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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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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1년 |
1919년 동인지 『창조』를 내고 여기에 단편 「약한 자의 슬픔」 · 「마음이 여튼 자여」 · 「피아노의 울림」 등을 선보인 김동인은 1921년에도 『창조』 9호에 단편 「배따라기」를 비롯해 「목숨」 · 「연산군」 · 「전제자」 · 「딸의 업(業)을 이으리」 등을 잇달아 쏟아낸다.
전설에서 소재를 따온 작품 「배따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조그만 어촌 마을에 우애가 깊은 두 형제가 살아간다. 얼마 전 형은 장가를 들고 새 식구로 들어온 형수 덕분에 집안 분위기는 더욱 화기 애애하다. 그러나 점차 형은 아내와 아우 사이를 의심하게 되고, 부부 싸움이 잦아진다. 어느 날 장에서 아내에게 줄 거울을 사들고 집에 들어서던 형은 옷 매무새를 흐트러뜨리고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다. 방안에 들어온 쥐를 잡으려다가 그렇게 된 것임에도 형은 오해한 나머지 두 사람을 두들겨패고 아내를 쫓아낸다. 며칠 뒤 바닷가에 아내의 시체가 떠오르고 아우는 마을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제서야 잘못을 깨달은 형은 뱃사람이 되어 떠돌다가 난파당해 잠시 아우의 간호를 받는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아우는 이미 떠나버리고 없다. 그 뒤 형은 20년이 넘게 배따라기 노래를 부르며 이리저리 아우를 찾아 떠돈다.
김동인이 ‘본격 단편 소설’이라고 자신 있게 내놓은 「배따라기」는 운명적인 삶의 행로를 낭만주의 수법으로 그려낸 점에서 초기의 「약한 자의 슬픔」이나 「마음이 옅은 자여」와 같은 궤도에 놓을 수 있다. 다만 이 작품은 구성이 치밀하고 줄거리가 복합 구조 속에 녹아들어 초기 작품에 비하면 단편 소설로서의 완결성이 한결 돋보인다.
『창조』는 「배따라기」가 실린 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며, 그 동안 잡지 발행에 과도한 지출을 한 김동인은 서서히 파산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이 무렵 결혼 생활의 권태와 사랑에 따른 시련 등으로 말미암아 명월관 같은 곳을 전전하며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낸다. 그러다가 1923년 단편 「이 잔(盞)」과 「태형(笞刑)」 등을 발표하고, 이듬해인 1924년 8월 『창조』의 후신인 『영대(靈臺)』를 창간한다. 여기에 단편 「유서」를 발표한 그는 1925년 1월 『조선문단』 4호에 단편 「감자」를 발표하는 등 차츰 기운을 되찾는다.
「감자」와 「광염 소나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 소설의 대표적 성과로 꼽히는 「감자」는 농부의 딸 복녀가 가난 때문에 열다섯 살 때 80원에 팔려간 뒤의 파란 만장한 인생 역정을 그린 작품이다. 복녀는 남편이 무능하고 게으른 탓에 막벌이와 행랑살이, 빈민굴을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돈 몇 푼에 거지에게 몸을 팔기도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복녀는 어느 날 밭에서 감자 한 바구니를 훔쳐 나오다가 중국인 주인에게 들키고 만다. 그러나 벌 대신에 중국인 왕 서방에게 몸을 내주고 돈 3원까지 받아 집에 돌아온다. 그 뒤로도 복녀는 왕 서방과 계속 관계를 가진다. 얼마 뒤 왕 서방이 돈을 주고 사온 처녀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복녀는 이에 질투를 느낀 나머지 처녀를 죽이려고 왕 서방네로 찾아간다. 그러나 왕 서방의 낫에 찔려 오히려 복녀가 죽고 만다. 왕 서방은 복녀의 남편에게 돈 30원을 주어 시체를 암매장시키고, 이로써 복녀의 죽음은 은폐된다.
