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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 19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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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미국 |
설립자 | 에스티 로더(Estée Lauder), 조지프 로더(Joseph Lauder) |
분야 | 미용 |
취급품목 | 바디케어, 스킨케어, 헤어케어, 향수 등 |
사이트 | http://www.elcompanies.com/ |
본사 주소 | 뉴욕(New York) |
요약 스킨케어, 메이크업, 헤어케어, 향수 등을 생산하면서 마케팅하는 세계적인 화장품 그룹이다. 프랑스계 로레알 그룹과 함께 화장품 시장을 이끄는 ‘쌍두마차’로 통한다. 2010년 기준으로 클리니크(Clinique), 오리진스(Origins), 아라미스(Aramis), 랩 시리즈(LAB Series), 맥(M·A·C), 바비 브라운(Bobbi Brown), 라 메르(La Mer), 아베다(Aveda), 토미 힐피거(Tommy Hilfiger) 향수 등 총 27개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으며, 2만 2,000개 제품을 세계 140개국에서 판매하고 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상의 것을 선사한다(Bringing the Best to Everyone We Touch)’를 경영 철학이자 슬로건으로 삼고 있다.
에스티 로더의 탄생
에스티 로더는 자신들을 일러 세계 최대의 고급 화장품 메이커라고 강조하는데, 유명 백화점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이른바 ‘귀족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소득층·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을 일러 귀족 마케팅이라고 한다.
매년 매출의 2퍼센트가량을 R&D(연구 및 개발)에 투자하고 있으며, 350명이 넘는 박사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60여 개 대학 연구소와도 손잡고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 기업으로는 드물게 패밀리 경영을 하는 가족 기업이다.
에스티 로더 컴퍼니즈(이하 에스티 로더)는 1946년 에스티 로더(Estée Lauder)와 남편 조지프 로더(Joseph Lauder)에 의해 탄생했지만 실질적인 창업자는 에스티 로더라 할 수 있다. 1908년 뉴욕에서 태어난 에스티의 본명은 조세핀 에스터 멘처(Josephine Esther Mentzer)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1998년 ‘20세기의 천재 경영인 20인’을 선정하면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에스티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에스티의 뛰어난 마케팅 능력과 품질 관리 능력 때문이었다. 에스티는 2004년 4월 24일 심장병으로 97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이때까지 에스티의 나이는 철저하게 베일에 감추어져 있었다. 에스티는 생전에 나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에스티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미(美)를 가꾸는 데 관심이 많았으며 친구와 낯선 사람들에게 화장해주는 걸 즐겼는데, 이는 어머니 로즈 쇼츠(Rose Schotz)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이었다. 로즈 쇼츠는 피부 관리를 위해 매일 크림을 바르고 머리를 다듬는 등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던 여성이었다. 세계적인 화장품 그룹을 일군 에스티의 성공 배경엔 어머니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적지 않은 이유다.
예컨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고영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는 화장품 영업 활동을 할 때 어머니의 유별난 화장법 중 일반 여성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익혀 시연을 통해 고객에게 직접 보여주는 전략을 사용했다. 요즘은 이것이 화장품 업계에서 일반화된 비즈니스 모델일지라도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영업 전략이었다. 또 그녀는 ‘안티 에이징’ 화장품을 개발함으로써 젊어 보이는 데 집착했던 어머니와의 경험을 생산적으로 계승하였다.”
에스티를 화장품 사업으로 이끈 인물은 화학자이자 피부 전문가였던 외삼촌 존 쇼츠(John Schotz)였다. 존 쇼츠가 1924년 연구소를 창립해 다양한 화학제품과 함께 화장품을 생산하자 에스티는 삼촌을 도와 크림을 판매했는데, 이때 존 쇼츠가 만든 ‘슈퍼 리치 다목적 수분 크림’은 훗날 에스티 로더의 초기 간판 상품 역할을 하게 된다.
22세에 결혼한 에스티는 대공황으로 남편의 실크사업이 실패하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 부엌에서 어린 시절부터 취미로 만들던 크림을 제작해 내다팔기 시작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가꾸는데 공을 들였던 에스티는 한 달에 한 번씩 가던 미용실에서 미용실 고객들을 자신의 고객으로 삼아 자신의 제품을 홍보했다. 미용실에서 고객들에게 크림을 발라주거나 미용실 고객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크림을 발라주는 식이었다.
