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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백범 김구의 청년시절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한 사건. 1896년 3월 8일, 20세 청년이었던 백범 김구(당시 이름 김창수)가 황해도 안악 치하포의 여관에서 만난 일본인 상인 쓰치다 조료를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군 자객으로 단정하고 살해한 사건으로, 이 사건 이후 투옥 과정에서 김구는 신문명과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백범 김구는 어린 시절 동학농민운동과 교육 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 이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1940년부터는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일제와 맞서 싸웠다. 1945년 8월, 그는 갑자기 닥쳐온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탁통치 반대, 남북단일정부수립을 기치로 이승만과 대립하다가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평생에 걸친 대한독립과 민족통일에 대한 헌신으로 인해 김구는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학계와 네티즌 사이에서 그를 냉정하게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김구가 젊은 날 김창수라는 이름으로 일으켰던 치하포 사건의 진실 여부를 비롯하여 임시정부 주석으로 있을 때 일어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김립 피살 사건, 해방 후 벌어진 장덕수 암살 사건 등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 때문이다. 특히 그의 명성을 만천하에 떨치게 한 치하포 사건은 《백범일기》에서 주장한 대로 국모의 원수를 척결한 쾌거였는지 경무청의 기록대로 우발적인 살인 사건이었는지 여부가 아직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과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일본의 무력 침탈에 분노하다
치하포 사건의 주인공 김구(金九)는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에서 몰락양반가의 후손이었던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김창암(金昌巖)이었는데, 18세 때인 1893년에 동학에 입교하면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했다. 김구란 이름은 37세 때인 1912년에 다시 바꾼 것이다. 아호인 백범(白凡)은 백정(白丁)에서 ‘백(白)’ 자,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凡夫)에서 ‘범(凡)’ 자를 더해 만들었다. 그가 조선의 전통적인 신분제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김구는 동학당의 접주로서 해주성을 공격했지만 패퇴하고 분루를 삼켰다. 그 무렵 조선 조정의 요청을 받은 청군이 아산을 통해 입국하자 톈진조약을 빌미로 대규모 일본군이 부산과 인천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신속하게 서울로 이동한 다음 6월 1일 불시에 경복궁을 점령하여 왕실과 조정을 볼모로 삼고 친일내각의 수립과 함께 갑오개혁을 밀어붙였다.
이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금치 전투를 통해 동학군마저 궤멸시킨 다음 노골적으로 조선 병탄의 야욕을 드러냈다. 이듬해인 1895년, 일본의 위협이 고조되자 명성황후 민씨는 북방의 강대국 러시아를 끌어들여 세력균형을 꾀하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이끄는 일본낭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전무후무한 국모살해 소식을 듣고 분개한 김구는 을미의병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싸웠지만 패퇴하자, 1896년 2월, 조선의 미래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청나라 여행길에 올랐다.
그가 신천을 출발하여 재령, 황주, 중화를 거쳐 평양에 다다랐을 때 시내가 단발령으로 인해 매우 어수선했다. 친일내각의 지시를 받은 관리들은 행인들을 잡아 강제로 상투를 잘랐고, 이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벌어지곤 했다. 한데 그가 안주에 이르자 갑자기 단발령이 중지되고 삼남에서 의병이 봉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갑작스런 정세변화에 긴장한 그는 상황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청나라 여행을 취소하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며칠 후 평안도 용강에 도착한 김구는 나룻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너 치하포(鴟河浦)로 향했다. 한데 한겨울이라 배가 중도에 커다란 얼음덩이에 포위되어 표류하자 그는 승객들을 독려하여 얼음을 밀쳐내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듯 오랜 사투 끝에 치하포 인근 강기슭에 상륙한 일행은 치하포의 여관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치하포 여관에서 왜인을 척살하다
우선 백범 김구가 직접 쓴 《백범일기》를 기초로 이튿날인 1896년 3월 9일에 일어난 치하포 사건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날 아침, 식사를 기다리던 김구는 가운데 방에서 잠을 자고 나온 한 남자를 보고 버럭 의심이 일었다. 한복에 단발을 하고 있던 그는 자신을 황해도 장연 출신의 정씨라고 소개했지만 서울 말투를 썼고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비쳤다. 문득 김구는 그가 명성황후 살해를 주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이거나 그의 부하로서 조선인으로 변장한 다음 도피하고 있는 낭인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김구는 설사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 해도 칼을 차고 숨어 다니는 왜놈이라면 이 나라에 해가 되는 존재가 분명할 테니 일거에 죽여 없앰으로써 국모 시해의 치욕을 조금이라도 씻어 내겠다고 작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왜인은 칼을 소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행으로 보이는 총각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40여 명에 달하는 여관 손님 중에 패거리가 더 있다면 자신이 거꾸로 죽임을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문득 과거에 스승 고능선이 들려준 한시가 떠올랐다.