이광수 소설류의 지식인 주인공과 평이한 결말에 익숙하던 차에 복녀라는 파격적 인물의 설정, 대담하고 직설적인 속어와 방언의 활용, 예기치 못한 사건과 결말은 당대 문단과 독자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준다. 아울러 이 작품은 식민지 사회에서 한 인간의 삶과 도덕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치밀한 구성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리얼리즘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가난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에 일기 시작한 신경향 소설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이지만, 작가는 같은 소재를 갖고서도 도식적이고 딱딱한 신경향 소설류와 달리 작품 속에서 변화와 재미를 연출한다. 여러 측면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인 단편 소설 「감자」는 김동인의 대표작이다.
「감자」 이후 김동인은 『영대』를 통권 5호로 끝맺게 되고, 이듬해인 1926년 평양에서 남은 돈을 갖고 수리 사업에 손을 대지만 얼마 못 가서 파산한다. 그 뒤 누이동생 소유인 평양의 집에 부인과 아이를 남겨둔 채 서울로 온 그는 종로에서 하숙을 하며 한동안 마작에 빠진다. 1927년에는 대동강 ‘매생이’라는 배에서 한 달 동안 낚시질에 매달려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내는 집을 나가버리고, 곧 아내를 찾으러 일본으로 가지만 딸만 데리고 돌아온다. 1928년 그는 영화 사업에 손을 대지만 또 실패한다. 그는 이윽고 창작으로 관심을 되돌려서 1929년 「여인」과 「송동이」를 발표한다. 이어서 『동아일보』에 최초의 장편 역사 소설 「젊은 그들」을, 『중외일보』에 역시 장편 「대평행(大平行)」을 연재하는 한편, 소설론인 『조선 근대 소설고』도 발표한다.
1930년에 들어 김동인은 파산과 부인의 가출로 인한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죄와 벌」 · 「배회」 · 「증거」 · 「순정」 · 「구두」 · 「포플러」 · 「신앙으로」와 예술가의 생애를 탐미적으로 그린 「광염(狂炎) 소나타」 · 「광화사」 등을 잇달아 내놓는다.
「광염 소나타」는 소설 속의 작중 화자인 K가 친구의 아들인 한 젊은 음악가로부터 받은 편지를 또 다른 친구에게 읽어주는 다층적인 형식을 취한 일종의 ‘액자 소설’이다. 음악 비평가 K의 친구 아들인 작곡가 백성수는 범죄 행위 끝에 오는 흥분과 쾌감을 통해서만 작곡을 할 수 있는 특이한 체질이다. 이마적에 마을에서 일어난 여러 방화 사건은 모두 그의 짓이며, 이런 범죄의 결과로 그는 광염 소타나를 작곡하게 된다. 그러나 점차 방화 같은 가벼운 범죄 행위에 만족할 수 없게 된 백성수는 살인까지 생각하고, 마침내 감옥에 들어간다. 이와 같은 편지의 내용을 듣고 난 K의 친구는 예술가라도 죄를 지으면 마땅히 벌을 받야야 한다고 자기 의견을 말한다. 이에 K는 광인이자 천재인 백성수를 옹호하는 예술관을 피력한다.
천년에 한 번 만년에 한 번 날지 못 날지 모르는 큰 천재를 몇 개의 변변치 않은 범죄를 구실로 이 세상에서 없이 하여 버린다 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 적어도 우리 예술가에게는 그렇게 생각됩니다.김동인, 「광염 소나타」, 『삼천리』(1930)
진정한 예술을 위한 것이라면 광적인 범죄 행위도 용인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백성수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K의 예술관은 바로 작가 김동인의 예술관에서 발현된 것이다. 김동인의 이런 가치관을 역으로 거슬러오르면 꼭대기에는 이광수가 자리잡고 있다. 즉, 김동인의 온 생애에 걸친 문학적 지표는 도덕성에 입각한 이광수의 교화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한 자의 슬픔」 · 「마음이 여튼 자여」 · 「배따라기」 등에서 보인 낭만적 예술 지향성, 「감자」에 나타난 비윤리성, 그리고 「광염 소나타」 · 「광화사」 등의 탐미주의 경향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예술의 본질 자체를 파헤치기보다 지나치게 이광수 문학과의 대립 관계를 드러내는 쪽으로 개념을 파악하고 형상화한 나머지 일쑤 현실성을 잃고 만다. 말하자면 김동인 또한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또 이광수가 신문에 연재한 역사 소설에 대해 비난을 하던 그 자신도 생활고는 어쩔 수 없었는지, 1931년 대원군의 삶을 그린 「젊은 그들」 등을 기점으로 역사물 · 야담류와 흥미 위주의 소설을 써낸다. 이로 말미암아 김동인은 역사 의식이 결여된 ‘감상적이고 권선 징악적 우국 지사의 사관’에서 탈피하지 못한각주1) 작가로 비판받기도 한다.
