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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의 중인
신의(神醫)라 불린

백광현

白光炫
요약 테이블
출생 1625년
사망 1697년

약을 쓰는 의원과 별도로 침의를 양성하자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세종대 전의감(典醫監) 책임자인 황자후였다.

병을 속히 고치는 데는 침이나 뜸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의원으로서 침을 놓고 뜸을 뜨는 구멍을 밝게 알면 한 푼의 약도 쓰지 않고 모든 병을 고칠 것입니다. 지금부터 중국의 의술을 익히는 법에 의해 각각 전문(專門)을 세우고 주종소(鑄鐘所)로 하여금 구리로 사람을 만들게 하여, 점혈법(點穴法)에 의해 재주를 시험하면 의원을 취재하는 법이 또한 확실해질 것입니다.

효종 2년(1651년)에 이르러서야 내의원의 부속청으로 침의청(鍼醫廳)이 설치되었는데 허임의 『침구경험방』 첫 판본이 나온 지 7년 뒤의 일이다. 이로써 당대 침구술의 최고 실력자들이 왕궁에 모이게 되었다. 『내침의선생안』에 202명의 내침의, 즉 내의원 침의 명단이 실렸는데, 이 가운데 외과수술로 가장 이름을 날린 침의는 백광현이다.

동인(銅人). 인간의 전신에 흐르는 경혈을 음각선으로 전후면과 시지(四肢) · 두부(頭部)등에 새기고, 각 선상에 음점으로 경혈을 뚜렷이 나타낸 작품이다. 침을 놓는 자리를 정확히 표현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동인이다. 궁중의 내의원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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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병을 고치는 수의사 출신 의원

침의로 이름난 백광현(白光炫, 1625~97)은 처음에는 말의 병을 고치는 일을 했다. 말의 병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그 처방을 모은 『마의방(馬醫方)』이 광해군 8년(1616년) 4월 의주에서 간행되었는데, 그는 이런 책을 보지 않고 오로지 침만 써서 치료했다. 『마의방』에는 말의 경혈도가 있어서 경혈을 찾아 침을 찔러 넣으면 편했는데, 그는 자기 방식을 고집해 경험을 쌓았다.

『마의방』. 광해군 8년 4월에 의주에서 말과 소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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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침을 오래 놓아 손에 익자, 사람의 종기에도 시험을 해보았다. 조선시대에는 위생 관념이 열악해 종기가 많이 났는데, 종기는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하는 큰 병이었다. 그는 침으로 사람의 종기까지도 고쳐 효험을 많이 보게 되자, 드디어 사람 고치는 것만 일로 삼았다. 그가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었던 까닭은 민간에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의 종기를 보고, 상황에 따라 달리 시술하였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그의 진단은 더욱 정확해졌다.

수술요법으로 종기를 고치다

중인들의 전기를 많이 지었던 정내교는 백광현의 전기도 지었는데, 그가 종기의 뿌리를 뽑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개 종기에 독이 가득 차면 근(根)이 생기는데, 옛 처방으로는 이것을 고칠 방법이 없었다. 광현은 이런 종기를 보면 반드시 커다란 침을 써서 근을 발라내어 죽을 사람도 살렸다. 처음에는 침을 너무 세게 써서, 어떤 때에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에게 효험을 보고 살아난 사람들이 차츰 많아졌으므로, 병자들이 날마다 그의 대문에 모여들었다.

말침과 말침통. 말침은 소나 말 등 가축의 경혈을 찔러 질병을 고치는 도구이다. 사람에게 시술하는 침에 비해 납작하고 넓은 봉 모양이다. 철제여서 부식이 심했다. 말침통은 말침을 보관하거나 휴대하는 통이다. 속이 빈 원통형의 목제 두 개를 잇대어 실로 아래 위를 여러 번 교차해 묶어 고정한 형태인데, 부식 방지를 위해 반달형 공기구멍을 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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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내교는 “세상에서 종기를 째고 고치는 법은 백태의에게서 시작하는데, 그 뒤에 배운 자들은 모두 그에게 미칠 수 없었다.”고 했다.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종기를 외과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처음 개발한 것이다.

백광현은 사람이 아니라 말부터 치료했기 때문에 여러 방법으로 째 보면서 일찍이 임상실험에 성공했고, 사람에게 시술할 무렵에는 이미 침술이 손에 익었을 것이다. 침을 놓는 솜씨는 의서를 많이 보았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의술 베풀기를 좋아하여 병자들이 모여들수록 더욱 열심히 하였다. 몸을 사리지 않았으며, 돈을 밝히지도 않았다. 그가 종기를 침으로 째서 뿌리를 뽑는 비법을 써 크게 유명해지면서 사람들은 그를 ‘신의(神醫)’ 라고 칭송했다.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의 종기를 똑같이 고쳤던 휴머니스트