가지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지만,(得樹攀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자가 가히 대장부로다.(懸崖撒手丈夫兒)
사내대장부라면 큰일을 함에 있어 작은 위험을 감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새삼 의지를 다진 김구는 조국을 불법으로 침탈하고 국모까지 살해한 왜인들을 죽이는 것은 대의에 부합하는 일에 분명하다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드디어 마음을 정한 그는 자신이 행동에 나섰을 때 다른 손님들이 참견하지 못하도록 기세를 과시하기로 했다. 그래서 밥상이 나오자 단숨에 뚝딱 먹어치운 다음 여관 주인에게 소리쳤다.
“주인장, 내가 오늘 7백여 리 산길을 걸어서 넘어가야 하는데 아침을 더 먹고 가야겠으니 밥 일곱 상만 더 차려 주시오.”
그 말을 들은 여관 주인 이화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가버렸다.
“무슨 헛소리야. 젊은 사람이 참 불쌍하다. 분명히 미친 게야.”
난데없는 소란이 벌어지자 방안에 있던 손님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 그들은 초라한 김구의 행색 때문에 여관 주인의 말대로 미친놈이라는 쪽과 그의 건장한 체구와 눈빛을 보아하니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다. 하지만 왜인은 그런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고 식사를 마치자마자 총각과 함께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순간 김구는 “이놈!” 하는 호령소리와 함께 발길질을 내질러 왜인을 계단 밑으로 떨어뜨린 다음 비호처럼 달려들어 발로 목을 힘껏 밟았다. 깜짝 놀란 왜인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자 여관의 방문이 일제히 열리더니 수많은 손님들이 뛰쳐나왔다. 그러자 김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들을 위협했다.
“누구든지 이 왜놈을 위해 내게 덤비려는 자는 모두 죽여 버리겠다!”
김구의 험악한 기세에 손님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몇 사람이 용기를 내어 말리려고 마당에 내려왔지만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한데 그 틈에 정신을 차린 왜인이 칼을 뽑아들고 김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김구는 날랜 몸짓으로 칼날을 피하면서 그의 옆구리를 차서 넘어뜨렸다. 이어서 땅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든 김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왜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도질해 버렸다. 이윽고 상대의 죽음을 확인한 김구는 시뻘건 핏물을 한 움큼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처바른 다음 악귀나찰 같은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 좌중을 둘러보고 호통을 쳤다.
“나는 해주 백운방 출신의 김창수다. 아까 왜놈을 위해 내게 달려 들려던 놈이 누구냐?”
그 모습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사람들이 모두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었다. 여관 주인 이화보 역시 겁을 잔뜩 먹고 벌벌 떨면서 사정했다.
“소인이 눈은 있어도 눈동자가 없어 장군님을 멸시했으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의 말에 따르면 왜인은 몇 시간 전에 황주에서 목선을 타고 왔다고 했다. 동행인 총각은 난데없는 상황에 기겁하여 도망친 지 오래였다. 김구가 왜인의 소지품을 가져오게 한 다음 신분을 확인해 보니 이름은 쓰치다 조료(土田讓亮), 신분은 육군 중위였는데 전대에 엽전이 8백 냥이 들어있었다.
김구는 그 돈으로 뱃삯을 지불한 다음 나머지는 이화보로 하여금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일렀다. 이어서 그는 이 거사가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자 함[國母報讐]’이라는 포고문을 작성하고, 이화보에게 사건의 전말을 안악 군수에게 알리라고 지시한 다음 여관을 떠났다.
