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시대 | 조선 |
---|---|
출생 | 1335년(충숙왕 복위 4) |
사망 | 1408년(태종 8) 05월 24일 |
본명 | 이성계(李成桂) |
본관 | 전주(全州) |
육룡이 
샤, 조선 창업의 전조
조선의 역사는 고려의 무장 이성계(李成桂)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의 왕족과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웠다.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복위 4)에 화령부(和寧府, 함경도 영흥)에서 이자춘(李子春)과 최한기(崔閑奇)의 딸인 영흥 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결(中潔), 호는 송헌(松軒)이고, 본관은 전주로 시조인 이한(李翰)의 21대손이다.
무신의 난 때 이성계의 6대조인 이린(李璘)이 형 이의방(李義方)과 함께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의방이 정중부(鄭仲夫)에게 제거되자 이린 역시 함경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린의 아들 이양무(李陽茂, 이성계의 5대조)도 실세(失勢)해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이양무의 아들이자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 대에 이르러서는 고향인 전주에서 농민반란을 주동했다는 혐의를 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안사는 1231년(고려 고종 18) 무렵에 일족을 거느리고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안변 지역으로 옮겨 갔다. 이때 이안사를 따른 가구가 170호, 1,7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함경도 지역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원나라의 통치 기구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안사는 망명지인 동북면(東北面) 일대에서 원나라의 관직을 받아 정착했다.
세종 조에 조선왕조 건국의 유래를 밝히고 이씨 왕가 조상들의 성덕을 기리기 위해 훈민정음으로 편찬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해동(海東) 육룡(六龍)이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
시니 - 《용비어천가》 제1장
여기서 '육룡'은 이성계의 직계 조상으로 조선 건국 후 추존된 목조(穆祖) 이안사,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도조(度祖) 이춘(李椿), 환조(桓祖) 이자춘, 태조(太祖) 이성계,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을 일컫는다. 이처럼 조선 왕실은 개국의 기원을 이안사로부터 잡고 있다.
그런데 《태조실록》에는 이안사가 고향을 떠난 이유에 대해서 다른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안사에게는 사랑하는 관기(官妓)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역 수령이 산성별감(山城別監)에게 그 관기를 주려고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이 일로 이안사는 삼척으로 터전을 옮겼는데, 공교롭게도 자신과 불화가 있었던 산성별감이 그 지역 책임자로 부임해 왔다. 이안사는 할 수 없이 아예 국외인 함경도 지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오히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탄압받던 전주 이씨 일가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동조했던 무리들이 함께 이주길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후 이안사의 후손인 이행리, 이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동북면에서 천호(千戶)를 지냈다. 이성계의 조부인 이춘은 박광(朴光)의 딸과 혼인해 이자흥(李子興), 이자춘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인 이자흥이 아버지의 관직을 물려받았으나 일찍 죽고 둘째 아들인 이자춘이 적통을 이었으니, 그가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 환조다. 실록에는 도조 이춘이 조선왕조 개창을 암시하는 꿈을 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도조의 꿈에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백룡입니다. 지금 모처(某處)에 있는데, 흑룡이 나의 거처를 빼앗으려고 하니, 공이 구원해 주십시오." 했다. 도조가 꿈을 깨고 난 후에 보통으로 여기고 이상히 생각하지 않았더니, 또 꿈에 백룡이 다시 나타나서 간절히 청하기를, "공은 어찌 내 말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면서 날짜까지 말했다. 도조가 그제야 이를 이상히 여기고 기일이 되어 활과 화살을 가지고 가서 보니, 구름과 안개가 어두컴컴한데 백룡과 흑룡이 한창 못 가운데서 싸우고 있었다. 도조가 흑룡을 쏘니, 화살 한 개에 맞아 죽어 못에 잠기었다. 뒤에 꿈을 꾸니 백룡이 와서 사례하기를 "공의 큰 경사(慶事)는 장차 자손에 있을 것입니다." 했다. - 《태조실록》 권 1, 총서
여기서 큰 경사를 보게 될 자손이 바로 이춘의 손자인 이성계다.
