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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상열전 유교적 이상 사회를 꿈꾸다

이이

율곡(栗谷), 李珥
이이

조선 시대 학자요, 정치가로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바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이다. 그는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며, 이이의 학통을 이은 서인 노론이 계속 집권하면서 사림의 종장으로 추앙받았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어려서는 주로 외가가 있는 강릉에서 자라면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유명했던 이이는 1548년(명종 3) 열세 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1564년(명종 1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해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렀다.

1564년(명종 19) 호조 좌랑에 처음 임명된 뒤 예조 좌랑과 정언, 이조 좌랑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571년(명종 26) 청주 목사로 임명되었을 때는 향약을 실시해 유교적인 예속을 보급하는 데 노력했다. 이후 동부승지, 병조 참지, 대사간, 이조·형조·병조 판서 등에 임명되었다가 사직하고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적 주리론과 대비되는 이기이원론적 주기론을 주장했다.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이 정치 전면에 나서면서 이이는 유학의 도덕적인 이상이 실현되는 왕도정치를 꿈꾸었다. 그러나 이이의 희망과 달리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면서 정쟁을 일삼았고, 이이는 화합과 조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9번의 시험, 9번의 장원

이이의 어린 시절 아명은 현룡(見龍)이다.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꿈에서 용을 보고 그를 낳았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아버지 이원수의 집은 번성한 집안이 아니었지만, 이이의 외가는 강릉에서 세도 있던 집안이었다. 이를 반영한 듯 율곡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어머니와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였다.

이이는 강릉의 외할머니 집에서 나고 자랐으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이는 벼슬을 할 때도 문득 외할머니가 생각나면 강릉으로 달려갔다. “조정으로 본다면 신은 있으나마나한 보잘 것 없는 존재이나 외할머니에게 신은 마치 천금과 같은 보물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신사임당도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글과 그림에 뛰어난데다 성품까지 남달랐던 신사임당은 특히 자녀 교육에 관심이 높았다. 타고난 자질과 어머니의 교육적 영향으로 이이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고, 성품도 특별했다.

공은 말을 배우면서 곧 글자를 알았는데, 겨우 세 살 때에 외조모가 석류(石榴)를 가지고 묻기를 “이것이 무엇 같으냐?” 하니, 대답하기를 “붉은 가죽 주머니 속에 부서진 붉은 구슬을 넣었습니다.” 하자,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다섯 살 때에 어머니 신씨의 병이 위독하자 공이 가만히 외조(外祖)의 사당에서 기도했으니 여러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일찍이 사람이 물을 건너다가 넘어져서 위태로운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손뼉을 쳤으나, 유독 공은 기둥을 안고 서서 근심스러운 몸짓을 하고 있었으니, 진심에서 나온 효성과 남을 사랑하는 마음은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연려실기술》 권18, 선조 조 고사본말

이이는 1548년(명종 3)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진사 초시를 보았는데, 여기에서 장원을 했다. 시험관도 깜짝 놀랄 만한 결과였다. 그러나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이이는 크게 상심했다. 그리고 인간의 생과 사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다.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하면서 우연히 불교 서적을 접하게 된 이이는 불교를 공부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다. 종교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학문적인 탐구였다.

이이는 불교의 선학(禪學)을 공부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학문의 시야도 넓혔다. 1년여를 공부한 끝에 이이는 유학 속에서도 불교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산을 내려와 성리학 공부에 매진했다.

이이는 스물아홉 살 되던 해 명경과(明經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각종 과거에서 9번이나 장원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다. 1564년(명종 19) 나라의 살림살이를 맡아 보는 호조 좌랑으로 관직에 오른 그는 사헌부의 지평, 홍문관 부교리 등 삼사의 언관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이황과 이이

조선 시대 성리학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이는 단연 이황과 이이이다. 1558년(명종 13) 스물세 살의 이이는 안동으로 내려가 이황을 만났다. 두 사람은 평생 동안 이때 단 한 번 만났는데, 이황은 서른다섯 살이나 어린 이이를 맞아 기꺼이 성리학에 대해 깊은 토론을 했고, 성리학으로 세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서로의 뜻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면서 서로를 잊지 못했고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황은 이때 이이를 만나고 월천(月川) 조목(趙穆)에게 준 편지에서 “이이가 명석해 많이 보고 기억하니 후생(後生)을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했다. 이이는 이황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바치기도 했다.

