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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와 트로이카

레닌의 죽음을 계기로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전격적인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초반부터 승세는 트로츠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트로츠키는 1924년 1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에 독감을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고, 레닌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남부 티플리스에서 요양했다. 또 레닌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흑해 연안에서 일광욕을 즐겼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장례식 날짜를 잘못 가르쳐줬다고 말했으나, 당시 18살인 트로츠키의 장남은 서한을 띄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아버지를 각성시켰다. 그럼에도 트로츠키는 레닌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는 의견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스탈린이 주도한 레닌의 장례식은 레닌이 관에서 벌떡 일어날 만큼 제국주의적이었으며 엉뚱한 영웅신화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레닌은 갈색의 상의가 입혀진 채 유리관에 넣어졌고 하반신은 국기로 덮여 모든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레닌의 시신을 보기 위해 4열로 늘어선 민중들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줄을 이었다. 여기서부터 레닌의 전설은 시작되었고 그것은 스탈린의 서곡으로 이어졌다.

    • 1레닌
    • 2스탈린

      1922년에 스탈린이 레닌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스탈린은 레닌의 후광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였다.

레닌은 생전에 스탈린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이 다른 동지들과 찍은 사진을 조작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이후 레닌의 모든 사진에는 스탈린이 있었고 역사적 사건 속에는 스탈린이 있었다. 즉 레닌의 업적에 스탈린이 편승한 것이다.

평소 레닌의 주변 사람들은 레닌을 신임했지만 그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동조하는 일은 없었다. 무엇이 옳은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레닌이 아닌 당의 다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달랐다.

"레닌은 구름 위의 인물이며 그를 비판한다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그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고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를 비평하거나 불복종하는 사람은 그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오직 나만이 레닌의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하고 실현할 수 있다."

다른 당의 요원들은 이 연설을 듣고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당시 소련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최고 권위자이며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장인 리아자노프는 이러한 작태를 보고 한심스러워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는 될 수 있어도 레닌주의자는 될 수 없다."

당 간부들은 민중들 사이에 뿌리 깊게 박힌 레닌 숭배라는 말을 가벼운 유행어로 여겼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러한 현상을 꿰뚫어 보고 이를 장려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사람들은 트로츠키가 레닌의 뒤를 이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스탈린 일파는 어느새 지노비에프를 지도자로 카메네프,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트로이카 체제를 갖췄다. 그들에게 트로츠키는 위협적이고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또 트로츠키가 주장하는 영구혁명론은 그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협하는 이론으로 보였다.

1924년 5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스탈린의 당 서기직 해임이 언급되어 있는 레닌의 유언장이 낭독되었다. 그러나 지노비에프는 스탈린의 구명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이어 카메네프 역시 스탈린의 유임을 호소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삼두 체제는 트로츠키에게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당의 마지막 결정은 항상 정당하다. 왜냐하면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어진 유일한 역사적 기구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당에 반대하여 정당할 수는 없다. 당과 함께 당을 통하여야만 정당할 수 있다."

그러자 트로츠키 역시 1924년 《10월의 교훈》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트로이카 체제 반대 운동을 진행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성공적으로 끝난 1917년 10월 혁명에 대해 거사결정에 끝까지 반대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의 잘못을 지적했다. 또한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혁명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들의 오류를 비판했다. 그러나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와 트로츠키가 서로의 과실을 만인 앞에 드러내는 동안 스탈린만이 더욱 빛을 보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이론적으로 그들을 압도하기 위하여 정부의 인쇄국에 있던 인텔리의 도움을 받아 전집 13권을 출판하여 전국에 배포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 전집에서도 레닌의 전설을 절대적으로 부정했으며, 혁명에서 볼셰비키당보다 자신의 역할이 컸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인가? 아니면 레닌주의인가?〉 라는 논문을 통하여 레닌과 트로츠키의 관계를 상호부조의 관계에서 적대관계로 꾸며 트로츠키주의란 당과 볼셰비키 지도자에 대한 불신을 의미할 뿐이라고 몰아붙였다. 이러한 논쟁으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더욱 스탈린에게 의지하게 되었으며 트로츠키의 위신은 실추되었다.

모스크바 대학의 학생대회에서는 트로츠키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트로츠키는 적군의 총사령관으로 그의 지지 세력도 컸지만 대세를 바꾸기에는 미약했다. 결국 1925년 1월 정치국의 결의에 따라 트로츠키는 국방인민위원회에서 해임되었고 그 후임에 미하일 후룬제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트로츠키가 물러나자 트로이카를 잇던 끈도 끊어진 것이다. 지노비에프는 사그러지는 트로츠키를 이번 기회에 없애버릴 것을 제안했으나 스탈린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제 필요가 없어진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도 멀리하기 시작했다.