한편 이자춘이 동북면에서 기반을 다지는 동안, 동북아에서는 명나라가 일어나 원나라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 틈을 타 반원(反元) 정책을 펼친 공민왕은 원나라에 빼앗겼던 북쪽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이자춘은 공민왕의 정책에 적극 협조했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의 명을 받은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했다. 이때 이미 이자춘은 고려로부터 소부윤의 벼슬을 받은 후였다. 그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고려의 공격에 내응했다. 이 공으로 이자춘은 종2품 영록대부의 품계를 받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가 되었다. 이로써 이성계의 가문은 다시 고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성계는 일찍 죽은 아버지 이자춘을 대신해 고려의 벼슬을 물려받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는 그저 함경도 변방 출신의 무명 장수일 뿐이었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무술이 뛰어났던 이성계는 고려를 괴롭히던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우며 무장으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1378년(우왕 4)에 내륙까지 침범한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이후 이성계는 신흥 무인 세력의 선두주자가 되어 중앙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해 재상인 수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성계의 형제로는 동복누나인 정화공주와 이복형 이원계(李元桂), 이복동생 이화(李和)가 있다. 자녀로는 잠저 시절에 혼인한 첫째 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방우(李芳雨), 이방과(李芳果, 훗날의 정종), 이방의(李芳毅), 이방간(李芳幹), 이방원(李芳遠, 훗날의 태종), 이방연(李芳衍), 경신공주(慶愼公主), 경선공주(慶善公主) 등 6남 2녀가 있고,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방번(李芳蕃), 이방석(李芳碩), 경순공주(慶順公主) 등 2남 1녀가 있다.
역성혁명으로 이어진 위화도 회군
고려 말 중앙 정계는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문하시중 최영(崔瑩)과 신흥 무인 세력을 대표하는 이성계가 세력을 양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권신 이인임(李仁任), 임견미(林堅味) 등을 몰아냈다. 그러나 이들은 출신 성분뿐만 아니라 정치적 성향, 지지층까지 상반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최영은 친원파로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의 장인이기도 했다. 반면 이성계는 동북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명나라를 지지하는 친명파로, 권문세족들에 대항하며 성장한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던 중 두 세력의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원나라의 영토를 야금야금 잠식해 가던 명나라가 급기야 고려의 영토인 동·서북면 일대까지 차지하려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우왕과 친원파들은 즉각 반발했다. 우왕은 명나라의 행태를 두고 볼 수 없다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최영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우왕은 1388년(우왕 14)에 요동 정벌을 단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친명파들은 무모한 계획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우왕은 요동 정벌을 반대하는 이자송(李子松)을 처형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우왕과 최영이 이처럼 요동 정벌을 강행한 데는 고려의 영토를 침범한 명나라를 응징하는 것뿐만 아니라 차제에 친명파인 이성계 등 신흥 무인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팔도도통사 최영은 우왕을 모시고 평양에 남아 있고,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가 전방으로 나아갔다. 최영이 비록 나이가 많다고는 하나 전장에 서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왕도 같이 있자고 하고, 굳이 무모한 전쟁에 나설 이유도 없었다.