김구가 신천에 다다랐을 때 마침 장날이었는데 소문 따라 들려온 치하포 이야기로 장터가 떠들썩했다. 신천 서부에 살던 동학당 친구 유해순이 그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세상을 속이고 구차하게 사는 것은 대장부의 할 일이 아니라며 거절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춘추대의를 앞세워 경무관을 꾸짖다
김구는 한 달이 지나도 당국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 무렵 일본영사관에서는 쓰치다 조료와 함께 있던 총각, 즉 평안도 용강 출신의 통역 임학길로부터 사건을 보고받고 영사관에 있던 일본인 순사들에게 수사를 맡긴 상태였다. 이윽고 범인의 정체를 파악한 일본인 순사들은 그에 대한 처분을 조선 관리들에게 맡겼다.
그해 5월 1일, 순검과 사령 30여 명이 집에 찾아와 김구를 살인 혐의로 체포한 다음 해주로 압송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6월 27일부터 심문이 시작되었다. 당시 해주부 관찰사 서리 김효익은 그에게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산평 농장에 있던 왜인 소유 미곡을 탈취한 행적, 장연에서 벌인 산포수 거사사건과 함께 치하포 사건을 캐물었다. 이때 김구는 앞서의 두 가지 혐의는 순순히 시인했지만 치하포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자신의 왜인 살해동기를 지방이 아니라 조정의 고관들 앞에서 당당하게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연 두 달 후인 8월 13일, 김구는 외국인 관련 사건을 재판하는 특별재판소가 있는 인천감리영으로 이감되었다. 그런데 지저분한 감옥의 환경 때문에 며칠 만에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타고난 강골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넘긴 그는 8월 31일부터 경무청 경무관 김순근으로부터 1차 심문을 받았다.
그때까지 기력을 차리지 못한 김구가 간수의 등에 업혀 경무청 안으로 들어서자 경무관 김순근은 그의 신분을 확인하고 범죄사실을 캐물었다. 그러자 김구는 자신이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인을 때려죽였다고 주장하면서, 범죄사실을 추궁하는 감리사 이재정을 이렇게 꾸짖었다.
“나는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신하된 백성[臣民]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白日靑天]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蒙白)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나라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하지 않는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했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몽백(蒙白)’이란 관리들이 국상을 당해 상복을 입는 것이다. 이재정은 일개 평민에 불과한 소년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질책을 받자 부끄러운 표정으로 심문을 마쳤다. 참관하고 있던 일본인 순사 와타나베 타카지로(渡邊鷹次郞)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그때는 명성황후의 국상이 추진되던 기간이었으므로 감히 딴죽을 걸지 못했다.
그때부터 김구는 감옥에서 일반 잡범들과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티푸스 치료를 받았으며, 목에 쓰고 있던 차꼬도 풀렸다. 한편 그가 법정에서 감리사를 꾸짖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장안의 일대 스타가 되었다. 국모의 원수를 갚은 ‘대장 김창수’란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를 보기 위해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옥중에서 개화사상에 눈 뜨다
그해 9월 말, 재판부에서는 김구의 쓰치다 조료 살해 사건을 살인죄로 규정하고 교수형을 언도했다. 당시 법률상 사형에 해당하는 판결은 국왕의 확인절차가 있어야 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10월에 판결 결과를 바탕으로 법부가 사형의 집행에 대한 안건을 고종에게 올렸는데, 승지로부터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그의 범행 동기를 전해들은 고종이 김구의 사형에 대한 칙령을 유보하면서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생애 최초의 감옥살이는 고리타분한 유교사상에 물들어 있던 김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주었다. 간수들이 건네준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 등을 읽으면서 개화사상과 신문명에 눈을 뜨게 된 그는 이제까지 배웠던 ‘척왜척양(斥倭斥洋)’의 아집을 버리고 발전된 서양의 제도와 법규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필요불가결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와 같은 깨달음은 민중교육과 계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김구는 문맹이 대부분인 백여 명의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 그 때문에 독립신문에서는 ‘김창수가 투옥된 뒤 인천감옥은 감옥이 아니라 학교가 되었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는 또 죄수들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무료로 소장(訴狀)을 써주었다. 그 덕분에 많은 죄수들이 승소하고, 혹세무민하던 관리들이 파면되는 일도 있었다.