이런 가운데 에스티의 제품의 관심을 보인 플로렌스 모리스 미용실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미용실 한 구석에 판매대 하나를 마련했는데, 자신의 화장품이 점차 인기를 끌게 되자 남편 조지프 로더와 함께 1946년 회사를 차렸다. 이게 바로 ‘에스티 로더’였다. 당시 남편 조지프 로더는 재정과 관리를, 에스티는 판매를 담당했다.
무료 샘플 마케팅과 귀족 마케팅
오늘날의 에스티 로더를 일군 원동력은 에스티의 뛰어난 비즈니스 감각과 마케팅 능력이었다. 오늘날엔 일반화되어 있는 이른바 ‘무료 샘플 마케팅’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게 바로 에스티였다는 게 이를 잘 시사해준다. 에스티는 고객이 사가지 않는 제품의 샘플을 무엇이든지 선물로 나누어 주었는데, 이는 여성들을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에스티는 무료 샘플 마케팅은 여성 특유의 직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는데, 사실 광고를 할 수 없었던 영세한 회사의 현실에서 비롯된 궁여지책이기도 했다. 어쨌든, 무료 샘플 마케팅이 ‘입소문’이 나면서 단골손님들은 늘어나고 회사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무료 샘플 마케팅과 입소문 마케팅에 의해 사업이 번창하자 에스티는 백화점 공략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백화점에 입점하면 품질을 인정받아 상류층 고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귀족 마케팅’을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에스티가 이런 전략을 구사하기로 한 것은 당시 상류층 여성들이 현금보다 카드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로 작용했다. 예컨대 당시 에스티는 상류층 고객들에게서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으니 말이다.
“내가 카드로 물건을 살 수 있는 5번가 삭스 백화점에는 매장이 없습니까?”
이에 에스티는 5번가 삭스 백화점(Sa ks Fifth Avenue) 의 문을 두드렸지만 계속해서 거절만 당하다가 1948년에 드디어 삭스 백화점에 입점하는 데 성공했다. 삭스 백화점 중역의 딸이 에스티가 만든 화장품의 도움을 받아 상처가 난 피부를 치료했다는 게 알려진 게 계기가 되었다.
에스티는 100번째 신청서를 제출한 끝에 삭스 백화점에 입점했다고 말했는데, 이게 시사하듯 에스티는 포기를 모르는 사업가였다. 에스티는 백화점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에서 그간 운영해왔던 플로렌스 모리스 살롱과 앨버트 앤드 카터 살롱의 매장을 폐쇄하기까지 했다.
에스티의 비즈니스 감각과 마케팅 능력은 백화점에 입점한 후에도 십분 발휘되었는데, 몇 가지 에피소드를 살펴보기로 하자. 삭스 백화점에 입점했을 당시 에스티는 슈퍼 리치 다목적 수분 크림, 클린징 오일, 크림팩, 스킨로션 등 단지 4가지 종류의 제품만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간 자신이 확보한 고객과 삭스 백화점에 카드 구좌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금문자로 인쇄된 다음과 같은 카드를 보냈다.
“5번가 삭스 백화점은 에스티 로더 화장품을 자랑스럽게 고객 여러분에게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백화점의 화장품 코너에서 사실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 마케팅은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삭스 백화점과의 첫 계약에서 800달러의 소액 주문만 따내긴 했지만 백화점 안에 매장을 오픈한 지 이틀 만에 모든 제품이 소진된 것이다.
에스티의 비즈니스 감각은 니만 마커스(Neiman Marcus) 백화점 입점 과정에서도 다시 발휘되었다. 이때 에스티는 새해 첫날을 맞아 로컬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저를 찾아오시는 모든 분들께 조그마한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께 파리나 런던에서 유행하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최신 기술을 베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새로운 얼굴로 새해를 맞으십시오”라고 강조했는데, 이 홍보 역시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두었다.