백광현은 의과에 합격하지 않았지만, 언제인가부터 내의원에 배속되었다. 『현종실록』 11년(1670년) 8월 16일 기록에 “왕의 병환이 회복되자 백광현에게 가자(加資)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품계를 한 급 올려주었다는 뜻인데, 몇 품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숙종은 10년(1684년) 5월 2일 정사에서 그를 특별히 강령현감(종6품)에 임명했다가 포천현감으로 바꾸었는데, “의관의 수령 임명이 여러 번 중비(中批)에서 나와 세상 사람의 마음이 진실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백광현이 미천한 출신이고 또 글자를 알지 못 하는데도 별안간 이 벼슬에 임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대론(臺論)이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대파침과 침쌈지. 종기 치료 등 주로 외과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침과 침을 꽂아 넣어 다니던 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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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의들이 왕의 병을 고치면 승진하고, 의원으로 더 이상 승진할 자리가 없으면 지방 수령으로 발령 내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의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당연했다. 백광현이 현종의 목에 난 종기를 고치고, 효종비 인선왕후의 머리에 난 종기도 큰 침으로 수술하여 완치시켰으며, 숙종의 목에 난 종기와 배꼽에 난 종기까지 침으로 치료했으니 종6품 현감으로 발령 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왕실에서는 효종이 종기를 제대로 고치지 못해 세상을 떠났으므로, 종기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중비(中批)는 임금의 뜻이다. 백광현을 내의원의 관직에 올려주는 것은 상관없지만, 지방 수령은 문과나 무과에 급제한 양반이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으니 파격적인 대우였다. 사간원에서는 그를 반대할 명분이 없자. “글자를 알지 못한다.”고 반대했다. 그는 전형적인 의과 출신이 아닌 데다 전통적인 의서도 보지 않고 경험에 따라 치료한 침의였으므로, 한문에 약한 것을 트집 잡은 것이다.

백광현은 1691년에 지중추부사, 1692년에 숭록대부로 승진했는데, 실제 직책은 없는 벼슬이나 품계였다. 정내교는 그의 전기를 쓰면서 높은 벼슬에 오른 그의 모습을 이렇게 썼다.

숙종 초엽에 어의로 뽑혔는데, 공을 세울 때마다 품계가 더해지고는 해서 종1품에 이르렀다. 벼슬도 현감을 지내, 민간에서 영예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병자들을 대할 때에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부름이 있으면 곧 달려갔고, 가서는 반드시 자기의 정성과 능력을 다하였다. 병이 다 나은 것을 본 뒤에야 치료를 그만두었다. 늙고 고귀해졌다고 해서 게을러지지 않았다.

백광현이 없어서 죽는구나

정내교는 전기를 쓰면서, 자신이 실제로 본 백광현의 신통한 진단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 나이 15세 때에 외삼촌 강군이 입술에 종기가 났다. 백태의를 불러왔더니, 그가 살펴보고 “어쩔 수가 없소. 이틀 전에 보지 못한 게 한스럽소. 빨리 장례 치를 준비를 하시오. 밤이 되면 반드시 죽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밤이 되자 과연 죽었다. 그때 백태의는 몹시 늙었지만, 신통한 진단은 여전했다. 죽을병 인지 살릴 병인지 알아내는데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그가 한창 때에는 신기한 효험이 있어서 죽은 자도 일으켰다는 게 헛말은 아니었다.

정내교가 15세 때라면 백광현이 71세 되던 1695년이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데, 이해에 재상을 치료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12월 9일에 각기병을 앓는 영돈녕부사 윤지완에게 왕이 백광현을 보냈는데, 사관은 “백광현이 종기를 잘 치료하여 기이한 효험이 많이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라 일컬었다.”고 설명했다.

효종 10년(1659년) 5월 1일에 약방에서 문안하자, 효종이 “종기의 증후가 이 같이 날로 심해지는데도 의원들은 그저 심상한 처방만 일삼고 있는데, 경들은 심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답하였다. 의관 유후성이 산침(散鍼)을 놓자고 아뢰어 그대로 따랐지만 효험이 없었다. 3일에는 병이 위독해 편전에 나가지 못했으며, 왕이 입시한 의관들에게 종기의 증후를 설명하라고 명했지만 아무도 분명히 말하지 못했다. 4일에는 의관 신가귀가 침을 놓자고 했으며, 유후선은 놓으면 안 된다고 했다. 신가귀가 침을 놓았지만, 혈락(血絡)을 범하는 바람에 피가 그치지 않고 나와 효종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한 달 뒤에 신가귀는 교수형을 당했다.

효종 10년이라면 백광현이 아직 내의원에 들어오지 못하고, 민간에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던 시절이다. 몇 년 뒤였다면 효종의 종기를 침으로 고치지 않았을까?

정내교는 백광현의 전기를 끝내면서 “종기가 생겨서 그 독을 고치기 어렵게 된 사람들은 요즘도 반드시 ‘세상에 백광현이 없으니, 아아! 이젠 죽을 수밖에 없구나.’ 하고 탄식했다.”고 밝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몇 십년 뒤에도 그의 신통한 침술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백광현은 4형제였는데, 2남 광린(光璘)과 4남 광현이 의원으로 활동했다. 4형제의 후손 가운데 역관 · 의원 · 계사가 골고루 배출되었는데, 광현의 후손에서 대를 이어 침의가 많이 나왔다.

정내교는 “그가 죽은 뒤에 아들 흥령이 대를 이어 의원이 되었는데, 꽤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고 했다. 그의 침술이 아들을 통해 가업으로 전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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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진 집필자 소개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연세문학상 수상. 조선시대 사대부의 문학 인생을 다룬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과 당시 문인들의 어린 시절 글 공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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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중인들
조선의 중인들 | 저자허경진 | cp명RHK, 알에이치코리아 도서 소개

문·사·철을 뛰어넘는 전방위 재능으로 조선의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주도한 중인(中人) 다큐멘터리. 지금으로 말하면 의료(의원), 법률(율관), 금융(계사), 외교(역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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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조선시대 중인의 수와 사회적 지위 한양에 중인은 얼마나 살았을까 양반에 60년 뒤진 중인의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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