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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장열전

서희

염윤(廉允), 徐熙

대담한 협상으로 거란의 대군을 물리치다

요약 테이블
시대 고려
출생 942년(태조 25)
사망 998년(목종 원년)
본관 이천
서희 동상 제막

서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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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고의 지장, 서희

서희(徐熙)는 한민족 역사 최고의 협상가라 할 만하다. 그는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책상 앞에 앉아 대담한 논리로 물리친 지장(智將)이었다. 서희는 942년(태조 25) 서필(徐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 자는 염윤(廉允)이다. 서희의 할아버지 서신일(徐神逸)은 이천 지방의 토착 호족이었으나, 아버지 서필(徐弼)이 광종 대에 내의령을 지내면서 그의 집안도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고려사》는 서희가 어릴 때부터 성질이 엄정하고 성실했다고 전한다. 그의 이러한 성품은 아버지 서필과 닮았는데, 서필은 평소 검소하고 꼿꼿해 사치를 일삼는 광종에게 바른 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서희는 학업에 정진해 960년(광종 11)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광평원외랑을 거쳐 내의시랑에 이르렀다.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워 장군이라 불리지만 본래는 문관 출신이었던 것이다.

서희는 972년(광종 23)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뛰어난 협상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는 10여 년간 송과 외교가 단절된 상태였다. 이때의 일을 《동사강목》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서희가 이르자, 용모와 거동이 절도에 맞으므로 제(帝)가 그를 가상히 여기며, 조칙(詔勅)을 내려 왕에게 식읍(食邑)을 더해 주고, 추성순화수절보의공신(推誠順化守節保義功臣)의 칭호를 내려 주었으며, 서희에게는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제수했다. - 《동사강목》 제6 상

이렇듯 외교 사절로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서희는 능력을 인정받아 좌승(佐丞)이 되었다. 983년(성종 2)에는 병관어사가 되었고, 얼마 뒤 정2품 내사시랑에 올랐다.

거란의 침입과 위기의 고려

거란은 4세기 이래 동몽골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북방 민족이었다. 고구려 장수왕 때는 거란의 일부가 고구려에 예속된 적도 있었고, 당나라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그들은 부족 연합체로 독립해 살아왔다. 거란은 여러 부족 가운데 한 사람의 맹주를 선출해 전체 부족을 다스리는 체제였는데, 당나라와 고구려, 발해와 같은 강대국에 밀려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런데 10세기 초 거란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 그는 당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부족들을 통합해 나라를 세웠다. 그는 요(遼)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로 등극한 뒤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거란은 궁극적으로 중국 대륙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려와의 교류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고려의 입장은 어땠을까? 고려는 처음 국가를 세울 때부터 대제국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국호를 '고려'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을 개축하여 서경으로 삼고 북방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따라서 북방 진출에 방해가 되는 거란, 여진과 불편한 관계였다. 거란이 926년(태조 8)에 발해를 멸망시킨 것도 고려의 관계를 껄끄럽게 한 요인이었다. 거란은 942년(태조 25)에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내 화친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거절하며 사신들을 가두고 낙타들도 모두 굶겨 죽였다. 게다가 태조 왕건은 후대 왕들에게 남긴 유훈 〈훈요십조〉에서도 거란과 거리를 둘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거란은 이러한 굴욕을 당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거란의 내정이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란은 요나라 6대 왕인 성종이 즉위하면서 정치를 안정시키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요 성종은 송나라와의 결전을 준비하면서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과 압록강 하류의 여진을 먼저 복속시켰다. 그리고 고려마저 복속시키기 위해 993년(성종 12) 마침내 침공을 강행했다.