반대파의 제거

스탈린은 트로이카의 힘으로 자신이 소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25년 가을부터 노골적으로 삼두정치를 깨뜨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 내에서는 부하린, 톰스키가 이끄는 우파와 지노비에프, 카메네프가 이끄는 좌파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이때 생성된 좌우의 개념은 종전의 분파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우파는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을 지지했고, 좌파는 국제주의적 특징을 지닌 채 정치를 이데올로기적 견지에서 본 것이었다.

당시 논쟁의 쟁점은 농민 문제였으나, 스탈린의 최대 관심사는 논쟁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논쟁을 이용하여 그의 정적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일시적이나마 트로츠키에 대한 공격이 멈추었으나 그것은 화해가 아닌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에 대한 공격 때문에 잠시 보류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좌파에서 자주 트로츠키의 논리를 인용하자 트로츠키는 자연히 좌파 쪽으로 끌려갔다. 그래서 한 때 국방인민위원 후룬제의 후임으로 트로츠키가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스탈린파인 보로쉴로프가 임명되었다.

잠시 국방인민위원의 자리에 올랐던 후룬제는 스탈린의 제안으로 군의 최고사령관 자리에 앉게 되었다. 군에서 갖는 그에 대한 신망은 트로츠키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높은 인기는 스탈린이 그를 정적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했다. 재임 당시 후룬제는 군의 지휘관 감시기관인 게페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스탈린을 자극했다.

"후룬제는 생각보다 위험한 인물이다. 감시 대상이야!"

이렇게 감시 대상이 된 후룬제가 또 한 번 결정적으로 스탈린의 눈에 난 것은 지노비에프와 키메네프가 스탈린과 논쟁할 때 그가 스탈린의 편에 서지 않은 데 있었다. 스탈린으로서는 군의 최고사령관이 그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것이 상당히 못마땅했다. 당시 후룬제는 위궤양을 앓고 있었는데 거의 회복된 상태였다. 하지만 스탈린의 앞잡이인 의사는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요. 나는 속이 거북하지 않단 말이오."

후룬제는 수술을 거부했으나 스탈린의 하수인 의사는 다른 의사들을 매수하여 수술이 꼭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정치국에서도 이들의 결정을 확인하고 수술 명령을 내렸다. 후룬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마취된 채 수술 도중 죽고 말았다. 격분한 후룬제의 부인은 스탈린에게 남편이 독살당했다고 호소하며 자살하였다.

이제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1925년 12월에 열린 제14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과 지노비에프가 정면충돌했다. 이 대회에서는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이 공식 채택되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에게 개념의 혼동에 대해 적극 항의하였으나 스탈린도 신랄한 반격을 가하며 159대 65의 큰 표 차이로 이들을 물리쳤다. 이어 스탈린은 1926년 레닌그라드로 개칭된 페트로그라드 꼼소몰의 지방위원회를 개최하여 당 서기 지노비에프를 축출하고 자신의 참모인 키로프를 임명했다.

이렇게 되자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와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힘을 규합하자 스탈린은 오히려 더 편안하게 이들을 공격했다. 세 사람의 스탈린 반대 운동은 1926년부터 1928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스탈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1926년 10월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는 정치국에서 축출되었고 카메네프는 후보위원으로 내려앉았다. 1927년 7월 중앙위원회 정기회의에서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스탈린을 공격했다. 반대파는 스스로를 '블럭'이라 칭하며 당원 앞에 별개의 그룹으로 모습을 나타내며 공격을 시작했다.

"스탈린의 당 지도부는 현재 노동자 계급과 빈농의 생활을 악화시키고 있으며, 외교 정책 역시 중국 국민당의 실패와 영국의 대 소련 단교 등은 소련의 국제적 지위를 저하시키고 있다."

스탈린은 중앙위원회가 폐회된 후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를 당 중앙위원회에서 축출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그들은 수주일 후 당에서 제명되었으며 카메네프는 모스크바에서 싸움을 계속할 생각으로 주일(駐日) 대사직을 거부했다. 시시각각으로 위기가 닥쳐오자 그들은 1927년 10월 4일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이 성명서를 통해 그들이 당 규약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른바 당 속의 당, 블록을 해산할 것을 서약했다.