시냇물은 수사(洙泗, 공자가 살던 곳의 물 이름)의 갈래를 나누었고(溪分洙泗派)
봉우리는 빼어난 무이산(武夷山, 주자가 거처하던 산의 이름)이다(峰秀武夷山).
살아가는 계책은 천 권의 경전이요(活計經千卷)
생애는 두어 칸의 초옥(草屋)이었다(生涯屋數間).
가슴속은 개인 달 같이 열려 있고(襟懷開霽月)
담소하는 가운데 미친 물결을 막는도다(談笑止狂瀾).
소자(小子)는 도(道) 듣기를 원함이요(小子求聞道)
반일(半日)의 한가한 틈을 취함이 아닙니다(非偸半日間).
《연려실기술》 권18, 선조 조 고사본말

조목이 이 글을 보고 칭찬을 마지않으니 이황이 말하기를 “시가 그 사람만 못하다.” 했다.

이황이 기대승과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을 주고받을 때 이이는 기대승의 이론을 지지했다. 그러나 백면서생이 노사숙유(老士宿儒)에게 질문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해 그만두었다. 그러다 이황이 죽자 이를 크게 후회했다.

이이는 이황이 이기심성론에서 기보다 이를 중요시한 데 비해 이보다 기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황으로 대표되는 주리론이 영남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면, 이이의 이기론은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이는 자신의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주자나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는 찬동하지 않았다. 즉 이와 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이기불상리설(理氣不相離設)에는 찬동했으나, 이가 주(主)이고 기는 종(從)이라는 이선기후설에는 반대했다. 기가 생기기 전에 이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기대승이 사단이발(四端理發)은 인정하고 칠정만 이기공발(理氣共發)이라고 한 데에도 반대했다. 이이는 사단조차도 칠정에 포함된다고 했으며, 기대승의 설을 일보 전진시킨 철저한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을 주장했다. 이는 원리로서 통하고 기만 국한되어 변화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이이의 이기론은 형이상학적인 이보다 현실 문제와 관련 있는 형이하학적인 기에 치중되어 있다. 이황이 개혁의 꿈을 접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힘을 쓴 반면, 이이는 관직에 계속 머물며 실천적 유학에 관심을 쏟고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노력한 것도 이와 같은 철학적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정은 사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손자였던 하성군(河城君)이 왕위에 올라 선조가 되었는데, 하성군의 스승은 한윤명(韓胤明)이라는 성리학자였다. 이에 선조는 기묘사화로 숙청된 사림들의 죄를 풀어 주어 정계에 복귀시키고, 조광조를 신원해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이이는 사림들이 정치 일선에 나서자, 유학을 이념으로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포부를 가졌다. 그가 지은 《동호문답(東湖問答)》을 보면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한 철인정치(哲人政治) 사상과 당대의 현실 문제를 왕과 신하가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이는 여기에서 백성들이 고통받는 몇 가지 문제를 거론하면서 임금이 이를 해결해 주기를 기대했다. 특히 백성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세금이라 보고 이에 대해 개혁을 건의하고 있다.

첫째, 백성이 도망가면 이웃이 대신 세금을 내야 하고 친척이나 이웃이 내지 못하면 동네 사람들이 세금을 내야 한다. 그 피해가 동네로 퍼지다 보니 너도나도 도망을 가 버려 동네에 남아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낼 수 있는 세금만 거두도록 하고 세금을 낼 수 없는 백성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백성들이 내는 진상품(進上品)을 줄여야 한다. 지방 관리들이 백성들로부터 필요 이상의 진상품을 거두어들여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있다. 궁중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마구 거두므로 백성들의 고통이 크다. 필요한 특산품만 계절에 맞게 거두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특산품의 경우 관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요구하므로 백성들은 특산물을 대신 내주는 방납을 이용한다. 그러나 방납을 담당한 상인들이 지방 관리들과 짜고 많은 비용을 부담시켜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실정이다.
넷째, 부역과 군역의 폐단이다. 양반들은 군역과 부역을 돈을 써서 면제받고 백성들은 군인으로 근무도 하고 군포(軍布)도 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이가 꿈꾼 세상은 더불어 잘 사는 대동(大同)사회였다는 것이다. 또한 유교적 이상사회였다. 정치나 법보다는 명분으로 백성을 설득하고 위정자가 먼저 의리를 지키는 도덕국가였다. 즉 통치자가 모범을 보이면 백성들이 따라서 실천하는 왕도정치가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런 의미에서 《동호문답》은 왕도정치의 이론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자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대담이었다. 대동법 역시 그의 이런 생각이 잘 반영된 제도였다.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폐단을 임금이라고 해서 하루아침에 개혁할 수는 없었다. 이이 역시 개혁의 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이가 소박하나마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는 데 손수 나설 수 있었던 일은 지방관이 되어 향약을 실시한 것이었다. 1571년(선조 4) 청주 목사에 임명된 이이는 향약을 실시했다. 바로 조선 시대의 대표적 향약인 서원향약(西原鄕約)이 그것이다.

