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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안동(安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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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수목예성홍정순원왕후 |
조선 후기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견인차 역할을 한 조선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는 헌종과 철종이 보위에 올랐을 때 두 차례에 걸쳐 수렴청정에 임했다. 여성의 정치참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그 시대에 정치 일선에 나섰던 그녀는 왕실의 보전과 가문의 영광 사이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미성년자로 보위에 오른 임금을 대신하여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발을 치고 국정을 돌보는 수렴청정(垂簾聽政) 제도가 있었다. 이는 임금이 성년이 될 때까지 국정을 보좌하여 정치적 능력을 함양하고 왕실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외척의 발호를 야기하는 등 부정적인 면도 많이 도출되었다.
성종대 정희왕후를 시작으로 조선에서는 7회에 걸쳐 수렴청정이 행해졌는데, 순조 비 순원왕후 김씨는 유일하게 두 차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한 인물이다. 그녀는 순조 사후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7년 동안 수렴청정에 임했고, 헌종 사후 19세의 철종이 즉위했지만 왕자의 군호도 없고 관례도 치르지 않았으며 제왕수업이 전무한 상태였으므로 또 다시 3년에 걸쳐 수렴청정을 행했다. 이로 인해 야기된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는 조선을 구제불능의 상태로 빠뜨렸다.
정조에게 세자빈으로 낙점되다
순원왕후 김씨는 1789년(정조 13년) 5월 15일에 서울 양생방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아버지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이고 어머니는 청양부부인 심씨이다. 그녀의 오빠는 영돈녕판사 김유근과 증 이조판서 김원근, 동생이 영돈녕부사 김좌근이다. 어린 시절부터 품행이 오롯하고 영명했는데 여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여계》와 《내훈》 등 여러 서적에 달통했고 스스로 학문을 깨우치기도 했다.
안동 김씨는 병자호란 때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사하고 척화파 김상헌이 청나라에 끌려간 뒤에도 절의를 꺾지 않음으로서 충의와 의리, 학문의 상징적인 가문으로 알려졌고, 16세기경에 이르러 장동 김문이라는 명문가로 발전했다. 이런 가문을 배경으로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조순은 일찍부터 정조의 관심과 배려를 받았다. 그가 1785년(정조 9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자 정조는 ‘낙순(洛淳)’이라는 이름을 ‘조순(祖淳)으로 바꾸어 내리기까지 했다.
정조는 안동 김씨 가문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김조순을 중용하면서 순조의 스승으로 삼았고 좀 더 확실한 관계를 맺기 위해 사돈을 맺고자 했다. 야사에 따르면 순조가 김조순의 집에 갔다가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아버지 정조에게 ‘김조순의 딸이 아니면 장가가지 않겠다.’고 졸랐다고 한다.
순원왕후와 순조의 국혼은 정조대의 세자빈 간택과 순조 즉위 후 중전 간택으로 구분된다. 정조는 1800년(정조 24년) 2월 26일 세자빈 간택을 명하고 초간택에서 김조순·서기수·신집·윤수만의 딸을 뽑았다. 한데 정조는 당일 신료들이 있는 자리에서 김조순의 딸을 극구 칭찬했다.
“내가 김조순 가문에 대해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현륭원 참배를 하던 날 밤에 꿈이 너무 좋아 마치 직접 나를 대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 같았다. ……오늘 간택 때도 그녀가 들어왔을 때 보니 얼굴에는 복이 가득하고 행동거지도 타고나 궁중 사람들 모두가 관심이 쏠렸고 자전과 자궁도 한번 보시고는 첫눈에 좋아하셨다. 종묘사직의 끝없는 복이 오늘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듯 신원왕후를 보자마자 며느리감으로 점찍은 정조는 김조순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딸이 세자빈으로 결정되었음을 암시했다.
‘경은 이제 나라의 원구(元舅)로서 처지가 전과 달라졌으니 앞으로 더욱 자중해야 한다.’
