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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옥

황만동(黃晩東), 黃鈺
요약 테이블
출생 1887년
사망 미상

경기도경찰부의 조선인 경부 황옥은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 이후 의열단의 두 번째 의거를 돕기 위해 상하이로 가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직접 폭탄과 무기를 국내로 반입했지만 동료의 배신으로 인해 체포되었다. 오늘날까지 황옥이 의열단에 잠입한 일제의 밀정이었는지 친일파로 위장한 독립투사였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 김원봉, 윤세주, 김대지, 황상규 등 애국지사들은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그해 11월 10일 길림성에서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1923년 1월에 완성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서는 의열단이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제하고 오직 폭력적 민족혁명을 통한 일제 타도를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의열단은 창단 직후 5파괴 7가살이라 하여 파괴대상과 암살대상을 선정했다. 파괴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 및 그 관련기관이었고, 암상대상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 등이었다.

그 무렵 경기도경찰부 소속 경부 황옥은 의열단원 김시현의 설득에 따라 상하이에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한 다음 경찰의 지위를 이용하여 거사용 폭탄을 국내로 반입했다. 하지만 동료의 배신으로 작전이 실패하고 검거되자 법정에서 자신이 일제의 밀정이었다고 고백함으로써 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의열단원의 판결문

의열단원 30여명의 판결문이 담겨 있는 형사재판서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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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의 어긋난 거사

1922년 가을 의열단은 대규모 암살·폭파계획을 수립하고 두 개의 루트를 통해 실행에 들어갔다. 한쪽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과 김한이 맡고, 다른 한쪽은 고려공산당 소속 장건상과 김시현이 맡았다. 이윽고 김한이 주도하는 거사계획에 따라 의열단원 김상옥과 안홍한이 국내로 잠입했고 폭탄도 국경 근처까지 운반되었다. 그런데 폭탄의 국내 반입 직전 의열단 본부에 김한이 일제의 밀정이라는 가짜정보가 입수되면서 작전이 미루어졌다.

그 사실을 전해 듣지 못한 김상옥은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 투탄으로 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손되었고 행인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건 닷새만인 1월 17일 그의 신상을 파악하고 은신처를 덮쳤다. 이때 김상옥은 격렬한 총격전을 벌이며 도피에 성공했다. 1923년 1월 22일 아침 일경은 새로운 은신처에서 그를 포위했다. 이때 김상옥은 세 시간에 걸친 총격전을 통해 경찰 십여 명을 사살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일경은 대대적인 추가검거작전에 돌입하여 김한과 안홍한 등 관련자 대부분을 검거했다. 그로 인해 첫 번째 계획이 실패로 귀결되자 김시현은 곧바로 두 번째 계획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이때 김시현은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를 계기로 가까워진 경기도경찰부 고등경찰과 소속 경부인 황옥을 동지로 포섭했다.

의열단의 제2차 작전에 참여하다

황옥(黃鈺)은 1920년 3월 경기도경찰부 직속 도경부로 특채된 후 그때까지 고등경찰과 경부로 근무하면서 독립투사에 대한 감시와 정탐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일제경찰이었지만 고려공산당 당원이었는데, 1922년 김시현이 고려공산당에 입당할 때 도움을 주었고,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할 때 여비로 50원을 건네준 바 있었다.

당시 김시현은 무사히 조선을 빠져나간 다음 그가 준 여행증 12매를 이용하여 여운형과 김규식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모스크바에 데려갈 수 있었다. 그런 인물이니만큼 김시현은 충분히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1922년 말경 김시현은 김흥섭, 이상용, 김동삼 등 경북지방 출신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된 의용단에 가입하여 국내에서 독립자금을 모금했다. 의용단은 그해 11월 김찬규와 이택이 등이 문경과 대구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해체되었지만 그는 윤병구, 유석현 등 동지들과 함께 계속 자금을 모집했다. 그해 12월 김시현은 총독부 판사인 백윤화에게 자금을 요구했다가 실패하고 일경의 추적을 받았는데, 그때도 황옥이 그를 중국으로 피신시켜 주었다.