소손녕을 대장으로 하는 거란의 침입에 고려 성종은 서둘러 서희를 중군사에 임명하고 상군사 시중 박양유(朴良柔), 하군사 문하시랑 최량(崔亮)과 함께 북계(北界, 지금의 평북 지방)에서 적을 방어하게 했다. 성종도 친히 전투를 지휘하기 위해 서경에 진을 쳤다. 하지만 소손녕 부대는 일시에 봉산군을 함락시키고, 고려군의 선봉 군사(軍使)와 급사중 윤서안(尹庶顔) 등을 포로로 잡으며 기세를 올렸다. 이후 소손녕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고려 조정에 서한을 보냈다.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데 고려가 마음대로 강점하고 있기에 토벌하러 왔으며, 천하를 통일하고 있는 거란에 귀순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소탕할 테니 속히 투항하라는 내용이었다.

서희는 서한을 읽고 화의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성종에게 보고했다. 성종은 서희의 말에 따라 이몽전(李蒙戩)을 보내 화의를 제의했다. 하지만 소손녕은 "너희 나라에서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제 천벌을 주러 온 것이다."라고 말도 안 되는 침공 이유를 대더니 "80만 대군이 왔으니, 왕과 신하들이 직접 항복해야 한다." 하며 다시 한 번 으름장을 놓았다.

이몽전이 이러한 내용을 보고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잔뜩 겁을 먹고는 비관적인 견해를 쏟아냈다. 어떤 자는 "왕은 서울로 돌아가고 대신 한 명으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고 투항을 청하자." 주장하고, 또 어떤 자는 "서경 이북 땅을 적에게 넘겨 주고 황주(黃州)로부터 절령(岊嶺)에 이르는 경계선을 국경으로 정하자."라고도 했다. 여러 신하들의 말을 들은 성종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성종은 거란에 땅을 떼어 주고 전쟁을 끝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서경 창고에 있던 쌀을 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래도 남은 쌀은 적들의 군량미로 쓰이지 못하도록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서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가히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이 강하고 약한 데만 달린 것이 아니라 만일 적의 약점을 잘 알고 행동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쌀을 버리려고 합니까? 하물며 양식이란 백성의 생명을 유지하는 물건이라 차라리 적에게 이용될지언정 어찌 헛되이 강물에 버린단 말입니까? 이것은 또한 하늘의 뜻에도 부합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고려사》 권 94, 〈열전〉 제7, 서희

서희의 강력한 주장에 마음이 기운 성종은 일단 쌀을 버리라는 명령을 거두었다. 그러자 서희는 한 발 더 나아가 거란이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찾겠다고 하는 것은 위협에 불과하니 절대로 서경 이북을 떼어 주어서는 안 된다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성종은 서희의 말대로 쌀을 버리라는 명령은 거두었지만, 끝까지 싸우자는 주장에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성종이 망설이자 이번에는 전 민관어사 이지백(李知白)이 서희의 의견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두 사람의 강경한 어조에 결국 성종은 서경 이북 땅을 내 주자는 의견을 철회하도록 했다.

한편 고려 조정에서 이 같은 논의가 오가는 사이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했다. 고려의 답변이 늦는 데 따른 보복조치였다. 그런데 고려군의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이 맞서 싸워 이를 물리쳤다. 그러자 소손녕이 감히 다시 공격하지는 못하고 사람을 보내서 항복을 독촉하며 면대를 요청했다. 성종은 적임자로 서희를 지목했고, 서희 역시 자신의 임무라 여기고 스스로 사신으로 나서 거란군 진영으로 찾아갔다. 드디어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이 시작되었다.

서희, 적장과 담판으로 승리를 이끌다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거란의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은 서희에게 뜰에서 절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서희가 대답했다.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당하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나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소손녕이 끈질기게 우기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서희는 숙소로 돌아와 버렸다. 소손녕은 서희가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비범함과 당당함에 감복했다. 소손녕은 서희가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결국 당상에서 대등하게 대면하는 예식 절차를 승낙했다. 서희와 소손녕이 뜰에서 마주서서 인사한 후 동편과 서편에 마주 앉아 담판을 시작했다. 소손녕이 먼저 서희에게 말했다.

