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954년 |
---|
도시 환경에 대한 사람의 정서적 반응은 체험 내용과 삶의 배경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생태계의 훼손과 파괴, 왜곡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부정적 양상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종말론적 위기 의식에 닿을 때가 많다. ‘도시시’나 ‘문명 비판시’에서 다루어지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테면 ‘세속 도시’의 내면을 꼼꼼하게 살피고 그 의미를 복원하는 시적 탐색의 길을 걸어온 최승호(崔勝鎬, 1954~ )의 『세속 도시의 즐거움』에는 일일이 늘어놓기 어려울 만큼 현대 도시 문명을 뒤덮고 있는 온갖 병적 현상, 죽임과 죽음의 문화 체험에서 비롯된 공동(空洞), 괴기한 죽음이 가득 차 있다.
최승호는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교육대학을 졸업한다. 그는 1977년 『현대시학』에 「비발디」 등의 시를 추천받아 문단에 나온다. 강원도 사북 등지에서 초등 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최승호는 1982년에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까지 『대설주의보』(1983) · 『고슴도치의 마을』(1985) · 『진흙소를 타고』(1987) · 『세속 도시의 즐거움』(1990) · 『회저의 밤』(1993) · 『반딧불 보호 구역』(1995) · 『눈사람』(1996) · 『여백』(1997) · 『그로테스크』(1999) 등의 시집을 펴낸 바 있다. 이처럼 꾸준히 시를 쓰는 동안 그는 1985년 제5회 ‘김수영 문학상’, 1990년 제2회 ‘이산 문학상’을 받는다.
첫 시집 『대설주의보』에서 시골의 삶을 단아하면서도 날카로운 틀에 담아 보여준 최승호는 두 번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음울함으로 감싸여 있는 도시의 삶을 형상화하는 데 힘쓴다. 이는 삶의 배경이 강원도 두메에서 도시 문명의 병폐와 부정적 기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서울로 바뀐 시인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춘천과 부천에서 쓴 몇 편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서울에서 씌어”졌다는 시인 자신의 고백이 없더라도 『고슴도치의 마을』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허용하지 않고 헛된 반복과 미궁 속에 빠뜨리거나, 생명의 본래적 활기를 빼앗고 자꾸 박제화하는 도시에서의 부정적 체험이다. 시인은 도시적 삶의 부정적인 편린들을 지적으로 통제된 정확한 소묘의 구문 속에 담아내고 있다. 우리가 그의 시에서 들썽거림이 아니라 단단한 무엇을 느낀다면, 어떤 대상이든지 철저하게 객관화하는 그 소묘의 선이 보여주는 적확성 때문일 것이다.
그늘 없는 곳이 사막이라고 / 중얼거리는 서울의 햇빛 // 무교동에서 보았다 공 치는 남자 / 뙤약볕 속에 공 치는 남자를 / 배꼽에 / 긴 고무줄이 달린 공은 / 치면 고무줄이 늘어나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 다시 날아왔다 공은 / 일거리는 / 치면 허공으로 날아갔다 / 다시 탄력 있게 날아왔다 / 뙤약볕 속에 뻘뻘 땀을 흘리며 / 라켓을 쥐고 공 치는 남자의 / 말없는 동작은 / 지루하고 외롭게 반복되고 / 배꼽에 긴 고무줄을 단 테니스 공은 / 잘 팔리지 않았다 // 저렇게 열심인 노동의 대가가 없어서야 / 공 치는 직업의 남자는 / 정말 공치는 남자라고 / 시간이 늘어났다 줄어드는 고무줄의 선들로 메워진다고 / 중얼거리는 서울의 햇살 아래최승호, 「조명된 남자」, 『고슴도치의 마을』(문학과지성사, 1985)
도시 한복판에서 “공치는 남자”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이 시의 심층에 숨어 있는 의미망은, “놀라울 것 없는 이 평범한 삶이 /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새장 같은 얼굴을 향하여」)는 구절이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로, 평범한 삶의 진상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다. 그가 들여다본 도시적 삶의 밑바닥에는 “지루하고 외롭게 반복되”는 행위에 매달리는 생활 양식이 깔려 있다. 이런 행위가 노동의 양상으로 이어지면서도 대가조차 제대로 따르지 않을 때 삶은 자꾸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그 권태로운 반복, 그 무의미의 발견이 일으키는 경이로움은 그의 시적 인식의 단초를 이루곤 한다. 「자동판매기」 · 「앵무새」 · 「나무말」 같은 시에서 한결같이 흘러나오고 있는 현실 인식 또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자동화 · 획일화 속에 함몰되어버린 삶의 무서운 비극성이다.