김구는 감옥에서 성악을 배우고 즐기기도 했다. 당시 간수들은 야간에 죄수들의 탈옥을 방지하기 위해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소리나 옛날이야기로 시간을 때우게 했다. 그래서 김구는 기생의 기둥서방이던 조덕근에게 창을 배운 다음 한밤중에 죄수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다보니 소리의 운치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구명운동이 실패하자 탈옥하다
사형이 언도되었으므로 미결수였던 김구는 언제라도 고종이 승인하면 교수형에 처해질 운명이었다. 그런데 강화도 출신의 중인 김주경이란 사람이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구명운동에 나섰다. 김주경은 법부대신 한규설을 찾아가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한 김구의 충의를 표창하고 조속히 고종에게 간언하여 방면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한규설은 당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눈치를 보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분개한 김주경이 수차례 법부에 공식적으로 소장을 제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김주경은 김구에게 다음과 같은 한시를 보내 탈옥을 권유했다.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脫籠眞好鳥)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로운 물고기가 아니리.(拔扈豈常鱗)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나니 (求忠必於孝)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請看依閭人)
이 시를 읽은 김구는 김주경에게 감읍하면서도 자신은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옥살이를 하던 조덕근, 양봉구, 김백석 등 여러 죄수들이 자꾸 개죽음을 당하지 말고 함께 탈옥하자고 부추겼다. 결국 그들의 집요한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김구는 탈옥을 결심하고 계획을 짜기에 이른다. 그는 일단 조덕근 등에게 돈 200냥을 준비하라고 이른 다음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한 자 길이의 긴 창을 구해오도록 했다.
1898년 3월 19일 오후, 김구는 평소 가까웠던 간수에게 돈 150냥을 주면서 죄수들에게 먹일 쌀과 고기, 모주 한 통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와 함께 나머지 50냥을 챙겨주면서 모처럼 아편을 사서 실컷 즐기라고 권했다. 그날 밤, 어둠이 짙어지자 간수는 아편에 취하여 늘어지고, 여러 죄수들은 술에 취하여 저마다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등 난장판을 벌였다. 그렇듯 혼란한 틈을 타 김구는 준비한 창으로 마루 밑의 벽돌을 들춰내고 굴을 파서 조덕근 등과 함께 철창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김구는 곧바로 일행을 담장 밖으로 내보낸 다음 맨 마지막으로 담장을 넘으려 했다. 그런데 먼저 나간 자들이 감리영과 감옥을 연결하는 용동(龍洞)의 송판 마루를 잘못 디뎌 ‘우지끈’ 요란한 소리를 내버렸다. 그러자 깜짝 놀란 경비병들이 호각을 불며 쫓아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김구는 곁에 있던 작대기를 짚고 몸을 솟구친 다음 단숨에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무려 2년 만에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었다.
마곡사의 승려, 일시적인 도피행
기발한 작전으로 인천감옥에서 벗어난 김구는 조덕근 등 탈옥수 일행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그곳에는 과거 감옥에서 글을 가르쳐주었던 청지기 출신 진씨가 있었다. 가까스로 진씨를 만나 거지꼴에서 벗은 김구는 일행과 헤어져 남쪽으로 향했다. 당시 그에게는 특별한 목표나 희망이 없었다. 다만 탈옥수로서 세상의 이목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남원을 거쳐 목포에 다다르니 순검들의 기찰이 심했으므로 발길을 돌린 그는 해남과 강진을 지나 보성, 화순, 순창, 하동 땅을 밟았다. 다시 북행길에 올랐는데, 계룡산 갑사에서 만나 동행하던 이서방이라는 남자가 마곡사에 이르자 함께 승려가 되자고 제안했다. 게다가 김구의 대인 같은 풍모에 반한 마곡사의 노승 하은당(荷隱堂)이 자신의 상좌가 되어달라고 간청하기까지 했다.
