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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한자 옳을 '의(義)'는 '양(羊)'과 나를 의미하는 '아(我)', 두 글자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양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바치던 제물을 말한다. 그래서 이 글자는 하늘에 제를 올리는 의식을 치르면서 하늘과 내가 일치되는 경건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의'는 하늘의 뜻과 일치하는 올바른 가치관을 의미한다.
'의'와 가장 근접한 서양의 가치 개념은 정의를 의미하는 'Justice'이다. 서양에서는 이를 양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여신의 모습으로 인격화하면서 이 가치 자체를 신의 영역으로 귀속시켰다. 이는 정의라는 미덕 자체가 인간이 노력해서 실현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논의를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서양의 철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그저 '보편적으로 옳은 것' 정도로 애매하게 정의해 두고 그것을 집행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플라톤은 정의의 본질을 '조화(Harmony)'로 파악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Equivalence)'으로 파악했다.
의와 이
흔히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은 오상(五常)이라고 불린다. 이 중에서 유독 '의'만은 다른 것과 달리 불확실성, 모호성 혹은 상대적 가치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의나 정의(正義)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한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이 전제 조건인데, 보통의 인간은 이 진정한 하늘의 뜻을 알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고대인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정성스럽게 제물을 바치고 경건하게 하늘의 뜻을 물었을 때 어쩌면 하늘은 정말로 그 답을 알려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커뮤니케이션의 오류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이 답을 받은 '하늘의 뜻'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로, 이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주관적인 가치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의'라는 가치 자체가 근본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만큼 이러한 모호성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동양의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고자 노력했던 맹자는 '의'를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의미하는 '이(利)'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하늘의 마음인 '천심(天心)'을 '의'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사실 최근에 사람들은 자주 정의를 외치지만 많은 경우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진정한 '의'가 아니라 '이'인 경우가 많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이해관계를 정의라고 착각하거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억지 논리로 자기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자신이 얻어야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익과 하늘이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진실한 정의를 구분하지 않는다.
사실 맹자도 천심의 존재만을 주장했을 뿐 이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민심(民心)이 바로 천심'이라는 사회적 보편성을 기준으로 제시했는데 사회적인 가치를 판단하는 중대한 문제에서 항상 민주주의적인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다는 것은 아무래도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많은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것'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떤 사회나 다수의 사람들이 가치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 다수결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을 것 같다.
영원한 정의는 없다
서양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다. 그들은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인간 대신 신을 선택하면서 정의와 관련해서 획일적으로 '신의 정의(Divine Justice)'라는 개념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또 커뮤니케이션의 오류가 발생했다. 신과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독점한 사제들이 신의 뜻 대신 자신의 집단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이 가치에 대한 모호함은 거의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개명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유럽의 철학자들은 '신의 정의'라는 절대적인 도덕 기준에 대해 회의하고 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회의론의 와중에 정의에 관한 도덕적인 모호성을 결정적으로 논파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불운한 천재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였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도덕적 기준은 상대적이다'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으며, 몇 년 후에 발표한 논문 《선악을 넘어서(Jenseits von Gut und Böse)》와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인 계급에 따라 도덕을 인식하는 기준이 상이하다. 특히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상대를 평가하면서 적용하는 도덕적 기준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요구하는 기본적인 미덕은 '선량함(good or bad)'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량함이란 온순함이나 이타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
사실 지배자의 입장에서야 사회의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배자에게 순응하면서 묵묵히 이타적인 행위를 해 주는 사람들이 최고의 피지배자일 것이다. 반면에 피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선량함이 아니라 '올바름(right or evil)'을 기준으로 지배자를 판단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적인 미덕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로서 의 혹은 정의는 태생적으로 민주적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피지배자에게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든 지배적인 소수와 피지배적인 다수로 구성되는데, 이 가치는 근본적으로 '보편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대중적인 보편성을 기반으로 정의의 기준이 세워질 수밖에 없다면, 사회적 인식이란 시대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제의 정의는 오늘의 정의와 항상 같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일찌감치 이 심각한 문제점을 간파하고 우리들에게 경고했던 것이다.
"영원한 정의는 없다!"
혁명과 혁명가
사회적인 측면에서 정의는 보편성과 함께 다른 미덕들과 차별되는 또 하나의 특성을 갖는다. 바로 이 가치가 항상 적절한 '행동'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관용이나 신뢰와 같은 사회적인 가치는 근본적으로 의식의 문제로, 잘못된 점을 인지하고 수정한다면 미덕이 실현된다. 그렇지만 정의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지나 수정에서 끝나지 않고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건 지배자들은 언제나 그 사회가 추구하는 정의라는 이름의 보편적인 가치를 실현할 의무를 진다. 그렇지만 이기적인 동물인 인간은 사회적인 정의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결국 사회 계층 사이에서 가치관이 충돌하게 되고 이러한 가치관의 충돌은 사회 전반적인 갈등을 야기하는 요인이 된다.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사회의 지배자들은 언제라도 막강한 힘을 가진 '사악한(evil)' 불의의 존재로 변모할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피지배자들은 심각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 번째는 인내. 잘못된 상황을 인지했지만 '선량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체제 유지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인내가 아니라 잘못을 수정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적극적인 행동'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과 그에 따르는 비용을 스스로 감수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발생한 사회적 갈등의 정도가 그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게 되면 피지배자들은 지배자들을 교체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개시한다. 이로써 사회 계급이 충돌하고 단기간에 기존의 사회 체제가 붕괴되는 격렬하고 급격한 과정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를 '혁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혁명'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역사의 기록을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혁명은 그 순수함이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혁명 과정에서 지배자 계층에 전격적으로 합류한 구성원들이 서로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하게 되면서 목적이 변질되어 버리며, 이에 따라 혁명의 본질적인 추구 대상인 '사회 정의'를 배신하게 된다. 한때 민중의 추앙을 받던 혁명가들은 억압적인 지배자로 탈바꿈해 또 다시 타도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상주의적인 관점에서 혁명이란 그동안 실현되지 못하던 사회 정의가 구성원 대다수의 지지를 받아 비로소 급격하게 실현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상과는 달리 실제 역사에서 대부분의 혁명은 그 사회의 지배적인 소수가 교체되는 단순한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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