향약을 실시하면 자연스럽게 유교적인 예속이 보급되고, 백성들이 토지로부터 이탈하지 않아 공동체로 결속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이이의 생각이었다.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는 향약의 규약을 바탕으로 실천하게 했는데,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이나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우리나라의 향촌 실정에 맞게 개정해 본격적으로 시행한 향약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동인과 서인의 조정에 힘을 쓴 이이

선조가 즉위하면서 명종 대에 전횡하던 윤원형 같은 척신이 사라지고 사림들이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유학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추구하며,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던 사림들이었지만 막상 권력 앞에 서자 자신의 이익이나 혹은 이념에 따라 편을 갈라 분열하기 시작했다. 사림정치의 부작용인 당쟁이 생긴 것이다.

사림의 분열을 처음으로 예고하며 걱정한 사람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었다. 1572년(선조 5)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임금에게 올린 유차(遺箚)가 문제가 되었다. 유차에서 이준경은 붕당의 조짐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유차로 조정은 다시 한번 들끓었다. 행여 사림에게 또다시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한 이이는 “조정이 청명한데 어찌 붕당이 있으리오?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선한 법인데, 이준경은 죽을 때에도 그 말이 악하다.”라며 이준경의 삭탈관직을 주장했다. 그러나 3년 후 이준경의 예고대로 사림은 마침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동서 분당의 기폭제는 이조 정랑 자리를 둘러싼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알력에서 비롯됐다. 심의겸은 당시 재상층을 위시해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김효원은 새로이 부상하는 신진 세력의 구심점이었다. 김효원의 집은 한양 동쪽의 건천방(乾川坊)에 있고, 심의겸의 집은 서쪽인 정릉동(貞陵同)에 있어 김효원을 지지하는 이들을 동인, 심의겸에 동조하는 이들을 서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동인은 허엽(許曄)을 위시해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 중에서 나이가 젊고 학행과 절개가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 서인은 허엽과 대립하던 박순(朴淳)을 영수로 하며 주로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인과 서인이 갈리자 이이는 극단적인 대립을 막기 위해 조정책을 제시했다. 이준경의 유언을 저주와 음해의 표본으로 간주한 것에 대해 이이는 책임을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이는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심·김 두 사람은 모두 학문하는 선비들이니, 흑·백과 사(邪)·정(正)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진정으로 틈이 벌어져서 기필코 서로 해치려는 것도 아니오. 다만 말세의 풍속이 시끄럽고 말이 많아 이로 인해 조금 사이가 벌어지고 근거 없는 말들이 오가느라 어지러워서 조정이 조용하지 못하니, 두 사람을 다 외직(外職)으로 내보내 쓸데없는 논의를 진정시켜야 하겠는데, 대신이 경연에서 그 사유를 아뢰어야 하겠소.
《연려실기술》 권13, 선조 조 고사본말

그래서 김효원은 삼척 부사로, 심의겸은 전주 부윤으로 발령받았다. 이이가 김효원을 외직으로 내보낸 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 그 세력이 성해질까 우려해서였다. 그런데 일단 김효원이 외직으로 쫓겨 가자 서인들은 그의 잘못을 추궁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이가 이를 말리고 양편을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양편에서는 도리어 이이가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다고 불평했다.

이이는 결국 더 이상 조정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발(李潑), 송대립(宋大立), 어운해(魚運海) 등과 송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정론을 말하려 하니, 제공들은 들어 보라. 권세 잡은 간신들이 조정을 흐리고 어지럽게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것을 꺾고 숙청해 선비들의 공론을 펴게 한 것은 의겸 등의 공이 아닌가? 효원이 나랏일을 하려면 마땅히 거실(巨室)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효원이 전배들을 배척하고 억제해 전배들로 하여금 분한 마음을 가지게 해, 사림이 날로 서로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론이 효원을 제재해 외직으로 나가게 했고, 이만하면 적당한데도 오히려 그를 심히 미워하고 공격했으니, 이것은 전배의 죄이다.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심해 간격을 두지 말고 마음을 터놓고 정리해 나간다면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조정의 근심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이, 《석담일기》

철저한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이었다. 이이는 힘닿는 데까지 동인과 서인의 다툼을 조정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물러난 뒤에는 의논이 더욱 분열되어 더 이상 조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훗날에는 사림의 분열을 막으려던 뜻과 다르게 이이는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서인의 종장으로 추대되니 이이의 뜻과는 진정 다른 결말에 이르게 되었다.

나라를 위해 끝까지 다한 진심

이이는 지방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싶었지만, 선조는 그를 끊임없이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이만큼 사심 없이 충정을 다하는 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이는 그런 선조를 도와 홍문관 책임자로, 호조 판서로, 다시 이조 판서로 부지런히 자리를 옮겨가며 나랏일을 처리했다.