이성계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사실 요동 정벌 자체가 이성계에게 불리할 것은 뻔했다. 당시 고려의 전력으로는 신흥 강국인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전쟁에 패해 목숨을 잃게 될 확률이 높았다. 설사 어렵게 승리한다고 해도 친명파인 이성계는 명분상 치명타를 입게 되어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우왕과 최영에게만 좋은 일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요동 정벌에 반대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성계는 울며 겨자 먹기로 출정에 나섰다. 그러나 요동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벌군에게 시련이 닥쳤다. 압록강 하류의 섬인 위화도에 이르러 심한 장마를 만나 더 이상 진군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도망병이 속출했다. 마침내 이성계는 회군(回軍)을 결심했다. 왕의 명령을 어긴 회군은 명백한 반역 행위였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조민수도 회군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회군의 명분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대국 명나라를 공격한다면 바로 명나라가 반격할 것이다. 약소국인 고려가 대국 명나라의 공격을 견딜 수 있겠는가? 온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질 것이다. 나 이성계가 여러 차례 이런 상황을 들어 상감과 최영에게 회군을 요청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최영은 이제 나이가 일흔인 노인이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모두 함께 회군해 왕을 직접 만나 사정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래야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다. - 《고려사》 권 137, 열전 50
이성계의 결단은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군심을 얻은 이성계는 말머리를 돌렸고, 회군 소식은 곧바로 평양에 머물러 있던 우왕과 최영에게 전해졌다. 평양에는 소수의 친위군 정도만 남아 있었을 뿐 반란군에 맞설 병력이 없었다. 우왕과 최영은 개경으로 후퇴했으나 결국 이성계와 조민수의 공격을 받고 생포되었다. 우왕과 최영은 유배되었다가 죽임당했다.
이렇게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그에게 위화도 회군은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우는 역성혁명의 시작이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손발을 묶은 전제 개혁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평소 존경하던 이색(李穡)을 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리고, 본인은 좌시중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에 동조했던 조민수는 우시중에 올랐다. 또한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의 친명파 신흥 세력이 조정에 대거 포진했다. 이들은 개혁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우선 전제 개혁부터 실시했다. 당시 고려의 권문세족들은 권력을 남용하고 각종 비리를 저지르며 수많은 사전(私田)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전이란 수조지(收租地)를 불법적으로 차지한 소유지를 말한다. 이처럼 일부 특권층이 사전과 노동력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다 보니 국가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새로 정권을 잡은 신흥 세력에게 나누어 줄 녹봉과 수조지가 모자라고, 군사비 조달이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권문세족들이 움켜쥐고 있던 사전과 수조권을 빼앗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과전법(科田法)이었다. 과전법은 수조권을 국가가 회수해 공전(公田)을 늘리고, 관료들에게는 등급과 명목별로 과전, 군전(軍田), 공신전(功臣田), 외역전(外役田) 등의 수조권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과전법 실시에 앞서 도당(都堂)에서 찬반 투표를 했다. 이때 53명 중 이성계를 비롯하여 18명 만이 찬성을 하고, 정몽주(鄭夢周)는 중립을 지켰으며, 이색을 비롯해 나머지 권문세족들은 반대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권문세족들로, 과전법이 실시되면 손해를 볼 사람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정몽주의 태도였다. 이성계는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정몽주가 중립을 지킨 데 적지 않게 당황했다. 결국 이때부터 이성계와 정몽주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역성혁명이라는 역사적 운명 앞에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권문세족들의 반발에도 과전법은 이성계와 그를 지지하는 신진사대부들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과전법을 실시하기 위해 기존의 모든 토지문서를 불태웠는데, 불길이 사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과전법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 토지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권력과 부의 재분배를 위해 실시된 전제 개혁의 혜택은 신흥 세력들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권문세족들의 착취로 고생하던 농민들에게도 돌아갔다. 그러자 민심마저 이성계를 지지했다. 이제 이성계는 새 왕조 창업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태조의 등극, 조선 500년의 역사가 시작되다
위화도 회군 이후 유배된 우왕을 대신해 그의 아들 창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는 이색과 조민수, 변안렬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우왕의 아들이 왕이 된 것에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 세력들은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중 1389년(창왕 1)에 김저(金佇)가 정득후(鄭得厚) 등과 함께 유배된 우왕을 만나 이성계를 죽이려고 모의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성계는 이를 계기로 우왕을 죽이고, 창왕과 창왕의 지지 세력인 이색, 조민수, 변안렬 등을 귀양 보냈다가 죽였다.