조는 김조순의 딸이 명족 출신이자 사도세자의 유시를 받았고, 처자의 몸가짐이 바르다고 칭찬했다. 이어서 관례와 책봉례를 동시에 거행하고 가례는 12월에 치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조가 그해 6월 28일 갑자기 승하하면서 삼간택이 중단되었다.
격랑을 딛고 순조의 배필이 되다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자 국법에 따라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정국은 김관주를 필두로 하는 경주 김씨 일문과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 벽파가 주도하게 된다. 정순왕후는 영조 후반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경주 김씨 출신이다. 그녀의 수렴청정과 함께 정조 연간에 낙마했던 경주 김씨 일파와 벽파 세력이 재기하면서 정국이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벽파는 1801년(순조 1년) 천주교를 빌미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를 학살하면서 이가환, 정약용 등 정조가 차세대 친위그룹으로 점찍었던 남인 출신의 인재들을 죽이거나 유배형에 처했다. 이때 과거 역모에 연루되었지만 정조의 배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은언군이 죽임을 당했고 은신군 역시 집요한 탄핵으로 유배당했다가 제주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혜경궁 홍씨의 친동생 홍낙임도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이런 살벌한 정국하에서도 김조순은 정순왕후로부터 국구의 대접을 받으면서 병조판서, 비변사 제조, 어영대장 등 요직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801년(순조 1년) 6월 12일, 대사헌 권유가 홍낙임, 은언군 등을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상소문에서 ‘도인윤길(都人尹姞)’과 ‘곡돌사신(曲堗徙薪)’이란 표현을 통해 김조순을 간접적으로 공격했다. 그것은 안동 김씨가 지금은 은인자중하고 있지만 외척이 되면 요원의 불꽃처럼 활활 타는 기세로 돌변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대신들은 권유가 김조순의 딸에 대한 삼간택을 막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 때문에 김조순과 가까웠던 심환지는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해 권유를 벌하라고 상주하기도 했다. 그러자 정순왕후는 정조의 국상이 끝난 1802년(순조 2년) 9월, 중전 간택을 명하면서 김조순을 불러 사실상 국구가 되었음을 축하해 주었다.
“대혼이 완전히 결정되었으니 종사의 억만년 경사가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오. 경사스럽고 다행스럽소. 경신년 재간택 때 선왕이 기뻐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니 감회를 진정시킬 수 없소.”
그렇게 해서 그해 9월 6일 미루어졌던 삼간택이 시행되면서 김조순의 딸이 확정되었고, 그해 10월 순조가 친영을 함으로써 순원왕후는 고대하던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그때부터 조정은 경주 김씨와 반남 박씨, 안동 김씨 세 외척 가문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효명세자를 낳다
1803년(순조 3년) 12월,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좌의정 이시수는 권유가 앞서 제시한 여덟 자의 글귀를 상소문에 담아 정해진 대혼을 방해하려 했다며 탄핵했고, 언관들도 앞다투어 그를 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 결과 권유는 1804년(순조 4년) 6월 손자 권사목과 함께 대역부도 죄인으로 체포되어 두 차례의 혹형을 받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때 경주 김씨의 대표였던 김귀주의 아들 김노충이 삼간택 날짜를 정할 때 간여했다는 혐의까지 나오자 철렴했던 정순왕후가 그를 비호하면서 다시 수렴청정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좌의정 이시수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우의정이었던 인척 김관주까지 여론에 굴복하면서 그녀의 정계 복귀 시도가 무산되었다.
1805년(순조 5년) 1월,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1806년(순조 6년) 병인경화(丙寅更化)를 통해 김관주, 김달순 등 경주 김씨와 벽파를 일소하면서 김조순이 이끄는 안동 김씨 세력이 확고부동하게 권력을 움켜쥐었다. 당시 김조순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지만 벽파 신료들이 물러난 자리에 김이익·김이도·김희순·김달순·김명순 등 온통 안동 김씨가 들어섰던 것이다.