스탈린

스탈린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며 정적들을 잔인하고 악독한 방법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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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2월에 열린 제15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은 막강해진 힘을 휘둘러 좌파 그룹의 해산과 이론의 철회를 요구하며 트로츠키파의 지도그룹 75명을 당에서 제명하였다. 또 이 대회에서 스탈린은 신경제 정책의 종말을 알리고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 정책은 열광적인 지지 속에 채택되었다. 당 대회의 결과를 거부한 트로츠키는 알마타로 유배되었고 1929년에는 국외로 추방되었다.

트로츠키는 1926년 출간된 《배반당한 혁명》을 통해 스탈린 체제의 소비에트를 비판했다.

"생산수단은 국가의 것이나 국가는 관료의 것이다. 국가는 소비에트 귀족과 무기를 갖지 않은 근로 대중으로 분열되어 있다."

트로츠키는 1940년 멕시코의 망명지에서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의 도끼에 죽었다. 좌파 제거에 성공한 스탈린의 공격은 다시 우파 쪽으로 이어졌다. 그는 부하린, 톰스키, 뢰꼬프 등을 진정한 사회주의의 길에서 벗어났다고 비난하며 모두 정치국에서 추방했다. 좌우파를 모두 제거한 스탈린은 비로소 공산당과 소련연방의 최고 책임자, 그리고 레닌의 정통 후계자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스탈린과 5개년 계획

1927년 12월 제15차 공산당대회에서 스탈린의 압도적 승리는 스탈린 시대 개막과 함께 그의 5개년 계획이 시작됐음을 의미했다. 스탈린은 이후 독재 체제를 완벽하게 강화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세계혁명이 아니라 산업화에 의한 근대화라고 주장하면서 연속적인 5개년 계획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1928년 10월 1일부터 1932년 12월 31일까지 4년 3개월 동안 실시되었다. 5개년 계획은 고스플란이라는 최고 기관이 관리했으며, 고스플란에서는 물품의 생산량, 노동자들의 임금, 그리고 물품가격 등을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계획 경제는 소련 경제의 새로운 양상이 되었으며, 많은 나라에 영향을 끼쳤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주목적은 외국 차관을 사용하지 않고 중공업을 발달시키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공업화를 서두르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 농업생산성을 높이려면 트렉터를 비롯한 농기계와 전력이 필요했다. 둘째, 공산정권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마르크스주의의 지지 세력인 노동 계급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셋째는 러시아가 사회주의 국가로 살아남고 다른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러시아 자체가 부강한 자급자족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인 동기에서였다. 이리하여 화학, 자동차, 기계, 항공, 공장기계, 그리고 전기와 같은 완전히 새로운 산업분야에 1,500개 이상의 새로운 공장들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콤비나트로 불리는 대규모의 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우랄 지방의 마그니토고르스크였다.

농업의 기계화

노동자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집단 농장에서 트랙터를 몰고 밭으로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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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5개년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다. 공식 발표에 과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업부분은 목표의 93.7퍼센트 정도를 달성하였다. 더욱이 생산수단에 관련된 중공업은 103.4퍼센트 성장하여 목표를 초과 달성하였다. 그러나 경공업 내지 소비재 산업은 당초 목표의 84.9퍼센트 달성에 머물렀다. 또한 이 부문은 처음부터 최저 수준으로 축소 조정되었기 때문에 국민은 내핍생활을 강요받았다. 따라서 국민은 소비재 부족, 배급제, 일용품 궁핍, 생활고 등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황금빛 미래상에 현실의 어둠을 잊고 지냈다.

1920년대 말 서방 자본주의 세계는 대공황을 맞이하여 현실과 미래를 불안과 두려움으로 바라봤으나, 소련 국민들은 스탈린이 그려낸 장미빛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어도 실업이 없고, 미래에 어느 정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경제 발전의 단계적 성공에 만족감을 느꼈다. 아마도 가장 큰 변혁을 겪게 된 곳은 농촌 지역이었다.

1929년 스탈린은 농업의 집단화를 선포하고 부농계급을 공격하였다. 처음 계획은 농업 인구의 6분의 1정도만을 집단화하려는 것이었는데 1929년 겨울 갑자기 계획을 수정해 농민의 대부분을 즉각적으로 집단화했다. 수만 명의 열렬한 공산당원은 집단농장을 조직하고 사회주의를 확립하기 위하여 도시에서 농촌으로 파견되었다. 지방 행정당국과 당 조직은 경찰과 군대의 힘을 빌어 농민들을 집단농장으로 몰아넣었다.