얼마 후 황옥은 상관에게 상하이에서 열리고 있던 국민대표회의를 탐문하고 오리무중이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의 배후를 수사한다는 핑계를 댄 다음 유석현을 대동하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현지에서 김시현의 소개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그는 의열단에 가입한 다음 그들이 추진하고 있던 폭파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당시 김원봉은 폭탄제조 기술자인 헝가리인 마잘이 만든 폭탄 36개와 권총 5정, 실탄 150발과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문〉, 조선총독부 소속 각관공사에게 보내는 경고장 3천매 등을 천진으로 가져왔다. 이를 건네받은 김시현은 고려공산당 소속으로 황옥의 추천에 의해 조선일보 안동현 지국장으로 재직하던 홍정호에게 맡겼다.

이윽고 의열단원들은 홍정호의 집에 기생을 불러 파티를 연 다음 기생들이 타고 온 인력거 속에 폭탄을 숨겨 경성까지 운반했다. 일행이 무사히 경성에 도착하자 황옥은 폭탄을 조황, 김사용의 집에 맡겨두었다. 며칠 뒤 김지섭, 이연준, 유석현 등 거사를 실행할 의열단원들이 경성에 속속 모여들었다.

그런데 거사가 임박해지자 불안해진 조황은 친구이자 독립투사였던 김두형에게 재차 폭탄을 맡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김두형이 일경의 밀정이었다. 그의 고발로 인해 3월 15일 황옥을 비롯하여 유석현, 김시현, 등 18명이 황해북도경찰부 소속 경찰들에게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하려던 제2차 의열단 암살·파괴 작전이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독립투사 가정의 애환

의열단원들의 대규모 검거소식이 알려지자 조선 전역이 떠들썩해졌다. 언론에서는 특히 현직 경찰인 황옥이 독립투사라는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도하의 신문들은 이 사건을 ‘황옥경부폭탄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그의 행적을 집중 조명했다.

동아일보는 7월 21일 ‘가장은 철창 밑에, 가족들은 주림에 울고 있는 의열단원의 가정, 황옥의 처자는 지금 어찌.’란 제하의 기사를 통해 가장이 기세등등한 경찰관에서 졸지에 독립투사가 되어 투옥되자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가족들의 현실을 소설처럼 그려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의열단 사건에 뜻밖에 가장 유력한 운동을 하던 경기도경찰부 경부 황옥에 대하여 매우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도 많았지만 예심이 끝나자 검사국에서 유죄로 인증하기에 이르자 비로소 과연 그가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천진에서 김원봉에게 ‘조선독립을 위하여 분골쇄신이 될지라도 감히 행하겠노라.’ 하던 맹세가 허언이 아님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한 사람 황옥에게 목숨을 달고 지내는 다섯 식구의 황옥의 처자는 과연 어떠한 참경에 빠져있는가.

가세가 여유가 있어도 가장되는 사람이 철창에서 신음하게 되면 그 처자 되는 사람의 가슴에는 못이 될 터인데, 설상가상으로 굶주림과 헐벗음까지 겹쳐오게 되면 그들의 신세는 무엇에나 비할 수 있을까. 황옥이 경부노릇을 할 때는 매삭 백 원에 가까운 수입이 있어서 사십 원이나 되는 셋집에 아무 걱정 없이 지냈지만 그가 입감한 이래 그 부인 되는 김순자는 4남매의 아해를 데리고 거리를 떠도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먼저 지내던 계동 15번지에서는 마침내 집세가 두 달씩이나 밀리니 눈물 없는 집주인의 박대에 하는 수 없이 어린 아해들을 앞세우고 그 부근 24번지의 건넌방 한 채를 매삭 5원씩에 얻어서 곁방살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5원이란 돈이나마 구할 길이 없는 김순자는 하는 수 없이 친척인 낙원동 161번지 이계영 씨 집 뒤채를 무료로 얻어들고 겨우겨우 바느질품을 팔아서 그날그날의 목숨을 이어가는데, 더욱 가련한 것은 목하 재동공립보통학교에 통학중인 장자 일영과 차자 인웅 두 아해가 어린 배에 점심조차 얻어먹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감옥에 있는 황옥이도 처자의 참경을 매우 염려하여 그 부인에게는 체면과 부끄러움을 둘째로 알고 방물장사라도 하여 생활을 유지하기 바란다고 했으며, 장남 일영에게는 ‘일영아 공부 잘하느냐. 자친께 효성이 있다하니 기특하다. 어린 동생을 잘 가르쳐라. 공부를 하는 여가에 노동하여라.’라는 편지가 감옥으로부터 나왔다.