안동 김씨는 곧 이조와 병조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본래 조정에서 관리를 임명할 때는 이조와 병조에서 세 명의 인재를 추천하고 국왕의 낙점을 받는 삼망제가 행해졌다. 한데 안동 김씨는 세 명의 예비후보를 모두 자파의 인물로 채움으로써 국왕의 인사권을 무력화시켰다. 그 결과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청요직은 물론이고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관직은 모두 안동 김씨, 혹은 그들을 추종하는 인물들이 차지했던 것이다.
1809년(순조 9년) 8월 9일, 당시 21세였던 순원왕후 김씨가 창덕궁 대조전에서 원자를 낳았다. 조선 왕실에서 왕비가 원자를 낳은 것은 현종 비 명성왕후 김씨가 1661년(현종 2년) 숙종을 낳은 이래 150년 만의 경사였다.
그녀는 아기를 낳기 전에 용꿈을 꾸었는데, 과연 원자는 이마가 튀어나온 귀상인 데다 영기 어린 용안을 지녔다. 때문에 나이 든 궁인들은 아기가 정조와 닮았다고 수군거렸다. 순조는 크게 기뻐하며 태어난 당일에 ‘원자(元子)’로 삼았다. 그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희망’으로 불린 효명세자 이영이다. 그 뒤로 순원왕후는 요절한 왕자 1명과 명온공주·복온공주·덕온공주 등 3명의 공주를 더 낳았다.
순원왕후와 효명세자의 관계는 그야말로 다정다감했다. 1828년(순조 28년) 어머니 청양부부인의 부음을 듣고 순원왕후 김씨는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기절했다. 왕비의 몸으로 사가에 조문을 갈 수 없었던 그녀가 몸져눕자 효명세자가 문 밖에 차일을 치고 맨발로 오가며 그녀를 간호했다. 한 달 뒤 궁궐로 되돌아간 효명세자는 하루에 두 차례 찾아가 문안을 여쭙고 어두워지면 이부자리를 깔아드리기까지 했다.
1827년(순조 27년) 2월부터 효명세자가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에 나서자 모자간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세자는 각종 진찬연과 진작연을 통해 부왕과 모후를 떠받들면서 기세등등했던 신료들의 복종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1830년(순조 30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4년 만에 21세의 나이로 급서하고, 1834년(순조 34년)에는 순조마저 승하하면서 순원왕후 김씨는 정치 일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헌종의 즉위와 첫 번째 수렴청정
1834년(순조 34년) 11월 18일, 헌종이 8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자 순원왕후가 궁중의 제일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헌종은 즉위와 동시에 아버지 효명세자를 추존했으므로 대비인 순원왕후가 곧바로 대왕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 참여를 부담스럽게 여긴 순원왕후는 일곱 차례에 걸쳐 수렴청정을 거절했다.
당시 그녀는 ‘세손이 비록 충년(沖年.어린 나이)이라 하더라도 천자(天姿.천부적인 자질)가 영명하여 종사와 신인의 의탁을 맡을 것’이라며 신료들의 청을 반려했지만 여러 외척 가문의 정치적 경쟁구도에 떠밀려 결국 수렴청정의 역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예조에서는 〈수렴청정절목〉을 반포하여 수렴청정하는 대비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해주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수렴청정의 장소는 편전이며 승정원에서 품지하도록 한다.
둘째, 수렴청정할 때 왕과 대비의 위차는 대비가 수렴 안쪽의 동쪽에서 남면하고 왕은 그 바깥쪽 중앙에서 남면하는데 신하들은 조하할 때 대비에게 먼저 4배를 한다.
셋째, 서무결재의 방법은 대비가 직접 결제하는 것이 가능하고, 헌종이 직접 결재하기도 하지만 대비의 뜻을 묻기도 하고, 대비가 직접 하교하는 방식으로 시행한다.
넷째, 신하들도 발 앞에서 직접 품의할 수 있다. 대비는 한 달에 여섯 번 신하들과 청대한다.