세속 시대의 도시적 삶의 병적 징후들을 차가운 객관주의로 묘파한 최승호의 『고슴도치의 마을』 · 『진흙소를 타고』는 1980년대의 한국 시문학이 거둔 의미 있는 성과다. 한 비평가는 이즈음 그의 시를 두고 “도시화 현상에 대한 정직한 문학적 반응”(유종호)이라고 지적한다. 『대설주의보』에 나타난 자아 / 자연 사이의 긴장과 대립에 대한 사실적 관찰과 형상화에서, 자아 / 도시로 관심의 무게 중심이 이동한 것은 그의 삶의 공간이 시골에서 서울로 바뀌면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변화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소비 체계의 공간적 집중과 팽창을 특징으로 하는 20세기 후반기의 서울은 도시 문명의 온갖 부정적 양상을 품고 있는 삶의 현장이다. 최승호의 시 세계는 1970년대 이래 급격하게 진행된 농경 사회 구조의 해체와 후기 산업 사회로의 구조적 변동이 한데 엉긴 과도기의 한국 사회를 그 물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서울은 그 해체와 변동의 총체다. 최승호는 도시적 삶의 병적 징후를 “오렌지 쥬스를 마신다는 게 /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 습관의 무서움이다”(「자동판매기」)에서처럼 일상적 체험의 세목을 통해 읽어낸다. 자동판매기 앞에서 의지와 달리 커피 버튼을 눌러버린 인간의 손은, 자동화된 습관에 지배되는 도시적 삶의 부정적 면모의 한 예시다.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 자동판매기를 / 매춘부(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 황금(黃金) 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 그대가 돈의 권능(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 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 /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 십자가(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 신(神)의 오렌지 쥬스를 줄 것인가최승호, 「자동판매기」, 『고슴도치의 마을』(문학과지성사, 1985)
자동판매기는 자아―욕망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매춘부다. 그것은 또 물신주의라는 20세기 새로운 신의 복음과 구원까지 파는 황금 교회이기도 하다. 물론 그 쾌락 · 구원은 돈의 권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자동판매기 뒤에는 돈을 긁는 포주가 버티고 있다. 포주는 인간의 자아―욕망을 조작하고 통제해 이윤 추구를 극대화하는 자본주의의 생리 그 자체다. 부패한 자본주의는 인간의 자동화된 습관을 조작해 끊임없는 가짜 욕망을 창출해낸다.
그 가짜 욕망이 추구하는 바 끝은 어디인가. 「썩는 여자」는 부패한 자본주의의 가짜 욕망을 따라간 한 여자의 삶을, 내부로부터의 싸움과 곪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지하생활자가 되어 간다 / 지하철을 타고 지하상가의 많은 물건들을 / 방에다 가득 채우는 그녀의 머리에 / 끈끈한 음지식물들이 자라는 것을 / 나는 보고 있다 그녀는 / 지하생활자가 되어 간다 습기와 시멘트 냄새, / 하수구의 악취, / 그녀의 살가죽은 눅눅하고 퀴퀴하게 / 속으로부터 썩으며 곪고 있지만 아직 / 구멍이 난 것은 아니다 새끼들을 치고 / 부엌에 나타나 뻘뻘거리는 / 쥐며느리, 바퀴벌레, 그리마 / 축축한 벽지를 들고 일어나는 곰팡이와 / 그녀의 싸움은 결국 곰팡이들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최승호, 「썩는 여자」, 『고슴도치의 마을』(문학과지성사, 1985)
“습기와 시멘트 냄새, 하수구의 악취”들, 그리고 생활 공간의 구석진 곳에서 서식하는 온갖 해충은 도시적 삶의 외관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삶을 일그러뜨리는 도시의 부정적 요소들에 대한 가시화에 다름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중얼대다 잠”드는 여자의, 삶의 전망 없음은 1980년대 시인들의 속 깊은 비관주의를 보여준다.
그는 「네모를 향해서」에서 규격화된 도시적 삶에 수동적으로 길들여지고 얽매이는 인간의 실상을 그린다. 또 「붕붕거리는 풍경」에서는 도시적 삶이 비이성적 속도와 귀가 먹먹해지는 소음에 싸여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미친 속도로 질주하는 “욕망의 바퀴”들이 궁극적으로 고철을 향해 가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가짜 욕망의 헛된 추구를 비웃기도 한다. 이처럼 그의 시는 순결한 자아 / 타락한 도시라는, 대립과 긴장의 구도로 1980년대 도시적 삶의 환부를 해부한다. 통제된 감정, 사실적 언어, 잘 짜여진 시적 구조는 그 해부의 유용한 조건들이면서, 최승호 시의 돋보이는 개성이기도 하다.