그리고 1389년(공양왕 즉위)에 신종(神宗)의 7대손인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이성계 일파는 신돈(辛旽)의 아들인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왕씨를 세운다는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을 주장했다. 그러나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었다. 그저 이성계 일파의 입맛에 맞는 허수아비 왕을 세우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공양왕 즉위 초기만 하더라도 고려 조정에는 구세력과 신세력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공양왕은 두 세력의 완충 역할을 하며 자리를 보존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성계는 경제권을 장악한 데 이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1391년(공양왕 3)에 기존의 5군을 폐하고 3군으로 개편한 후 이성계가 삼군도총제사, 조준이 좌군총제사, 정도전이 우군총제사가 된 것이다. 그들은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창왕을 옹립하고 우왕 복위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이색, 우현보, 변안렬 등의 구세력을 처단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몽주를 필두로 한 반이성계 세력들은 최후의 저항을 했다. 속설이기는 하지만 1389년(창왕 1) 10월 11일 이성계의 생일날 이성계가 이방원을 시켜 정몽주와 변안렬을 초대해 자기들에게 동조할 뜻이 있는지 여부를 타진했다고 한다. 이방원이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하여가(何如歌)〉를 부르자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라는 〈단심가(丹心歌)〉를, 변안렬은 "가슴팍 구멍 뚫어……."라는 〈불굴가(不屈歌)〉를 불러 끝까지 고려에 충성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이성계 세력을 제거할 기회가 찾아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는 왕자 석(奭)을 황주까지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돌아오는 길에 사냥을 하다가 낙마해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정몽주 등은 이번 기회에 이성계의 심복들을 제거하고 나아가 이성계 세력을 일망타진하려 했다. 그리하여 그날 밤에 조준, 정도전, 남은(南誾), 윤소종(尹紹宗) 등의 8장상(將相)을 탄핵해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정몽주는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의 집을 방문해 정세를 살피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때 이방원은 수하인 조영규(趙英珪), 고여(高呂) 등을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쳐 죽였다. 당시의 상황을 실록은 "몽주가 이름에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않았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해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매한 학자의 최후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구차해 보인다. 정몽주를 깎아내리려는 기록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 소식을 접한 이성계는 크게 노했다. 그는 이방원을 불러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 《태조실록》 권 1, 총서
이방원은 "정몽주가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라며 모두가 아버지를 위한 효심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이 일로 이성계와 이방원 사이에는 큰 틈이 생겼다. 그래도 뒷수습은 해야 했다. 이성계는 이방과 등을 공양왕에게 보내 정몽주가 충량한 신하들을 해치려 하여 처형했다고 했다. 이제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저지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위협을 느낀 공양왕은 보신책으로 이성계와 형제의 맹약을 맺자고 했다. 그러나 이방원, 정도전, 남은, 조준 등 52인의 이성계파는 공양왕이 이성계를 찾아와 맹약을 맺기 전에 폐위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공민왕비인 정비(定妃)를 협박해 무능한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로 추대하는 밀지를 내리게 했다.
결국 이성계는 1392년(공양왕 4) 7월 17일에 정비의 명과 문무백관의 추대로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곧 조선의 태조이다. 이에 앞서 이성계는 정도전, 배극렴, 조준 등이 국새를 가져오자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두려운 마음에 거조(擧措)를 잃었다."라는 표현도 나온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천명과 인심이 쏠려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예로부터 제왕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라며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소신료가 거듭 왕위에 오를 것을 권고하니 마침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475년을 이어 온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나이 58세였다.