부유한 농민들인 쿨라크가 자신들의 토지와 가축을 새로 생긴 집단농장에 넘기기를 반대하자 가난한 농민들은 부유한 농민들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200만 세대의 1천만 명에 이르는 쿨라크가 살해되거나 시베리아 혹은 중앙아시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추방되었다. 부농들은 말, 소, 돼지 등의 가축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도살해버렸다. 중농 및 소농까지도 이제 자신들의 소유가 아닌 가축들을 보살피지 않았고, 또 국가가 집단농장에 새로이 공급해 주리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부농과 똑같이 행동하였다. 그리하여 말은 절반 이상, 소는 절반 이하, 양과 염소는 3분의 2가 도살되었다. 이와 같은 손실이야말로 제1차 5개년 계획이 예견치 못했던 최악의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악천후까지 겹쳐 끔찍한 기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농업의 집단화는 계속 추진되었으며 1933년까지 농토의 60퍼센트가 집단농장에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1941년에 이르러 25만 개의 집단농장이 생겼고, 1천 9백만 세대가 그곳에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집단농장의 기본 형태는 콜호즈였다. 각 집단농장은 운영위원회가 작업을 감독하였으며, 농민들은 노동자들처럼 생산량에 따라 보수를 받았다. 각 집단농장은 정부가 할당한 생산량을 정부에 바쳤다. 이것은 도시민, 노동자, 군대에 공급되었다. 그리고 남은 잉여 농산물은 소비자에게 직접 팔 수도 있었지만, 개인이 전매하는 것은 투기로 간주하여 처벌했다. 1934년부터는 정부가 집단농장으로부터 사들인 농산물에 다시 이익을 붙여 시장에서 팔기도 하였다.

한편 이제까지 소규모 형태로 운영된 농업 생산방식 대신 1천 에이커 단위의 농업이 시작됨으로써 집단화된 토지에는 트랙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 농민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트랙터를 살 수 없었으며, 토지는 너무 작고 분산되어 있어서 일부 부농만이 기계를 사용할 수 있었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과정에서 전국에 수백 개의 트랙터 공급처가 생겼다. 정부는 트랙터 본부를 설치하여 영농기계를 집단농장에게 빌려주고 생산물의 20퍼센트를 사용료로 받았다. 이러한 농업의 집단화와 기계화를 통해 농업 생산물에 대한 정부 통제가 가능해졌고, 생산은 증대되었다. 또한 농촌의 잉여 노동력은 공장 노동자로 전환됐다. 1926년에서 1939년 사이에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인구는 약 2천만 명에 이르렀다.

제2차 5개년 계획은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제3차 5개년 계획은 1938년에 시작하여 독일이 침공한 1941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 2차, 3차 계획은 제1차 계획과 같이 중공업의 발달을 강조하고 농업의 집단화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2차, 3차 계획은 어떤 면에서는 1차 계획과 분명히 다른 점도 있었다. 제2차 5개년 계획은 1차 계획에서 목표의 과잉 달성이나 미달을 피하고 생산의 균형을 이루려는 것이 중점사항이었다. 그래서 소비재 생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2차, 3차 계획 기간 중에는 군수산업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스탈린은 산업화 초기부터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를 10년 안에 건설하지 못하면 자본주의자들에 의해서 소련이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위협은 1930년대에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1930년대에 이르자 독일과 일본은 노골적으로 소련에 적의를 보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군수품을 확충하며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볼가 강 동쪽 내륙 지방의 산업화를 가속화했다.

계속된 경제계획은 상당히 성공하였다. 1928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강철은 4.5배, 전력은 8배, 시멘트는 2배, 석탄은 4배, 석유는 3배로 생산량이 늘어났다. 그리고 철도를 포함한 수송수단은 4배로 늘어났다. 그리하여 1940년에는 독일의 생산과 비슷해졌다. 소련은 유럽 국가들이 75년 동안에 이룩한 것을 겨우 12년 만에 이룩한 것이다.

그렇지만 소련의 공업화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소련은 워낙 낙후됐기 때문에 성장이 급격히 늘어난 것뿐이다. 소련은 노동자 1인당 생산고가 서방에 비해 엄청나게 뒤떨어졌다. 대단히 많은 문화활동 등에 사용되는 종이 생산량을 비교해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1937년 미국이 1인당 103파운드, 독일과 영국이 각각 92파운드, 프랑스가 51파운드, 일본이 17파운드를 생산했는데 소련은 겨우 11파운드를 생산했을 뿐이다.