다산성의 작가
1930년 4월, 김경애와 재혼을 하고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일하게 된 김동인은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다. 이런 까닭인지 창작 욕구가 분출해 그는 장편 소설집 『여인』을 펴내고, 곧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 · 「거지」 · 「잡초」 · 「박 첨지의 죽음」, 장편 「대수양」 등을 잇달아 내놓는다.
염상섭을 모델로 한 작품이라는 시인 김억의 실언으로 한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 「발가락이 닮았다」의 주인공 M은 서른두 살 난 노총각이다. 그는 젊은 시절의 방탕한 생활로 생식 기능에 이상이 있는 남자다. 친구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한 뒤 소식이 없던 그가 2년이 지난 어느 날 작중 화자를 찾아온다. 기관지를 앓는 갓난쟁이를 안고 온 M은 아기가 자기 증조부와 자기를 닮았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가운뎃발가락이 유난히 긴 것이 닮았다면서 친구에게 동의를 구한다. 한편으로는 아내를 의심하면서도 그것을 어떻게든 덮어버리고 자신의 아이로 인정받아 보려는 M의 처절한 모습, 이를 지켜보며 의사인 작중 화자는 M에게 “발가락뿐 아니라 얼굴도 닮은 데가 있네.” 하면서 돌아앉는다.
1932년 들어 김동인은 「붉은 산」 · 「적막한 저녁」 · 「삼천리」 등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에 장편 「아기네」,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며, 동시에 「해지는 지평선」 · 「화중나무」를 발표한다. 1934년 『삼천리』에 발표한 평론 「춘원 연구」를 통해 그는 이광수의 교화적인 문학을 비판하며 순수 예술 지향적인 문학을 옹호한다. 그는 여기에서 “소설가는 인생의 회화(繪畵)는 될지언정 그 범위를 넘어서서는 안 되는 것이며 될 수도 없는 것이다.”라고 객관적이면서도 독자성에 입각한 작가론을 펼친다. 이듬해 단편 「왕부(王府)의 낙조」를 발표하고 『야담(野談)』을 발간하며, 1936년에는 조선서관에서 『이광수 · 김동인 소설집』이 나온다.
이 무렵 한동안 잠잠하던 불면증의 재발은 어쩔 도리가 없어 그는 약에 기대다 못해 마약까지 복용한다. 게다가 신경통까지 겹쳐 영변과 구미포 해수욕장, 양덕 온천 등지로 휴양을 다니며 쉰다. 그 뒤 1938년 『조광』에 장편 「제성대(帝星臺)」를 연재하고, 단편 「가신 어머님」 · 「가두(街頭)」를 발표한다.
김동인은 소년 시절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으로 끝난 메리라는 혼혈 여성 이후, 1918년에 결혼을 하고서도 일본 여성과 기생 등 수많은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자신은 호색가이면서도 상대방에게는 요조 숙녀식의 여성상을 강요하는 가부장적인 남성상의 표본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신여성입네 하며 문화계의 전면에서 활동하던, 성적으로 자유 분방한 태도를 취한 여성 문사들에 대해서는 혐오 이상의 감정을 품는다. 1939년에 그는 실존 인물인 여성 작가 김명순을 모델로 한 소설 「김연실전」을 통해 이런 면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김동인은 한때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박영희 · 임학수 등과 함께 일제의 전쟁 수행을 돕는 ‘황군위문작가단’에 파견되어 만주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나 1942년 『삼천리』에 ‘임전보국단’을 비난하는 글을 내놓아 ‘천황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어 석 달 동안 옥살이를 한다.