1990년께부터 도시의 삶에 대한 시인의 비관과 절망은 한결 깊어진다. 이즈음 펴낸 『세속 도시의 즐거움』은 머지않아 인류에게 닥칠 환경 괴멸의 재앙을 예언하는 시집이다. 환경 괴멸은 자본의 재생산과 축적 자체를 아예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에 우리를 빠뜨릴 것이다. 환경 괴멸은 인체에도 회복 불능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이내 생태계의 파국을 부르게 된다. 시인은 환경 괴멸의 징후를 “무뇌아”라는 이미지를 통해 전달한다. 무뇌아란 반성 없는 인류에 의한 환경 오염의 누적과 확산의 결과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자연의 반생명성에 대한 끔찍스런 표상이다. 무뇌아의 세계란 인성(人性)을 파괴하는 그로테스크한 도시 / 문명 속에서의, 최승호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뜻없음으로 부풀어 있는 “무인칭의 삶”들만 걸어다니는 세계다. 결단나버린 생태 환경은 그 결과와 책임을 인간에게 “죽음”으로 되돌린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 정수리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댄다.최승호, 「공장지대」, 『세속 도시의 즐거움』(세계사, 1990)
‘공장 지대’는 무엇보다 뚜렷한 산업화의 상징적 약호다. 공장은 독점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생산 설비의 상징이며, 동시에 환경 오염 또는 환경 파괴의 원인이 되는 폐수, 폐가스, 산업 폐기물 같은 공해 물질의 배출처다. 자본주의적 축적과 발전의 미명 아래 오염 물질을 자꾸 내놓으면 대규모의 환경 파괴가 일어나고, 이는 마침내 자본 축적과 재생산의 토대인 환경을 괴멸시킨다.
「공장지대」 같은 시편에서 그는 한결 직접적인 언술로 생명의 체계를 파괴하는 산업화의 폐해와 관련된 환경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산모는 무뇌아를 낳고”, “젖을 짜면 폐수가 흘러내리고”, “정수리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대”는 이 그로테스크한 그림은 우리 시대의 삶과 생명이 처한 형편에 대한 날카로운 상징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섬뜩한 반생명의 이미지들은 환경 오염이 생태계와 인류의 앞날에 가져다 줄 죽음과 재앙을 경고하는 시인의 전언을 담고 있다.
인간의 정서는 황폐해지고, 자꾸 정수리털을 뽑아대는 파괴적 자학은 그 황폐한 인간 정서의 상징이다. 그 끔찍함은 일체의 전망 자체를 무화시켜버리는 시인의 도저한 비관주의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여기서 환경을 살리고, 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삶의 대안적 양식에 대한 어떤 희망적인 전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시집 전체를 봐도 전망 대신 도시 / 환경의 삶의 양식 이면에 감추어진 극한의 불모성과 파멸의 징후를 읽어내는 시인의 차가운 비관주의만 돌출해 있다. 시인이 제시할 수 있는 전망은 생명성의 희원(希願)과 결부된 전망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전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죽음과 불모의 현실성만 차갑게 제시할 뿐이다. 인간의 바닥 없는 욕망에 대한 절망 때문일까, 비극적 세계관에 대한 시인의 본능적 친화 때문일까.
도시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삶의 거의 유일한 지평이다. 2000년대 문학의 도시 / 환경 주제에 대한 접근은 환경 오염 또는 환경 파괴 같은 가시적 현상에 대한 주체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도 다루어질 것이나, 한편으로 도시 / 환경 문제와 겹치는 우리 사회의 여러 모순과 함께, 이런 것이 인간의 내면과 자아에 가하는 비가시적 억압성과 부정적 양상에 대한 탐구라는 방향에서 활발하게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그렇듯이 도시 / 환경 문제는 그 자체로 따로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해 있는 갖가지 사회 모순과 복합적으로 연결되고 중첩된다.
「복면의 서울」은 생태 환경의 위기와는 결이 다르지만, 도시적 삶의 양식이 안고 있는 또다른 문제, 즉 삶의 익명성, 자아의 고립, 강박 관념적 불안 등을 다루고 있는 시편이다.