경제개발은 사회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모든 정책이 국가의 계획과 통제에 의해 움직이게 됨에 따라 직업선택의 자유가 사라졌다. 각 공장은 집단농장과 계약을 체결하여 필요한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하였으며, 집단화에 반대하는 농민은 강제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특권을 누려왔던 귀족계급이 사라졌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의 소련 사회는 마르크스가 꿈꾸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계급제도가 생겨났다.

스탈린은 차등 임금제도를 도입해 새롭게 지배계급이 된 관료, 기술자, 공장 경영자, 집단농장 책임자, 작가, 예술인들에게는 일반 노동자, 농민보다 엄청나게 많은 봉급을 주었다. 따라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마르크스의 평등 이상은 지켜지지 않고, 대신에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그의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새로운 원칙이 세워졌다.

피로 얼룩진 대숙청

오늘날까지도 소련 최고의 독재자인 스탈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 소련의 역사는 모른다해도 스탈린의 피의 숙청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잔인하게 행해졌던 스탈린의 피의 숙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인 제2차 5개년 계획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어 있었고 스탈린 헌법이 제정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당과 사회구조의 전반적인 재편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정변의 시기였다.

그의 숙청음모는 철저히 계획된 것으로 반대파는 물론 고참 볼셰비키에게 국가 전복의 음모를 씌워 그들의 숙청을 정당화하였다. 스탈린은 이를 통해 자신만이 레닌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알리고 음모자들로부터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다졌다.

사건의 시작은 1934년 12월 1일 당 지부 사무소로 들어가려던 레닌그라드의 당 서기 키로프가 암살된 데서 시작되었다. 당시 키로프는 스탈린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알려졌고 그가 스탈린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설까지 나돌고 있었다. 당의 지도자들은 스탈린이 사망했을 경우 혹시라도 자리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내정해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망받던 키로프가 암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상을 규명해야 할 비밀경찰은 스탈린에게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 그 후 공식발표는 다음과 같았다.

"키로프를 암살한 범인은 레오니드 니콜라예프라는 트로츠키파의 학생으로 해외 지령에 의해 움직이는 합동센터의 지령으로 암살했다. 또한 그는 당의 주요 지도자 스탈린, 보로쉴로프, 쥬다노프 등의 암살도 계획한 위험인물이다."

그러나 후일 흐루시초프가 소련 공산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행한 비밀연설에서 진범이 밝혀졌다.

"키로프의 암살음모에는 스탈린이 직접 관계했으며 당시 게페우가 해산되고 새로운 국가경찰조직의 장관 야고다가 협조했다."

키로프의 암살음모로 시작된 숙청은 1934년에서 1938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최근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숙청된 사람은 2천 1백만 명에서 2천 2백만 명에 이른다고 스탈린의 전기를 쓴 드미트리. A. 볼코고노프 장군이 밝혔다. 볼코고노프는 스탈린의 통치 기간 중에 농경학자인 아버지가 처형됐고 어머니마저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는 현역 육군 중장으로 스탈린의 전기를 쓰기 위해 군부와 당이 갖고 있는 비밀문서에 최초로 접근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탈린이 남긴 비밀문서 보관함을 여는 순간 처형해야 할 공산당원의 명단을 보고 경악했다.

"그 명단에는 그 당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친구이며, 가장 탁월한 지도자들이 모조리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적혀 있었다."

스탈린은 그의 보좌관인 말렌코프와 함께 이 명단을 훑어보고 아주 쉽게 승인했으며, 그리고 그날 밤 조용히 영화감상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고 한다. 각본에 따라 암살범과 그 일파는 즉시 처형되었고 키로프가 암살된 날 체포된 사람들 중 1주일 후에 100명이 처형되었다. 스탈린은 반대파에 있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외국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1935년 1월에 각각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더욱 심한 것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에게 사전에 키로프의 암살음모를 알았다는 자백을 강요한 것이다. 숙청의 폭풍으로 스탈린의 측근 몇 명도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그 일은 비밀에 부쳐졌다.

1935년 5월 스탈린은 "인민의 적을 일소한다."는 구실로 특별보안위원회를 설치하여 여러 기관의 책임자와 모든 당원에 대한 전면적 자격심사, 자아비판과 더불어 다른 당원의 당성에 대한 극렬한 비판까지 요구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극렬한 비판과 고발이 쏟아졌고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극심했던 사태는 소위 모스크바 재판이라고 불리는 볼셰비키 지도급 인사에 대한 숙청으로 세 차례에 걸쳐 공개재판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처형된 인사들은 모두가 스탈린과 동등한 레닌의 참모였으며 이번에도 역시 거짓 자백을 통해 처형하였다.