해방 뒤에는 1946년부터 『태양신문』에 장편 「을지문덕」을 연재하다가 뇌막염으로 중단하지만, 잠시 회복된 듯 1948년에는 단편 「망국인기(亡國人記)」와 「반역자」 등을 발표한다. 그러나 다시 이 해 6월에 병석에 눕게 된 그는 반신 불수가 된 채 6·25 때 피난도 못 가고 1951년 1월 5일 서울 홍익동 집에서 숨을 거둔다.
일생 동안 공백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을 쓴 김동인에 얽힌 일화는 적지 않다. 그는 추고(推敲)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여서 쪽수 매긴 원고지를 묶어 단번에 작품을 완성하며, 저녁 무렵에 시작해 이튿날 아침까지 중편 한 편 정도는 거뜬히 탈고할 만큼 집중력을 보이곤 한다. 그는 다작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신문에 소설을 연재할 때는 여러 회분을 미리 써두는 일이 거의 없어서 당일 아침에 한 회 분량만 써서 신문사로 보내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갈겨 쓴 악필을 알아볼 수 없어서 『조선일보』가 장편을 연재하면서 예전에 그의 글씨를 대해본 적이 있는 『동아일보』의 식자공을 데려다가 쓴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많은 소설을 쓰면서도 작품에 따라 이질적인 소재로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한 그의 작가적 재능은 탁월하다고 하겠다.
김동인은 “예술은 개인 전체”라는 식으로 예술 지상주의에 젖어서 뛰어난 문학가는 인생을 손바닥 위의 ‘인형’처럼 조종해 일종의 “신인 합일(神人合一)을 수행할” 수 있는 우월한 존재로 인식한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이다. 물론 이와 같은 예술가 우월주의는 섣부른 선민 의식의 발로에 지나지 않겠지만, 예술가로서 그가 지닌 개인적 자부심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창조』를 비롯해 『영대』 등 당대의 정점을 이루던 문예지에서 늘 주역으로 활동한다. 일생에 걸쳐 장편 15편 이상과 단편 75편 이상을 발표할 뿐 아니라, 각 작품 속에서 낭만주의 · 자연주의 · 탐미주의 · 사실주의 같은 다양한 경향을 시도한 것도 남다르다. 아직 이광수의 「무정」이 선보인 ‘이다’체에 머물고 있던 초기의 시제에서 훌쩍 뛰어넘어 과거 시제인 ‘였다’체의 도입으로 혁신을 꾀한 작가 또한 김동인이다. 이 밖에 3인칭 서술자의 시점을 사용한 객관성 확립,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 과감한 생략을 통한 박진감 있는 사건 전개, 입체적인 성격의 인물 창조, 구성의 치밀함 등 한 차원 높은 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김동인이 우리 현대 문학사에 남긴 큰 공적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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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이어령, 『한국 문학 연구 사전』, 우석출판사, 1990
- ・ 이형기 외, 『한국 문학 개관』, 어문각, 1988
- ・ 정한숙, 『현대 한국 문학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4
- ・ 윤병로, 『한국 근 · 현대 문학사』, 명문당, 1992
- ・ 김윤식 · 정호웅, 『한국 소설사』, 예하, 1993
글
출처
전체목차
- 주요 사건 : 시일야방성대곡
- 현실은 머금은 ‘토론 소설’ 유행
- 주요 사건 : 포고팔도사민
- 개화의 이념을 담은 신소설
- 주요 사건 : 노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한다
- 문약한 국민은 그 시부터 문약하느니
- 주요 사건 : 의병장 이석용의 공판 기록
- 근대 문학 발전에 기틀이 된 잡지들
- 주요 사건 : 대동 단결 선언
- 마침내 ‘현대’를 머금고 나오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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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김동인 –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1, 장석주,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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