선조의 간곡한 권유로 병조 판서직을 맡았을 때는 쳐들어온 여진족을 막아내기도 했다. 이때 이이는 무기와 병사들의 상태를 보고 위기감을 느껴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소신을 갖게 되었다. 이른바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이는 자신의 생각을 임금과 대신들에게 전했다.

“미리 10만 군병을 양성해 급할 때에 대비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10년을 넘지 못해 장차 흙이 무너지듯 어쩔 수 없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유성룡은 “무사할 때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禍)를 기르는 것이 된다.”고 했고, 다른 대신들 또한 모두 이이의 말을 지나치다고 했다. 그러자 선조도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에는 이이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특히 전란의 수습을 책임졌던 유성룡은 더욱 그러했다.

임진년 뒤에 성룡이 조당(朝堂)에서 여러 정승에게 말하기를 “당시에는 나도 또한 소요스러워질 것을 우려해 그르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문정(李文靖)은 진짜 성인(聖人)이었다. 만약 그 말을 들었더라면 국사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또 그 전후의 상소와 차자 속에 진술한 정책을 당시 사람이 간혹 비난하기도 했으나, 지금 모두 착착 들어맞는 선견지명이었으니, 이는 미칠 수 없는 재주이다. 만일 율곡이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오늘에 능히 뭔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했다.
《연려실기술》 권18, 선조 조 고사본말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후세에 서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라는 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십만양병설이 처음 등장한 것이 서인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이고,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십만양병설과 관련한 이이와 유성룡에 대한 사관의 논평 역시 김장생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이가 직접 양병과 외적에 대한 염려를 드러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지금 백성은 흩어지고 군사는 쇠약하며 창고의 양곡마저 고갈되었는데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신의도 여지없이 사라졌습니다. 혹시라도 외적이 변방을 침범하거나 도적이 국내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방어할 만한 병력도 없고 먹을 만한 곡식도 없고 신의로 유지할 수도 없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려 하십니까? 지금 듣건대 조사(詔使, 명나라 사신)가 곧 나온다는데 서도(西道, 평안도) 백성들은 이미 지탱할 계책이 없다고 합니다.
《선조수정실록》 권16, 선조 15년 9월 1일

조선은 건국 이후 선조 대까지 200년간 평화가 이어져 왔다. 이로 인해 국방의 기강이 흐트러졌다. 이이는 병조 판서를 지내며 이러한 사실을 변방에서 몸소 겪은 일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력을 키워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꼈고, 나름대로의 양병설(養兵說)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양병설(養兵說)이 좌절되자 병조판서로서 책무를 다하기 어렵다고 여긴 이이는 벼슬을 내놓고 파주로 내려와 임진강이 보이는 강가에 정자 하나를 지었다. 그때 이렇게 목수에게 지시했다.

“목재를 다듬을 때 목재마다 기름을 듬뿍 칠하시오.”

목수들은 의아했지만 명대로 기름칠을 해가며 정자를 지었는데, 이 정자가 훗날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갈 때 빗속에서 등대 역할을 해 주었다는 화석정(火石亭)이다.

십만양병설이나 화석정 이야기는 후대에 와서 부풀어 이이를 마치 예언자처럼 보이게 했지만, 이것이 전쟁을 예언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사회의 상황과 분위기를 정확히 판단하고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대책을 제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이는 과로로 병이 들어 있을 때도 나랏일에 진심을 다했다. 그는 병으로 마흔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죽음에 임박해 있었던 일이 졸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이는 병조 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해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상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했다. 이때 서익(徐益)이 순무어사(巡撫御史)로 관북(關北)에 가게 되었는데, 상이 이이에게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했다.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니 접응하지 말도록 청했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만약 이 일로 인해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해 입으로 육조의 방략(方略)을 불러 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죽었다.
《선조수정실록》 권18, 선조 17년 1월 1일, 이이의 졸기

관료로서도 최선을 다하고, 학자로서도 성취를 이루었으며, 제자를 길러내는 데도 여념이 없었던 이이. 사림의 분열을 안타까워하고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는 꿈도 이루지 못했으나 이이는 후대에 길이 가르침을 준 학자였다. 또한 공직자의 본보기를 보여주었고 끝까지 나라에 대한 충정을 보여준 충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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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 집필자 소개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를 거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펼쳐보기

출처

재상열전
재상열전 | 저자이성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표면적으로는 2인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1인자였던 조선의 재상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때로 당쟁을 정국으로 분열시키고, 때로 국란의 혼돈 속에서 우왕좌왕하기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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