1936년 8월에 처음 개최된 모스크바 재판에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포함한 모든 피고인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레닌의 부인 크루푸스카야는 숙청의 광경을 보고 스탈린의 음흉한 책략을 비방했다.

"레닌이 오래 살았다면 그도 감옥으로 갔을 것이다."

부하린 역시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한 지도급 인사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소련에 두 개의 정부가 있다면 그 하나는 감옥에 있다."

피의 숙청을 맡았던 비밀경찰 야고다는 1차 숙청을 마치고 좌천되었다가 체포됐다. 그는 스탈린의 의도를 너무 깊숙이 알았을 뿐만 아니라 비밀경찰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호화로운 별장을 소유하는가 하면 감옥에 갇혀있던 미인들을 골라 연회를 베풀며 즐겼다. 결정적인 것은 막심 고리키의 아들 암살사건이었다.

고리키와 레닌은 친한 친구였다. 예전에 두 사람은 차르 경찰에 체포됐으며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 학교를 이탈리아의 소레도에 있는 별장에 차려놓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 초기에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고리키는 레닌에게 체포된 사람을 석방하든가 체포를 제한하라고 간섭했다.

이처럼 레닌과 막역한 사이였던 고리키의 아들 페슈코프가 암살되어 길거리에서 차갑게 발견되자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일었다. 병을 앓고 있는 70세의 고리키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충격으로 살아남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고리키는 쉽게 죽지 않았다. 그러자 조바심이 난 야고다는 고리키의 주치의 3명을 매수하여 치료를 핑계삼아 다량의 강심제를 주사하여 살해하라고 협박했다. 주치의들은 야고다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나 야고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들을 모두 총살했다. 이 모든 것은 스탈린이 계획한 것이다.

고리키는 스탈린의 무리한 경제적 정책 때문에 기아로 허덕이는 국민을 대변했으며, 그의 작가적 지위는 국제 사회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스탈린은 고리키의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리키의 영향력이 두려웠던 스탈린은 야고다에게 암살 명령을 내렸다.

"피 한 방울, 바람소리 한 점 없이 처리하라."

공개 재판

스탈린의 의도대로 진행된 공개 재판에서 재판장이 11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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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다는 스탈린의 명령에 복종했으나 스탈린은 자신의 치부를 너무 깊숙이 알고 있는 야고다도 일찌감치 죽여없앴다.

두 번째의 재판에서는 악명 높은 니콜라이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이 되면서 숙청 작업은 극에 달했는데 이것을 '예조프쉬치나'라고 부른다. 1937년 1월 23일부터 30일에 걸쳐 시행된 재판에서는 현직 인민위원과 레닌의 전우였던 라데크 등이 고발됐는데 대부분 사형이나 금고 10년 이상이 선고되었다.

제3차 재판은 트로츠키파 재판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트로츠키파를 제거하였다. 외국 첩보기관 운운하면서 '트로츠키파 블록'이라는 새로운 음모단을 만들어 볼셰비키 정권을 타도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재건하려 했다는 죄목을 씌웠다. 이때 부하린, 뢰꼬프, 크레진스키, 라코프스키 등이 처형되었다. 우파 출신의 톰스키는 자신에게 뻗쳐오는 위협의 손길을 미리 예견했음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밖에도 체포의 선풍은 전국을 강타하여 이전의 반대파였던 지노비에프나 부하린의 지지자, 예전의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무정부주의자, 유대 사회주의 그룹 등이 숙청 당했다.

그 결과 1934년 제17차 당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과 후보의원 139명 중 1937년 가을까지 98명이 처형됐고 17명이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었으며 14명이 남았다. 또한 제17차 전당대회 정·후보 대표의원 1천966명 중 거의 대부분인 1천108명이 체포됐다고 하니 이중 살아남은 사람은 기적을 맛보았다고 하겠다. 모스크바 재판에 이어 군사재판은 비공개로 시행됐는데 통계에 의하면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 숙청된 사람은 적군 간부 최고군사회의 멤버의 75퍼센트, 원수 5명 중 3명, 사령관급 15명 중 13명, 군단장급 85명 중 62명, 사단장급 195명 중 110명, 여단장급 406명 중 220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대령 이상의 고급장교 65퍼센트와 하급관료 10퍼센트에 해당하는 2만여 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고급장교 6천명 가운데 1천500명은 처형되고 나머지는 감옥이나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졌다. 잔인한 피의 숙청은 1938년 봄에 접어들면서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1938년 12월 내무인민위원 예조프가 해임되고 스탈린과 고향이 같은 베리아가 임명되었다. 예조프 역시 야고다처럼 다음해 초 사라졌다. 스탈린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자신의 권력 투쟁을 위한 학살자였다.