국호 제정과 한양 천도, 새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다
새 왕조를 연 태조는 농본주의(農本主義), 숭유억불(崇儒抑佛), 사대교린(事大交隣)을 국시(國是)로 삼고, 조림(趙琳)을 명나라에 보내 자신의 등극을 알렸다. 또한 밀직사사 한상질(韓尙質)을 보내 '조선'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았다. 조정에서 논의된 새 국호 후보에는 이 외에도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和寧)'이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과 '화령' 중 '조선'을 새 국호로 정한 것이었다. 1393년(태조 2) 1월 15일부터 고려를 버리고 새 국호 '조선'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국왕에 대한 고명(誥命)은 그보다 9년이 지난 1401년(태종 1)에서야 받을 수 있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명과 요동 지방을 둘러싼 영토 분쟁이 있었다. 이러한 양국 간의 갈등은 1396년(태조 5)에 발생한 표전문(表箋文) 사건을 계기로 더욱 심화되었다. 표전문 사건이란 명나라가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의 문구가 불손하다며 그 책임자인 정도전을 잡아들이라고 한 일이다. 정도전은 실상 그 표전문을 쓰지도 않았고 감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명나라가 정도전을 지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은 겉으로는 존명사대(尊明事大)를 외치면서 여진족이 사는 동·서북면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 정책을 실시하는 장본인인 정도전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도전은 태조를 설득해 명나라와 일전을 불사하려고 했다.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실제로 표전문을 작성했던 김약항(金若恒), 노인도(盧仁度) 등이 명나라에 잡혀가 처형당했다. 정도전은 명나라에 대해 요동 정벌로 맞서자고 했다. 이성계 역시 정도전의 요동 정벌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동 정벌 계획은 1398년(태조 7)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제거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명나라도 정도전의 반대파인 태종이 즉위하자 1401년(태조 1)에 국왕의 고명을 내려 주었다.
한편 이런 와중에도 신도(新都) 건설이 추진되었다. 이성계는 구세력의 온상인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첫 번째 후보지로 거론된 곳은 계룡산이었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륜(河崙)이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계룡산이 도읍으로는 적당하지 않다며 반대를 했다. 그리고 무악(毋岳, 지금의 신촌과 연희동 일대)을 새 도읍지로 추천했다. 그러나 태조와 함께 후보지를 둘러본 정도전과 무학(無學)이 너무 협소하다고 반대했다. 다음 후보지로는 무학이 추천한 청와대 자리가 거론되었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白岳)과 목멱(木覓), 남산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로 삼아 동향으로 궁궐을 앉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 터는 너무 좁고, 도읍은 자고로 남향을 하는 것이 원칙이니,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삼각산, 백악을 주산으로 하고, 안산(鞍山)과 낙산(洛山)을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아 도읍을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태조는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새 도읍지를 정했다.
1395년(태조 4) 9월, 마침내 중앙에 경복궁(景福宮)과 동쪽에 종묘(宗廟), 서쪽에 사직(社稷)이 완성되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북으로 백악, 동으로 낙산, 남으로 남산, 서로 안산을 잇는 도성과 사대문이 완성되었다. 정도전은 이 모든 공사를 지휘, 감독했으며, 궁궐과 사대문의 이름을 직접 짓는 등 새 도읍의 설계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왕자들과의 대립, 상왕으로 물러난 태조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 만인 1392년(태조 1) 8월에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 이방석(李芳碩)을 세자에 책봉했다. 태조와 신덕왕후의 마음은 원래 첫째 아들인 이방번(李芳蕃)에게 있었다. 그러나 배극렴(裵克廉)이 기왕에 신덕왕후 소생으로 세자를 세우려면 좀 더 명민한 둘째 아들이 낫다고 했다. 그래서 10세에 불과한 방석이 세자가 된 것이다. 이때 공로를 고려하면 이방원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기는 했으나, 이성계의 첫째 부인(鄕妻)인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이 건국되기 1년 전에 이미 죽어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가 정식 왕비로 있었고, 또한 강비가 조선 건국에 공로가 많았기 때문에 불만이 있더라도 방석의 세자 책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세자를 지지하는 세력으로는 이성계의 신임을 받는 정도전과 방석의 장인 심효생(沈孝生), 과격한 개혁파 남은(南誾) 등이 있었다. 정도전이 요동 정벌 계획을 핑계로 군권을 장악해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진법 교육을 강행하자, 이방원을 비롯한 전실 왕자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이방원과 그의 동복형제들은 정변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했다. 이 난으로 방번, 방석 형제와 정도전, 심효생, 남은 등 방석 지지 세력이 제거되었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태조는 그해 9월, 한씨 소생의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가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이다. 새 왕조가 열린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태조는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정몽주를 제거한 일로 방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방원이 이복형제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권력을 잡자 그를 더욱 미워했다. 정종은 형제상잔의 변이 일어난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도읍을 잠시 옮겼다.
