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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할 명작만
화 국제적 반열에 올라선 일본 극화의 정점
아키라
『AKIRA』(이하 <아키라>)는 오토모 가츠히로가 일본 출판사 고단샤에서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연재한 만화이다. 서사와 형식, 그리고 그 합치가 빚어내는 이미지로서의 경험까지 만화라는 매체가 갖는 거의 모든 방면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아키라>는 당대 만화계에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 만화의 신으로 일컬어지는 데즈카 오사무가 오토모 가츠히로와의 첫 만남에서 인사 대신 "당신 그림 정도라면 나도 똑같이 그릴 수 있네. 못 그리는 건 모로호시 다이지로 정도일세."라는 말을 건넨 일화는 역으로 그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아키라>는 또한 연재 중이던 88년에 극장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으며, 원작자 작가 본인이 감독을 맡았다. 애니메이션은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수상경력도 화려한데, 대표적으로 1984년 제8회 고단샤 만화상 일반 부문, 2002년 아이즈너상 최우수 국제 아카이브 부문 및 최우수 국제 작품 부문, 2015년 42회 앙굴렘 대상을 받았다. 수상이 작품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올해 프랑스의 인정을 통해 수상 경력만으로도 명실상부 국제적 고전의 반열에 들게 된 셈이다. 사이버펑크 유행의 한 축을 담당했던 80년대의 명작은 이렇게 특정 시대의 흔적으로 남았다.
시대가 반영된 사이버펑크 활극
<아키라>는 일본의 수도인 도쿄가 198X년 신형 폭탄에 의해 파괴되고, 이후 제3차 세계대전을 치르게 된 세계가 배경이다. 이후 2018년 어느 날 밤, 동경을 본떠 재건한 도시 네오 도쿄(신 동경)시의 외곽에서 파괴된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폭주족 소년들은 백발의 소년을 목격한 뒤 접촉사고를 낸다. 중상을 입은 폭주족 소년 데쓰오는 경찰들에 의해 초능력 연구기관에 감금되고, 폭주족의 리더인 가네다는 목격했던 백발 소년이 반정부 테러리스트에 의해 탈출하게 된 정부기관에 의한 실험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네다는 반정부집단과 군부 사이에 얽혀들면서 아키라의 비밀에 다가서게 되고, 연구기관에서 초능력을 얻게 된 데쓰오 역시 힘을 갈망하며 아키라를 찾아 나선다. 이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와 외국세력, 종교집단과 반정부집단 사이를 헤집으며 네오도쿄 곳곳을 누비는 가네다의 활극은, 아키라를 부활시킨 데쓰오와의 정면충돌을 향해 나아간다.
‘견고한 질서의 세계’에 속한 이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힘의 위험성을 뒤늦게 깨닫고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사이, 사회의 법칙에 따르지 않는 ‘불량소년’들이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하며 새 시대의 막을 열어젖히는 호쾌한 서사는 시대성의 반영이자 보편적 역사에 대한 은유로도 다가온다.
어디에도 없는 도시를 ‘재현’하다
수많은 찬사를 들은 <아키라>지만, 서사는 <아키라>를 명작으로 만드는 데 공헌한 바가 그다지 크지 않다. 작중 내내 등장하는 도시의 조직적인 면모와 컷마다 조형성을 자랑하는 연출도 뛰어나지만,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절대적인 통일성을 갖고 배열되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아키라>만의 차별성이다. 주 무대로 등장하는 도시 네오 도쿄시는 -영화를 전공하려다 ‘혼자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만화의 길을 택했다고 하는 작가의 일화를 반영하듯- 작품을 위해 만들어진 정교한 3D 모델링 혹은 세트장처럼 보인다.
모든 장소는 이야기의 상징성에 맞게 배치되어있고(처음 등장하는 폭발지가 바로 아키라가 봉인된 장소라는 사실 등), 작품 속 실제 사건의 경위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작법을 ‘보여주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데 <아키라>만의 특별함이 있다. 실제 도시의 기능과 구성을 참조해가며 건설되었을 상상 속의 네오 도쿄시는, 인간의 눈과 동일한 1:1 스케일의 시점을 통해 보여 질 때도 있고, 드론을 통해서나 볼 수 있는 높은 상공에서 촬영한 화면으로 보여 질 때도 있다. 이는 정밀한 원근법을 통해 마치 실제 도시를 그대로 베껴낸 듯한 모습으로 ‘재현’되고, 독자는 마치 스크린 너머로 네오 도쿄를 들여다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오토모 가츠히로는 <아키라>의 세계를 구축한 뒤 그 영상을 칸 너머로 송출하고 있는 셈이다. 귀납적으로, 개별적인 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로 작품 안의 세계를 구성하는 (독자의 입장에선 추정하는) 일반적 작법과는 반대로 아키라는 연역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오지 않은 미래를 진짜로 만드는 법
<아키라>가 지면에 복원해낸 이미지의 해상도에 합당한 원본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비단 소실점에 어긋나지 않도록 늘어선 건축물 때문만이 아니다. 단순히 도시의 시각적 면모를 그림 위에 재현해 내는 것은 사진을 참조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아키라>의 성취는 ‘도시’라는 단어에 붙어있는 맥락들, 도시계획 및 건축의 구조와 그 흔적의 원인인 역사, 역사의 전후를 둘러싼 사회 구성, 사회의 고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대화와 행동과 취향 등을 서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혹은 은연중에 드러내는 데 있다. 나아가 이러한 도시의 ‘다층적 해상도’를 가진 이미지는, 각 페이지와 컷들 속에 다시 화면 위에서 조형적으로 재조립되어 칸 밖으로 보여진다. 아찔한 밀도로 화면을 가득 메운 그림들에 부여된 통일성이, 마치 소년 아키라가 만들어낸 폭발처럼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구심점에서 시작되어 펼쳐진다. 이것이 <아키라>가 가진 압도적인 느낌의 실체이다.
묘사하는 대상에 관한 ‘다층적 해상도’가 미치는 영향은 한 이야기에 ‘실화’라는 태그가 붙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다. 실제 일어난 과거를 직접 다루는 작품이 단순히 묘사를 충실히 하는 것만으로 강제로 고해상도의 기억과 이미지가 따라붙곤 하듯이. <아키라>는 이러한 디테일들을 80년대의 평행세계에,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가져다 놓았다. 따라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진부한 표현은 아키라의 성취에 가장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아키라의 번호가 ‘28’번이라는 점, 주인공의 이름이 ‘가네다’로 같다는 점 등 <아키라>에는 1950~ 60년대 연재된 <철인 28호>의 오마주로 보이는 지점이 있는데, 철인 28호라는 이름의 기원이 B-29 폭격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과 아키라의 힘이 발현되는 방식을 보면 이는 원자폭탄에 대한 2중 오마주다.
문명의 질서에 따르지 않은 채 폭력적이고 일시적이며 쾌락만을 좇는 폭주족 소년들과 가네다의 질주가 가져다주는 쾌감은, 압도적일 만큼 균일한 시각적 통일감에 의해, 견고한 세계로 인해 기능한다. 후반부에 전개가 느려지는 인상을 받거나 결말을 다소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아키라>를 읽는 경험의 총량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부분에 불과하다. 우여곡절 끝에 정식 출간된 만큼, 널리 읽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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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2014~2015년 1년간 미디어 다음에서 웹툰 <데미지 오버 타임>을 연재했고, 상금을 타려고 기고한 <크리틱M> 만화평론 신인상 공모에 입상해 평론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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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키라 – 죽기전에 봐야할 명작만화, 김봉석 외, 에이코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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