가 뒤바뀔 수는 없다.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결정론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만약 인과론과 결정론을 토대로, 신의 의지를 결합시킬 경우 현실에서 나타나는 불행이나 재난을 어떻게 설명할지 난감하다. 자연 법칙이 신의 의지이고, 신의 섭리는 좋은 방향을 갖고 있다고 할 때, 자연 현상은 좋은 것으로만 가득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홍수 · 가뭄 · 지진과 같이 파괴적 자연 현상이 얼마든지 일어나니 스토아학파의 이론에 큰 결함이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크뤼시포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끔찍한 재난에서 생기는 나쁨에는 그것에 고유한 이유(로고스)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 나쁨도 보편적 이성에 맞게 일어나며, 말하자면 전체와 관련해서 쓸모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없다면 좋음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각주3)
재난과 같은 나쁨을 현상적 차원에서만 보지 말라는 주문이다. 현상적 나쁨은 전체 인과의 사슬 속에서 볼 때 반대로 더 좋은 것일 수 있다. 나쁨이 우연이 아니라 전체 인과관계에서 어떤 필요에 의해 필연적으로 만들어진다. 자연의 법칙 즉 신의 섭리는 단편적 · 일회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전체적 · 연쇄적으로 나타나므로 부분적 현상에 한정해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충고다.
인과론과 결정론에는 자유의지 문제라는 또 다른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모든 사건이 법칙의 질서에 따라 일어나고, 어떤 원인이 주어진 이상 반드시 그러한 결과로 귀결된다면 자유의지는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결정론의 맹점인 자유의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예측할 수도 없고 원인도 알 수 없는 원자의 일탈을 제시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는 다른 답을 제시한다.
크뤼시포스가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주요 원인과 보조 원인을 구분하는 대목을 통해 자유의지 문제를 보는 스토아학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둥근 통을 앞으로 미는 사람이 그 통에 구를 수 있는 능력을 주는 대신 운동의 시작을 주듯이.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은 ··· 마음에게 자신의 모상을 표시할 것이다. 그러나 동의는 우리 능력 안에 있을 것이며, ··· 그것에 외부 자극이 주어졌다면, 그의 힘과 본성을 사용해서 그 밖의 것을 향해 움직일 것이다.”각주4)
둥근 통이 구르는 것은 두 가지 원인에 의해서다. 하나는 외부의 원인 즉 통을 앞으로 미는 사람의 작용이다. 다음으로 내부 원인 즉 구를 수 있도록 둥근 모양을 갖추고 있는 통 자체의 본성이다. 하지만 두 가지 원인이 같은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외부 원인은 통에 구를 수 있는 능력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시작과 자극을 준다는 점에서 보조 원인이다. 통이 구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구를 수 있는 사물 자체의 본성 즉 내부의 원인이다. 외부 자극보다 내부의 주요 원인이 더 중요하다.
이를 통해 그가 자유의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볼 수 있다. 먼저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근거하여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 때 근본적으로는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본래 사물이나 사건 내부에 그러한 결과로 나아갈 수 있는 내적 본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유의지가 있기는 하되 부차적이다. 기본적으로는 인과관계라는 내적 법칙이 핵심 역할을 함으로써 결정론의 기본 토대를 고수한다.
인식론
인과론과 결정론의 기본 원칙을 지니는 한, 인식의 일차 과제는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 즉 인과관계의 명확한 파악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통일 원리를 파악함으로써 자연 법칙에 맞는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은 필연 법칙을 파악할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램프 위의 철학자〉는 이성적으로 인식하면 사물과 사물의 운동을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다는 스토아철학을 상징한다. 램프 위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은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철학자를 묘사했다. 램프가 어둠 속에서 사물을 밝게 비추는 역할을 하듯이, 철학도 복잡해 보이는 현상의 숲에서 인과관계 사슬을 명쾌하게 밝혀낼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준다.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은 이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이성이 철저하게 주체적 · 내적 영역인 반면 스토아학파에게 이성은 물질적 자연 원리와 상당히 밀접하다. 이성을 중시하지만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나는 플라톤과 비교하면 스토아 철학자의 인식론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 플라톤과는 인식의 출발 자체가 다르다. 스토아 철학자가 보기에 인식의 시작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내적 이성능력이 아니다. 인식의 시작은 사물 즉 우리 정신 안에 들어오는 대상의 표상으로부터 온다. 플라톤은 지각 대상을 가상의 것으로 보았고, 진리는 별도로 존재하는 이데아에 속했다. 정신은 이데아를 직접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자에게 이성이란 자연 원리인 로고스의 분신이었다. 지각 대상 자체가 이성 법칙의 지배를 받고, 그 원리를 파악함으로써 진리에 이를 수 있다. 진리는 지각되는 대상과 지각하는 주체 사이의 역동적 연관성을 보여주는 표상 자체에서 주어진다. 즉 진리의 기준이 이성이 아니라 우리 정신 안에 들어오는 표상이다.
다음으로 감각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서 플라톤과 큰 차이가 있다. 플라톤은 육체가 정신의 감옥이기에 진정한 인식을 위해서 감각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토아학파가 보기에 인식은 어디까지나 감각적 표상에서 유래하고,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감각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위해 의존해야 할 중요한 기반이다. 하지만 감각은 출발점이지 감각 자체가 진리를 인식케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어떻게 감각으로부터 이성에 이를 수 있을까? “스토아 철학자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외적 언어 때문이 아니라, 내면적 언어 때문에 비이성적 동물과 다르다. 까마귀와 앵무새, 어치도 소리를 분명히 뚜렷하게 내기 때문이다. 사람은 단순한 인상 때문에 그 밖의 생물과 다른 것이 아니라 추론과 결합이 만들어 낸 인상 때문에 다르다. 사람에게 ‘연결’ 관념이 있다는 뜻인데, 이러한 관념 덕분에 사람은 신호 개념을 파악한다. 신호 자체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하다면, 저러하다.’ 그러므로 신호의 존재는 사람의 본성과 소질에서 나온다.”각주5)
먼저 육체적 감각기관이 인식대상을 받아들인다. 감각을 통해 대상의 인상을 얻는다. 여기까지는 동물의 감각적 인상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인간은 외적 언어만을 갖는 동물과 다르게 내적 언어를 가지고 있다. 내적 ‘언어’라는 표현이 재미있는데, 추론과 결합이 만들어낸 가공된 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추론과 결합이라는 사고 작용을 언어를 통한 내적 대화로 정식화한 점이 날카롭다. 즉 개별 사물이나 현상을 서로 연결하여 추상화하는 과정으로 들어간다. 개별적인 것들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의 법칙 속에 존재하는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이를 ‘신호’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만일 이러하다면, 저러하다.”는 연결 관계는 개별적인 것 사이에 논리적 관계를 규정짓는 것이고, 이를 통해 표상 내의 원리를 파악한다. 이성은 추론과 사유능력을 통해 자연 원리에 다가선다.
마지막으로 “신호의 존재는 사람의 본성과 소질에서 나온다.”는 언급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호의 존재는 논리적 관계를 파악하는 이성 능력에 해당하는데, 이것이 사람의 본성과 소질에서 나온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능력이라는 의미다. 한마디로 인간은 누구나 이성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극소수만이 이성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플라톤과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누구나 이성을 통해 자연 원리를 파악하고 이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 윤리학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대목이다.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갖는 합리성을 발전시킴으로써 충동을 넘어서 자연에 일치된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다. 플라톤처럼 덕은 소수의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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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레니즘 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
- 헬레니즘 철학과 헬레니즘 미술
- 헬레니즘 철학의 윤리관
- 헬레니즘 철학의 정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