"당신의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건국했고 고구려의 옛 영토는 우리나라에 소속되었는데 어째서 당신들이 침범했는가? 또 우리나라와는 국경이 연접되어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까닭에 이번에 정벌하게 된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이에 서희가 목소리를 높여 당당하게 논박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계자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했다. 그리고 경계를 가지고 말하면 귀국의 동경(東京, 지금의 요양)이 우리 국토 안에 들어와야 하겠는데 당신이 어떻게 침범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 안팎이 역시 우리 경내인데 이제 여진이 그 중간을 강점하고 있으면서 완악한 행위와 간사스러운 태도로 교통을 차단했으므로 바다를 건너기보다도 왕래하기 곤란한 형편이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함은 여진의 탓이라 만일 여진을 다스리고 우리의 옛 영토를 회복해 거기에 성과 보 들을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를 통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약 나의 의견을 귀국 임금에게 전달하기만 한다면 어찌 접수하지 않으실 리가 있으랴."

서희가 조목조목 이치에 맞게 말하니 소손녕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소손녕은 일단 자신의 왕에게 회담 내용을 보고했다. 거란의 왕은 고려가 화의를 요청한 것이니 그만 정전하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이렇게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화의를 얻어냈다. 또한 압록강 동쪽 지역에 있는 여진을 치는 일에 거란이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후 돌아왔다. 서희가 돌아올 때 소손녕은 낙타 10두, 말 100필, 양 1천 마리와 비단 500필을 예물로 주어 보내기도 했다. 앉은 채로 수십만 대군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북진의 명분까지 얻었으니 명분과 실리 모두를 살린 한판승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거란군이 고려로 너무 깊숙이 들어와 협공당할 위험이 있어 내심 담판에서 양보한 것이다.

서희가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자, 성종은 친히 마중을 나가 맞으며 기뻐했다. 성종은 서희의 회담 보고를 듣고 즉시 시중 박양유를 거란에 보내 친선의 뜻을 표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서희는 반대 의견을 냈다.

"제가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고 옛 영토를 회복한 연후에 국교를 통하기로 했는데, 지금은 겨우 강 이쪽 땅을 회복했을 뿐이므로 금후 강 저편의 땅까지 회수될 때를 기다려서 국교를 통해도 늦지 않습니다."

서희는 이번 기회에 북으로 영토를 넓히고 좀 더 세력을 키운 다음 거란과 외교관계를 성립해도 된다는 실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서희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당장 화의하는 편을 선택했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화의가 맺어졌다.

강동 6주를 얻어 국경선을 넓히다

서희는 거란이 물러간 이듬해부터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몰아냈다. 그리하여 압록강 동쪽 장흥(長興), 귀화(歸化), 곽주(郭州), 구주(龜州), 안의(安義), 흥화(興化)에 성을 쌓아 이른바 강동 6주(江東六州)를 구축하였다. 발해 멸망 이후 주인 없이 버려져 있던 땅을 고려의 땅으로 편입한 것이다. 서희가 개척한 강동 6주는 후에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영토를 확보하는 데 기준이 되었다. 한편 최근에는 서희가 개척한 북방 영토의 영역이 6주가 아니라 선주(宣州), 맹주(孟州)에 쌓은 성을 포함해 8주라는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다.

이렇게 서희는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회담으로 물리치고 북방 강역 확대의 업을 이룬 채 998년(목종 원년) 병을 얻어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서희는 장위(章威)라는 시호를 받고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서희의 업적은 후대의 찬사를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 앞에는 '외교의 귀재', '최고의 협상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서희가 이뤄낸 적장과의 담판승은 그가 단지 말을 잘해서 얻어낸 성과가 아니다. 그보다 먼저 서희는 당시 국제정세에 대해 정확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거란이 침공한 진짜 이유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하고 고려의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협상의 가능성을 확신했다. 여기에 적장에 대한 정확한 분석, 상대에 기죽지 않는 배짱이 어우러져 실리와 명분 모두를 얻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서희가 고려의 최고, 아니 역대 최고의 지장이라 일컬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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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 집필자 소개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를 거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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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열전
명장열전 | 저자이성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에서 활약한 31명의 명장을 만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장부터 많은 조명을 받지는 못했으나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사람들까지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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