순원왕후는 이런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다양한 정국의 현안을 파악하고 결재하면서 정치에 참여했고, 사적으로 친정 식구들을 통해 세간의 각종 정보를 파악하여 정국운영에 참조했다. 당시 그녀는 전라감사로 부임하는 김흥근에게 “구중이 비록 깊다고 하지만 본디 소문이 들어오는 길이 있다.”면서 경고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대비들의 수렴청정은 필연적으로 외척들의 득세를 가져왔다. 시대적으로 여인들이 정치경험이 없었으므로 인척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순원왕후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가문의 뜻에 따라 헌종의 왕비로 인척인 김조근의 딸을 간택함으로써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
현재 규장각에는 〈순원왕후어필봉서〉를 포함한 58점의 한글편지가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도 사가에서 보관하고 있는 한글편지가 다수로 알려져 있다. 대략 1840년부터 1850년대 중반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편지에는 당대의 정치에 대한 관심사와 궁중생활의 이면사는 물론 친정인 안동 김씨에 대한 애틋한 소감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편지 속에서 그녀는 1차 수렴청정을 끝내고 나서 홀가분한 심사를 토로했다. 자신이 팔자가 험해 가당치도 않은 짐을 지었는데 그 짐을 벗으니 종사를 위해 경축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수렴청정의 역할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7년 뒤 헌종이 친히 정사를 돌보면서 친위군을 강화하고 친정인 안동 김씨를 내치자 조손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실록에 따르면 그녀는 헌종이 남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이 많으며 시기심이 강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철종의 즉위, 두 번째 수렴청정
1849년(헌종 14년) 벽두부터 자식이 없던 헌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순원왕후 김씨는 은밀히 후사를 도모했다. 그녀는 최초에 덕흥대원군의 종손 이하전을 물망에 올렸다. 한데 그의 항렬이 헌종의 조카뻘이었으므로 순원왕후는 ‘인손’이란 이름을 주고 손자로 내정했다. 그런데 그해 6월 6일 헌종이 23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생각을 바꾸어 강화도에 살고 있던 은언군의 손자인 19세의 이원범을 전격적으로 보위에 올렸던 것이다.
혹자들은 이에 대하여 순원왕후가 조선 후기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영조의 혈맥을 앞세워 헌종으로 인해 땅에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철종은 항렬상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이었으므로 여러 모로 무리한 결정이었다.
일개 촌부였다가 졸지에 국왕이 된 이원범은 봉영 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고, 이튿날인 9일 창덕궁 희정단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했다. 하지만 그는 일자무식이었으므로 순원왕후 김씨가 헌종대에 이어 또 다시 수렴청정에 나섰다.
순원왕후의 한글편지에는 제왕수업이 되어 있지 않은 철종을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철종을 위해 축수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철종 비를 간택할 때는 노론이나 소론을 가리지 말고 다른 가문에서 찾아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순원왕후는 결국 친정의 결정에 따라 1851년(철종 2년)에 인척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간택했다. 그로 인해 철인왕후 김씨가 중전이 되면서 안동 김씨는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순원왕후 김씨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던 1857년(철종 8년), 창덕궁 양심각에서 69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1900년(광무 4년) 순조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로 추존되면서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추존되었다.
명가 안동 김씨의 후예인 김조순의 딸로 태어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중전의 자리에 올랐던 순원왕후 김씨는 순조의 아내이자 효명세자의 어머니로 한때 평온한 세월을 보냈지만, 순조의 죽음 이후 어린 헌종의 할머니로서 강화도령 철종의 후견인으로 두 차례나 내키지 않는 수렴청정에 나서야 했다. 그녀는 나름대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친정 안동 김씨 세력이 조장했던 세도정권의 폐해를 막을 수 없었다. 그녀가 남긴 한글편지는 무기력한 정치인의 이상과 현실이 결코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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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 《조선왕조실록》 이 상각. 들녘. 2009.
- ・ 〈조선후기 헌종대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임혜련. 〈한국인물사연구〉 3호. 2005.
- ・ 〈한글편지에 나타난 순원왕후의 일상과 가족〉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09.
- ・ 〈한글편지에 나타난 순원왕후의 수렴청정과 정치적 지향〉 이기대. 국제어문 제47집. 200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