1400년(정종 2), 한씨 소생의 넷째 아들 방간이 박포(朴苞)의 부추김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이 정변은 방원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방원은 스스로 세자가 된 데 이어 1401년(태종 1)에 왕위에 올랐다. 정종이 물러나고 태종이 즉위하니,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태종은 개경의 수창궁에 불이 나자 태조의 뜻을 따라 다시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그러나 태조는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고향인 함경도 지역에 머무르며 한양으로 돌아오라는 태종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함흥으로 태조를 모시러 간 차사들이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급기야 1402년(태종 2)에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난을 일으키면서 태조와 태종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표면적으로는 신덕왕후의 친척인 조사의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뒤에는 태조가 버티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이 군사적으로 대립하게 된 것이다. 결과는 태종의 승리였다. 조사의의 반란군은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태조는 할 수 없이 한양으로 환궁했다. 함흥에서 돌아온 태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였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설치했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리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일에 받치는 높은 기둥은 의당 큰 나무를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허락해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양전(兩殿, 태조와 태종)이 서로 만나자, 태종이 면복을 입고 나아가 뵈었는데, 태조가 바라보고 노한 얼굴빛으로 가졌던 동궁(彤弓)으로 백우전(白羽箭)을 힘껏 당겨서 쏘았다. 태종이 급해서 차일 기둥에 의지해 몸을 가렸으므로 화살이 그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이르기를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고, 이에 나라의 옥새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 했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마침내 잔치를 열고 태종이 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려 할 때에 하륜 등이 몰래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 가서 잔을 들어 헌수할 때 친히 하지 말고 마땅히 내시에게 주어 드리시오." 하므로, 태종이 또 그 말대로 해 내시가 잔을 올렸다. 태조가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쇠방망이를 꺼내어 자리 옆에 놓으면서 이르기를, "모두가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했다. - 《연려실기술》 권 1, 태조 조 고사본말
태종에게 백기를 든 태조의 말년은 쓸쓸했다. 사실상 연금 상태에 있었던 태조는 불교에 의탁해 먼저 간 부인과 자식 들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소일했다. 그러다 1408년(태종 8) 5월 24일에 창덕궁 별전에서 죽었다. 향년 74세였다. 새 왕조를 세운 태조는 7년이라는 길지 않은 치세 기간 동안 정도전과 함께 새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그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결국 창업 군주로서의 위대한 꿈은 태조가 아닌 태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후대에서는 태조의 역성혁명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1683년(숙종 9)에 있었던 송시열(宋時烈)과 박세채(朴世采)의 논쟁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경연에서 태조의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는 문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주장을 했다. 먼저 송시열은 태조의 위화도 회군이야말로 태조가 이룩한 공덕 중 가장 큰 것이라 평가하고, '소의정륜(昭義正倫)'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집권 세력이던 노론의 숭명의리(崇明義理) 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반면 박세채는 태조의 위화도 회군은 화가위국(化家爲國)에 불과하고, 잠저 시절의 일이니 이를 굳이 아름다운 일로 칭송해 존호를 가상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했다. 이는 조선의 사림들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정몽주를 충효와 절의의 상징으로 칭송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역성혁명은 이성계가 함경도 변방 출신의 무장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고작 왕씨 출신의 왕이나 바꾸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이성계를 도와 새 왕조의 탄생을 주도한 정도전, 하륜 등 서얼 출신 인사들도 신분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역성혁명에 동참한 것이었다. 결국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일부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인 세력에 의해 조선의 500년 역사가 탄생한 것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