강제 수용소

수용소의 수인은 국익을 위해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수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을 강제 당했고 식사도 의복도 부족했다. 노동할 수 없을 만큼 약하거나 늙으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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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과 풍전등화의 모스크바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독일군 부대가 선전포고도 없이 소련에 침입했다. 독일군은 우선 국경 주변의 비행장에 맹폭격을 가하며 소련 공군을 혼란에 빠뜨린 다음 남쪽과 북쪽 그리고 중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이탈리아, 루마니아, 슬로비키아가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어 핀란드와 헝가리가 참전해 소련은 더욱 어려워졌다. 스탈린은 상황의 위급함을 깨닫고 재빨리 전 국민에게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는 소련이 기습 공격을 받았음을 강조하며 국민들 마음속에 민족적 분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승리를 인용하면서 히틀러의 군대도 문제없다고 큰 소리쳤다.

이 호소문은 호응을 얻었다. 더욱이 전쟁이 길어져 독일군의 약탈과 만행이 심해지자 독일에 대한 저항감은 후방의 게릴라전, 일종인 빨치산(파르티잔) 운동으로 나타났다. 때마침 미국의 약 110억 달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원조는 풍전등화 격인 소련을 구출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독일의 침공

모스크바 근처까지 침입한 독일군에 대해 반격에 나선 소련군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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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대공세에도 모스크바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히틀러가 전쟁을 너무 조급하게 했다는 것과 나폴레옹이 경험했듯 소련 특유의 추위와 광활한 영토로 인한 물자수송의 어려움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애국적인 파르티잔의 활동이 컸음은 말할 나위 없다. 산악 곳곳에서 기습 공격을 행해 독일군의 보급을 차단하여 배고픔과 추위를 가중시켜 독일군의 사기 저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점령에 실패한 히틀러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스탈린그라드의 점령마저도 지나친 소모전과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무위로 끝나자 전세는 오히려 소련의 승리로 이어졌다. 이 전쟁으로 인해 민족주의를 외친 스탈린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전쟁 중에 군대에 계급제도를 신설하여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으며, 자신이 직접 소련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리고 교회와 화해함으로써 국민 전체의 단결에 힘썼다. 스탈린이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대부분 러시아 민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서 1945년 5월 24일 치러진 전승 만찬석상에서 공공연히 밝혔다.

"소련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련의 여러 민족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러시아 민족의 건강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막대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얻은 것은 더욱 많았다. 먼저 영토 회복은 물론 새롭게 600만의 인구를 가진 약 20만 평방 마일의 영토를 얻게 되었다. 발트 해 연안국가 외에도 동폴란드, 베사라비아, 불가리아를 포함한 동프러시아의 북부가 새로운 영토가 되었다. 이로써 소련은 극동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 국경까지 뻗쳤고, 유럽에서는 동구 유럽을 포함해 북으로는 폴란드, 남으로는 에게 해와 아드리아 해까지 미쳤다.

독일과의 전쟁이 마무리되자 미국은 원조를 빌미로 소련에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미 1941년 일본과 앞으로 5년 동안은 서로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체결한 후라 미국에게 핑계를 대며 참전을 미뤘다. 하지만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스탈린은 재빨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리품을 챙길 수 있었다.

스탈린은 먼저 만주에 소련군을 집중시켰다. 소련군의 만주 점령은 일본과의 싸움 외에도 마오쩌둥을 지원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소련은 만주에서 철수할 때 행정기구나 시설물 등과 같은 일본의 군사장비를 중국 공산당에게 넘겨줌으로써 마오쩌둥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스탈린이 참전을 결정한 날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어 일본은 완전히 항복했다.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어도 일본의 항복은 필연적이었다. 이 때문에 훗날 역사가들은 소련에게 참전을 요구한 루즈벨트의 판단 착오가 '붉은 곰'만 키웠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여하튼 1945년은 소련이 1917년 혁명 당시의 어수선함과 위기를 벗어나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는 역사적인 해가 되었다. 넓은 국토와 풍부한 인적자원이 밑받침이 되어 가능했지만, 스탈린의 재빠른 정세 판단과 민족주의에 호소했던 그의 뛰어난 전략도 빼놓아서도 안 될 부분이다.