겨우겨우 어버이의 품을 떠난 어린 아들에게 노동을 하라고 부탁을 하는 옥중의 황옥의 가슴에는 과연 얼마나 큰 상처가 생겼을까. 금년 네 살 되는 막내딸 인원이는 배만 고프면 반드시 대문으로 나아가 길을 향하여 ‘아버지! 아버지!’ 하고 울면서 부르짖고, 철이 좀 났다 하는 큰아들 일영이는 이 꼴을 볼 때마다 어린누이를 들쳐 업고 한숨을 쉬는 어머니의 앞을 떠나서 훌쩍훌쩍 울고 마는 적이 많다 하니, 이미 철창 안에서 신음하게 된 사람은 좌우간 다시 일컬을 필요도 없거니와 죄 없는 그 다섯 생명의 애끊는 고생살이는 과연 어찌 전개될는지.”

동아일보

이 기사가 보도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황옥의 아내에게 전해달라며 동아일보사에 돈을 보냈다. 영광의 문수련이 50전, 최봉윤, 노진애가 1원, 또 서울 낙원동 203번지 팔진옥의 이우경이란 사람이 황옥의 가족에게 쌀 한 말을 기부하기도 했다. 3.1독립만세운동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그 시절 조선인들은 독립투사로 변신했다가 체포된 조선인 경찰관에게 깊은 감동과 연민의 정을 느꼈던 것이다.

자신이 밀정이었다고 고백하다

황옥은 위와 같은 가정의 참경에 마음이 바뀐 것일까. 이어진 의열단원들의 재판 과정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1923년 8월 7일, 법정에 선 황옥은 자신이 의열단의 폭탄 반입을 도운 것은 의열단원들을 검거하기 위한 비밀 작전이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고려공산당을 수사하기 위해 당에 가입했고,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김시현의 공산당 가입과 대회 참가를 알선했으며, 김시현에게 건넨 여비는 경기도경찰부의 기밀비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전 경찰부장 시로가미 유키치는 자신이 의열단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황옥을 침투시켰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황옥은 그 동안 자신을 동지로 굳게 믿고 있던 김시현이 의열단에서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여 대규모 폭파작전을 벌인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도움을 요청해 오자 의열단을 일망타진하여 경시로 승진하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런데 3월 14일 신의주에 남겨둔 폭탄 일부가 평안북도경찰부에 발각되면서 그의 의도가 무산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평안북도경찰부와 경기도경찰부의 갈등이 있었다. 평안북도경찰부는 폭탄을 발견하자 경기도경찰부가 작전 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을 세우기 위해 관련자들을 체포해버린 것이었다.

황옥은 재판 과정에서 밀정으로 활동한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은 당국에 배신감을 느끼고 법정에서 자신의 행적으로 모조리 공개해버렸다. 그러자 입장이 난처해진 경기도경찰부 간부들은 황옥이 폭탄반입사실을 자기들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빌미를 잡아 그가 분명히 의열단의 밀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황옥은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인용문
천진에 출장했다가 경찰부에 돌아와 과장들에게 책망을 당하고, 아무도 나의 심사를 알아주지 못함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까지 하려고 했소. 그러나 이번 사건을 교묘히 운용하여 대대적으로 검거를 행하는 동시에 나의 수완을 보이면, 책망하는 부장이나 과장이나 또는 경무국장까지도 나를 칭찬하고 경시까지 승급도 시켜주리라 믿었소. 나는 굳은 결심으로 사실을 말하지 않고 안동현에 있는 폭탄이 경성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소. 그런데 결국은 경찰부에서 모든 사실을 탐지하고 안동현에 있는 폭탄까지 압수하여, 오늘과 같이 의열단을 이용하려던 내가 공범자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오.
동아일보 1923년 8월 13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어제의 동지였던 의열단원들은 분노했고, 방청객들은 친일경찰의 민낯에 경악하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의열단원 이현준은 악마의 행동을 이제야 알게 되어 분하기 그지없다고 탄식했다. 그의 오랜 동지였던 유시태는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나는 황옥을 진정한 동지로 알고 경찰서에서 수없는 고초를 당하면서도 황옥을 보호하고 두둔했으나 사실을 알고 보니 분하기 짝이 없소. 나는 강도가 아니오. 오로지 조선을 위하여 일편단심으로 일했을 뿐이요.”