하루에도 너댓번씩 전화가 온다 / 그는 늘 말이 없다 / 나의 목소리를 듣기만 한다 /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은데 /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 자신을 숨은 신이라 생각하는 정신병자? / 밤중에도 새벽에도 전화가 온다 / 그녀인지도 모르겠다 / 내 애를 낳았다고 주장하던 / 결혼 전 그 거머리 여자는 아닌지 / 집으로도 사무실로도 전화가 온다 / 저쪽은 늘 말이 없다 / 내가 있는지 없는지 듣기만 한다 / 혹시 나를 뒷조사해 컴퓨터로 읽고 있는 / 전지전능한 형사는 아닌지 / 나는 불안에 끄달리기 시작한다 / 저쪽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 모든 전화기들이 복면을 쓰고 일어나 / 나를 둘러싸고 킬킬대는 밤 / 전화선을 뽑아버린다 / 불통의 밤 / 벽이 나를 막아주는 밤 / 잡귀(雜鬼)들은 무심(無心)으로 물리쳐야 한다고 나를 달래며 / 사악해지는 밤 속에서 / 한결같은 달빛을 쳐다본다최승호, 「복면의 서울」, 『세속 도시의 즐거움』(세계사, 1990)
전화라는 통신 수단 자체가 자신을 익명성 속에 묻어두고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도구다. 마음만 먹으면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도, 마음먹은 쪽에서 철저하게 복면을 쓰고, 즉 익명성 속에 숨어 상대방을 가해할 수 있는 폭력의 도구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전화와 도시적 일상 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전화 벨이 울려 수화기를 들면 저쪽에서는 아무 말도 없다. 그러다가 뚝 끊어지고 만다.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전화를 통해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시적 자아에게 전달된다. 전화선의 저쪽에 숨어서 ‘나’를 괴롭히는 ‘그’는 누구인가.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익명성 속에 숨어 있다. 그는 “자신을 숨은 신이라 생각하는 정신병자?”, 아니면 잡귀(雜鬼)? 공동체적 유대감이 사라져버린 세계 속에서 타자는 모두 잠재적인 정신 병자이거나 잡귀다. 그가 누구이든 도시 환경의 사회 구조가 대규모로 파생시킨 익명성 속에 숨어 타자를 괴롭히는 그는 가해자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 불안과 강박 관념적 소외 의식에 빠져 있는 병든 주체임에 틀림없다. 병든 주체라는 점에서 그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가련한 피해자다.
연탄재 담은 상자를 안고 / 문을 나선다 죽음의 경계선을 / 넘은 뒤에 누가 내 불꺼진 뼈들을 절굿공이로 빻을 것인지 / 눈구멍에 겨울 해 불타고 / 혀 없는 석양천(夕陽天)이 / 분홍색 뱀꼬리 햇살을 삼키는 저녁 / 상자에서 식은 해골들이 / 굴러떨어지며 / 부스스 먼지를 일으킨다최승호, 「저녁의 상자」, 『세속 도시의 즐거움』(세계사, 1990)
위의 시는 예전에 서울의 골목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었던 연탄재를 버리는 일상적인 삶의 한 풍경을 간명하게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풍경에서조차 시인의 상상력은 “죽음”으로 치닫는다. 용도를 다한 연탄재에서 시인은 활동을 그친 개체의 죽음을 보고 “누가 내 불꺼진 뼈들을 절굿공이로 빻을 것인지”를 상상한다.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연탄재는 곧바로 “식은 해골”이라는 영상으로 태어난다. 죽음은 최승호 시 세계의 시작이고 끝이며, 시인의 의식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원체험이다. 시인의 상상력의 근저는 갖가지 죽음의 형상으로 꽉 차 있다. 무의미와 허망함으로 가득 차 있는 삶이 그렇듯이 죽음도 하나의 ‘환(幻)’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환(幻)으로 배 불러오는 욕정과 / 환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있다최승호, 「세속 도시의 즐거움 Ⅰ」, 『세속 도시의 즐거움』(세계사, 1990)
환은 매혹적인 것, 가상의 세계다. 그러나 그 본질은 헛것, 신기루, 거대한 무의미의 공동(空洞)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물신화된 도시 시대의 인간 욕망이 만들어낸 뜻없음으로 부풀어오른 가짜―천국, 즉 거짓 만족 · 향유 · 행복의 헛구렁이다. 세속화된 도시 속에서 시적 자아는 “환인 줄 알면서 환에 취해” 환을 한없이 쫓아가며 환에 몰입한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 속에서 유통되는 상품들을 사들일 때 사람들은 단순히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광고에 의해 상품에 부여된 헛된 수사(修辭), 즉 ‘환의 이미지’, 만족 · 향유 · 행복의 상징을 산다. 환의 헛구렁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환은 도시적 삶의 밑바닥에서 커다란 아가리를 벌린 채 우리가 거기로 빠져들기를 기다리는 하나의 함정이다.