혁명 이후의 사회와 문화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후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사회 전반에 걸쳐 소비에트적인 문화양식이 뿌리를 내림으로써 광대한 면적, 거대한 인구, 다양한 인종적·문화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하나의 국가로 존속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 문화의 주춧돌은 뭐니 뭐니 해도 공산당이었다. 1917년 혁명 당시 2만 5천명에 지나지 않던 공산당원은 1930년대의 대숙청과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뒤에도 계속 늘어났으며, 1960년대에는 1천만 명을 넘어섰다. 공산당은 모든 사회조직에 있어서 공산주의라는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국민과 집단을 교육하고 지도했다. 그리고 점차 공산당 당원이라는 사실 자체가 지위를 나타냈으며 권위 있는 표식이 됐다.

소련 공산당은 매우 철저하게 조직화됐다. 공장, 집단농장, 학교, 군사조직 등 소련의 공산당 조직은 3명 이상의 공산주의자가 있는 곳은 어디서나 결성될 수 있는 초급 당 조직, 즉 세포조직부터 시작하여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 마침내 소비에트의 주요 행사로 기록되는 당 대회와 상설기구인 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정치국에 이른다.

러시아 혁명은 공산당을 권력의 지위로 부상시킨 반면 전체 사회계급은 붕괴시켰다. 오랜 시간 동안 러시아의 최고 집단으로 군림해온 지주층은 1917년에서 1918년 사이에 급속히 사라졌으며 농민들은 그들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금융, 산업, 상업계의 상층 부르주아들도 5개년 계획의 실시와 더불어 붕괴되었다.

소련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농민이다. 1928년의 경우 농촌인구가 총인구의 82퍼센트를 차지했고, 공업화와 도시화를 거친 후인 소련 붕괴 전까지만 해도 전체 인구의 약 50퍼센트가 농촌인구였다. 소비에트 농민은 5개년 계획에 헌신적으로 일했지만 그 대가는 극히 미미했다. 스탈린 사망 후 흐루시초프 같은 지도자는 농촌의 암담한 상태를 인정했으며, 1956년 언론이 비교적 자유를 누렸던 얼마 동안 작가들은 이들의 삶을 표현해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농촌 지역은 일련의 정책과 계획에도 불구하고 빈곤 상태에 머물렀다.

볼셰비키 혁명 덕에 다방면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집단은 산업 노동자였다. 혁명은 분명히 노동자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당 간부, 적군 장교, 심지어는 집단농장의 조직책까지 되는 등 사회적으로 신분이 상승됐다.

혁명 이후 소련의 발전을 가져온 공로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 제도의 향상이었다. 교육은 소련의 경제와 기술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 볼셰비키 혁명 시기에는 러시아 국민의 절반 정도만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더욱이 내전 동안에는 기아, 질병으로 인한 혼란이 문맹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권은 1922년부터 어린이를 위한 학교 설립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문맹퇴치를 위해 대대적인 교육정책을 실시했다.

소련의 교육은 암기와 복습을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든 과제를 제대로 이행하려면 하루에 280페이지 정도를 읽어야 했다. 소련의 학교는 특히 수학과 과학 교육에 치중했다. 이런 과정 속에 과학은 특별 영역으로 남았다. 과학은 소련이 추구했던 군사적, 기술적, 경제적으로 최강국이 되는 필수요소였다. 그 결과 1957년에 발사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달 우주선 발사, 원자 및 수소폭탄 제조 등을 가장 먼저 이룰 수 있었다. 당시 소련의 과학 수준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이 시대 소련의 문학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충실했다. 이것은 푸시킨이나 톨스토이가 나타내려고 했던 삶 자체의 사실적인 묘사가 아닌 혁명 이념이나 정부가 필요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작가들은 비판은 없고 지시된 계획에 따라야만 했다. 이에 반항하는 작가는 총살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됐다. 예세닌이나 마야코프스키 같은 작가는 자살했다. 《닥터 지바고》를 쓴 파스테르나크도 예외없이 추방당했다. 한편 《고요한 강》으로 유명한 솔로호프 등은 정부의 요구에 따르면서 좋은 작품을 쓰려고 노력했으나 몇 번씩 수정판을 내는 고충을 겪었다. 결국 소련의 문학은 고리키 이후부터는 제 빛을 잃고 긴 동면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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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묵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에서 사학을 공부하였고, 동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했다. 논문에는 <볼셰비키 집권 원인에 관한 고찰>, 저서로는 <이야기 러시아사> 등이 있다.

출처

이야기 러시아사
이야기 러시아사 | 저자김경묵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러시아는 동양과 서양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전통 문화를 동시에 흡수하여 특유의 정서와 사상, 전통과 문화를 발전시킨 나라이다. 고대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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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스탈린 시대의 개막이야기 러시아사, 김경묵,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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