고심하던 김구는 이튿날 아침 승려가 되기로 결심을 굳히고 머리를 깎았다. 스승이 된 하은당은 그에게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하사했다. 그렇듯 얼떨결에 승려가 된 김구는 그때부터 낮에는 상좌로서 장작을 패거나 물을 길었고 밤에는 불경을 외우고 예불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출가는 일시적인 도피행이었으므로 24세 때인 1899년에 결국 환속하고 만다.
그 후 고향 해주에 돌아온 김구는 1903년,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에 전념했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한 그는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15년 특별 가출옥으로 자유를 되찾은 그는 농민계몽운동에 몸담았다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애국지사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때부터 백범 김구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이역만리 중국에서 고난과 열정의 독립투쟁을 선도했다.
치하포 사건의 진실 찾기
젊은 날 외세 침탈에 대한 분노와 뜨거운 애국심으로 무장했던 김구가 일으킨 치하포 사건은 《백범일기》의 내용과 사법부의 조사기록에 다른 점이 많아 의혹을 자아내고 있다.
우선 《백범일기》에는 김구가 척살한 일본인 쓰치다 조료(土田讓亮)가 일본군 중위라고 씌어 있지만 경무청에서 작성한 신문조서에는 을미사변과 전혀 관련이 없는 상인이었다. 일본 외무성 자료는 좀 더 자세한데, 그는 쓰시마 이즈하라 항구 출신으로 무역상 오쿠보키(大久保機)에게 고용되어 조선에 건너온 매약행상, 즉 약장수였다.
당시 단발령으로 조선 내 반일감정이 고조되자 일본공사관은 조선에 들어와 있는 일본인들에게 인천으로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이에 따라 1895년 10월 진남포에 도착하여 11월 4일 황주에 갔던 쓰치다는 황주 십이포에서 조응두의 배 한 척을 빌려 통역과 함께 인천으로 가다가 치하포 여관에서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했던 것이다.
김구의 쓰치다 살해 과정도 명확하지 않다. 1차 신문에서는 발로 차고 돌로 때렸지만, 2차 신문에서는 돌로 때리고 나무로 때린 다음 넘어진 그가 다시 일어나 도망가자 강변까지 쫓아가 몽둥이로 때려 죽였고, 3차 신문에서는 자신이 돌을 던져 쓰러뜨린 다음 손님들이 함께 칼로 찔러 죽였다고 자백했다.
경무청 조서에 따르면 사건 당시 쓰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돈은 《백범일기》에 기록된 8백 냥이 아니라 1천 냥이었다. 김구는 그 중에 2백 냥을 꺼내 사공에게 뱃삯을 치르고 동행 세 사람에게 노자를 나누어준 다음 75냥으로 자신이 쓸 나귀 한 필을 구입했다고 자백했다. 이화보가 보관하고 있던 나머지 8백 냥은 일본경찰이 수거하여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구의 범행을 살인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했다.
치하포 사건 이후 쓰치다의 후손들은 끈질기게 이 사건 판결의 부당함을 물고 늘어지면서 무고한 외국인을 사상케 한 대가로 대한제국에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 결과 10년이 지난 1905년 3월 그들은 고종황제의 정치자금인 내탕금으로 배상금을 지급받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치하포 사건은 대의명분에 사로잡힌 백범 김구의 우발적인 살인으로 공식화 되었다.
한편, 이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만한 정황도 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극우단체인 현양사(玄洋社) 휘하 천우협(天佑俠) 소속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등 수십 명의 낭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청군과 동학당에 대한 정탐과 테러활동을 벌였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선에 남아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인 신분을 감춘 채 칼을 품고 황해도 일대를 횡행하던 쓰치다 조료가 그들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더군다나 쓰치다 후손들에 대한 배상금 지급 시기가 을사조약 체결, 통감부 설치 등 일제의 조선 병합 책동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시기임을 감안한다면 억울하게 죽었다는 쓰치다의 진정한 신분이 무엇이었는지 한번쯤 의심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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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 〈1895~96년 김구의 연중 의병 활동과 치하포 사건〉 도진순. 한국학술진흥재단. 1997.
- ・ 《도왜실기》 김구 지음/엄항섭 편저. 범우사. 2002.
- ・ 《백범일지》 김구 지음/배경식 풀고 보탬. 너머북스.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