환은 최승호의 시에서 올라가도 내려가도 거대한 수렁 속에 빠졌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엘리베이터로(「엘리베이터 속의 파리」), “미치고 싶거나 죽고 싶은 사람들이 / 구멍을 찾는다 구멍 속 수렁에 / 온몸을 쑤셔넣는다”(「아이쿠 사막」)에서처럼 구멍으로, 숟가락의 움푹 팬 부분으로(「밥숟갈을 닮았다」), 귀뚜라미가 빠진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거대한 변기(「변기」)로 구체적 이미지를 얻으며 변용되기도 한다. 심지어 시인은 더 직접적으로 “변기의 소용돌이 뒤에 / 마지막 물 빠지는 소리는 / 왜 이리 크윽크윽 / 죽음의 트림 소리로 들리는지”(「거품좌의 별에서」)라고 세속 도시의 실존을 거대한 변기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으로 묘사한다. 김현은 이런 최승호의 시 세계를 두고 “거대한 변기의 세계관”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각주1)
움푹해라 내 욕망은 / 밥숟갈을 닮았다 / 천만 개의 숟갈이 한 냄비에 덤비듯 / 꿀꿀거리고 덜그럭대는 서울에서 / 나도 움푹한 욕망 들고 뛰어가고 / 보름달 뜨면 먹고 싶어라 / 둥근 젖 / 움켜쥘 그때부터 나는 아귀였던가 / 부르도자가 움푹한 입 벌리며 굴러가고 / 기름진 돼지 머리가 / 웃고 있는 좌판 위의 서울 / 움푹해라 뒤뚱거리는 영혼도 / 밥숟갈을 닮았다 / 죽어서도 배가 부르게 해주십사 / 거위 주둥이를 벌린다최승호, 「밥숟갈을 닮았다」, 『세속 도시의 즐거움』(세계사, 1990)
인간의 욕망이란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 또는 “욕망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욕망은 세계를 향한 존재의 자기 표현으로서의 삶의 충동과 본능, 그 역동적 에너지, 또는 사회적 의미 발현의 인간적 조건이다. 흔히 인간의 노동은 그 욕망의 충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밥숟갈을 닮았다」가 말하고 있는 욕망은 현대의 병든 욕망, 타락한 욕망이다. 시인은 숟가락의 움푹 팬 형태적 특성과 음식을 떠먹는 기능에 주목해 인간의 욕망을 밥숟갈과 연관시킨다. 그 발상 자체에 이미 인간 욕망의 본질에 대한 지적 통찰이 들어 있다. 움푹 팬 숟가락의 단단한 형태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영원히 빈 형태다. 인간의 욕망도 이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구조를 가진 인간의 영혼은 “뒤뚱거리는 영혼”이다. 뒤뚱거린다는 것은 자기 조정 기능을 잃어버린 주체의 삶의 부조화성, 불구성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다. 후기 산업 사회의 인간이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의 적지 않은 부분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병든, 과도한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이 작품의 내면 속에 숨어 있는 시인의 전언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사건의 개요
- ・ 도정일, 「다시 우화의 길에 선 시인을 위하여」,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민음사, 1994
- ・ 이남호, 「상처받은 마음의 변증법」, 『녹색을 위한 문학』, 민음사, 1998
- ・ 이광호, 「환멸의 시학」, 『위반의 시학』, 문학과지성사, 1993
- ・ 박혜경, 「성속(聖俗)의 하나됨, 혹은 선적(禪的) 부정의 정신」, 『상처와 응시』, 문학과지성사, 1997
- ・ 김우창, 「관찰과 시」, 『대설주의보』 해설, 민음사, 1983
글
출처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과 한국인의 생활사, 문화사의 궤적을 함께 추적한다. 20세기를 연도별로 나눠 매년 그해에 일..펼쳐보기
전체목차
- 주요 사건 : 6·10 국민 대회 결의문
- ‘여성성’의 드러냄과 자기모색
- ‘월경의 피’로 쓰는 시
- 도시시의 계보학
한국문학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최승호 –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4, 장석주, 시공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