그러나 김시현은 끝까지 그를 동지라고 주장했다.

“나는 황옥 덕택에 그 동안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다른 동지들도 그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황옥이 우리들의 동지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의문을 남긴 채 북녘으로 사라지다

일명 ‘황옥경부폭탄사건’에는 당대의 유명 변호사였던 김병로, 이인을 비롯하여 일본의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까지 참여하여 의열단원들을 변호했다. 특히 후세 다쓰지는 8월 12일 제2차 공판 당시 김시현에게 ‘모든 일을 운명에 맡기고 심기자약하여 평안히 있으라. 감옥 안에 있으나 바깥에 있으나 마찬가지 아닌가?’라는 전보를 보냈고, 재판장에게는 조선독립의 시시비비를 접고 공정한 판결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실상 독립을 배경으로 한 본 사건의 진상 여하와 판결의 결과 여하는 일반 주목의 초점이 될 것이다. 그것은 본건이 조선민족의 가슴에 깊이 잠긴 독립운동의 사상 대책이 교활한 결과 형사대책에 불과한 스파이 연극의 폭로라, 피고들이 법정에서 어떤 사람으로부터 불령선인이라는 말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선인을 위하여 희생한다고 자임할 것이다. 나는 사법재판의 권위를 위하여 독립운동을 초월한 인격 독립의 사상대책을 기대하며, 스파이 연극에 걸린 피고들을 용서하여 죄인으로 인정함보다 피고들의 조금도 사심 없는 그들의 태도를 양해하고 공정한 판결을 구하노라.

결국 황옥은 제령위반폭발물취체규칙 및 총포화약취체령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10년형에 처해졌다. 그러다 사면령에 의해 5년 7개월로 감형되었고, 2년 뒤에 장결핵 폐렴 증상을 빌미로 형집행정지가 되어 풀려난다. 그런데 3년 뒤인 1928년에 돌연 집행정지가 취소되자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되어 잔여형기를 채워야 했다.

현재 황옥에 대한 평가는 미궁에 빠져있다. 법정에서 진술한대로 일제의 밀정이라는 설과, 의열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허위진술을 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의열단장 김원봉은 훗날 조선혁명간부학교 생도들에게 ‘황옥은 경기도 고등과 경부이지만 과거에 의열단원으로 활동했고, 불행히 관헌에 체포된 애련한 자’라고 소개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실제로 황옥은 1920년 8월 미의원단 입국환영식에서 총독암살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던 김상옥에게 일경이 1천여 명을 사전 검속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주어 피신토록 한 적이 있었다. 1922년 12월에는 김지섭이 국내로 폭탄을 들여오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발각되자 국외로 탈출하도록 도와주었다. 그 때문에 김지섭은 훗날 일본 황궁에 폭탄투척의거를 기도하다 검거된 뒤 재판과정에서 황옥을 비호하는 발언을 했다.

과연 그는 일제의 밀정이었을까, 의열단의 밀정이었을까. 학계에서는 양편에 수많은 밀정들이 암약했으리라 추정하고 있지만 국내에는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사실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경무총감으로 돌아온 황옥은 독립운동가들과 스스럼없이 교류했다. 일제에 부역한 인사들을 처벌하기 위해 설립된 반민특위에 나가 자신의 직속상관이었던 친일경찰 김태석의 죄상을 증언하기도 했다. 김태석은 일찍이 강우규 의사를 체포하여 옥사하게 했고 수많은 독립투사를 탄압했던 인물이었다. 황옥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파주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6.25사변이 발발하면서 납북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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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 《1923년,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김동진. 서해문집. 2010.
  • ・ 《약산 김원봉 평전》, 김삼웅 저. 시대의 창. 2010.

이상각 집필자 소개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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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 열전
한국사 인물 열전 저자이상각 | 출판사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재미있는 한국사 이야기. 이순신, 장영실, 사도세자 등 널리 알려진 역사인물부터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인물들까지 그들의 업적과 역사적 가치를 ..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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