니만 마커스 백화점이 이후 매년 “새로운 얼굴로 새해를 맞으십시오.……에스티 로더 화장품”이라는 광고를 내보내기까지 했다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에스티는 이른바 ‘3분 메이크업’의 원조이기도 하다. 에스티는 백화점에 입점했을 때부터 직원들 교육에 많은 공을 들였으며, 화장품 코너에서는 화장품을 구경하는 모든 여성 고객들에게 3분간 무료 메이크업을 제공했는데, 이는 당시 메이크업 경험이 별로 없던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3분 메이크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증가하면서 화장품 수요도 덩달아 증가하자 에스티가 그런 사회적 변화에 주목해 시작한 것으로, 이런 점에서 보자면 에스티는 시대 흐름을 읽어내는 눈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유스 듀(Youth Dew)의 등장과 해외 시장 진출
에스티 로더가 1953년 내놓은 향수 유스 듀(Youth Dew)는 미국에 향수 붐을 일으키며 에스티 로더를 미국 내 최대 화장품 회사 가운데 하나로 키우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대체 유스 듀는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마법을 부린 것일까?
향수이면서 동시에 목욕용 오일이라는 게 성공의 비밀이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향수는 조금만 뿌려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었지만 목욕할 때 유스 듀를 사용하면 굳이 다음 날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향기가 지속되는 이중 효과를 지니고 있었기에 수많은 가정주부들이 유스 듀에 열광한 것이다.
유스 듀는 1953년 한 해에만 에스티 로더에게 5만 달러 상당의 수익을 안겨 주었으며, 1984년에 이르러선 자그마치 1억 5,000만 달러의 수익을 안겨 주었다. 유스 듀는 ‘젊음의 이슬’이라는 뜻이다. 유스 듀의 대성공을 기반으로 에스티 로더가 유스 듀를 적극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해 [비즈니스 거장에게 배운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더는 이 새로운 향수에 대한 고객들의 관심을 다른 상품의 판매에도 적극 활용했다. 유스 듀는 순수 향수를 포함한 여러 가지 화장품 군으로 계속 확대 개발되었다. 로더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거침없이 유스 듀 제품군의 판촉 활동을 했다. 곧 에스티 로더는 아덴과 루빈스타인의 뒤를 있는 미국 3개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미국 언론들이 ‘로더를 본받아라’고 말할 정도로 에스티 로더는 미국 내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1960년 영국과 캐나다 진출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해외 시장 개척 과정에서도 에스티 로더는 ‘귀족 마케팅’을 고수했다. 예컨대 에스티 로더는 영국 시장을 공략할 때 런던의 유명 백화점에 가장 먼저 입점하는 방식으로 에스티 로더를 알려나갔다.
해외 시장 개척 과정에서도 에스티의 마케팅 능력은 또 발휘되었는데, 유스 듀를 가지고 프랑스 백화점에 진출할 때의 일화는 널리 알려진 대표적 사례다. 당시 에스티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갤러리 라파예트(Galeries Lafayette)에 진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유스 듀라니? 샤넬이 존재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입점을 거부당하자 실수를 가장해 백화점 로비에 향수를 쏟아 고객들에게 어필하는 방식으로 백화점 입주에 성공했다.
이 시절 에스티 로더의 주력 상품은 향수였다. 에스티 로더는 1964년 아라미스(터키어로 최음제라는 뜻) 브랜드를 도입해 남성 향수, 애프터 쉐이브, 로션 등으로 남성 화장품 시장을 개척했으며, 1968년에는 ‘아름다운 피부는 만들어질 수 있다’는 모토로 무향 무방부 크리니크 브랜드를 개발하는 등 자체 브랜드를 개발했다.
에스티 로더는 1967년 뉴욕에서 기업 최초의 연구 실험실을 열었는데, 크리니크는 여기에서 탄생한 제품이었다. 화장품 업계에 인수합병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1970년대에 에스티 로더 역시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려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지만 에스티는 자체 브랜드 개발에만 주력했는데, 왜 그런 것일까? 무분별하게 확장하기보다는 주력 상품에만 집중해 내실을 기하자는 게 에스티의 생각이었다.
자체 브랜드만 개발하면서 에스티는 한 가지 원칙을 정했다. 그건 바로 재료 배합이 95퍼센트가 끝나서 향수가 병에 담겨지기 직전에 로더 가족 중 일원이 그 나머지 5퍼센트의 부족한 재료를 첨가하는 것이다.
이른바 ‘비밀의 5퍼센트’라 할 수 있겠는데, 이 5퍼센트의 비밀은 오직 로더가(家) 사람들만 알고 있다. 이는 산업 스파이에 의해 향수 제조법이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에스티가 마련한 장치다.
에스티 로더를 상징하는 ‘에스티 로더 갈색병’의 등장
에스티 로더는 1980년대 들어 글로벌 지명도를 가진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바로 1982년 등장한 화장품 '어드밴스드 나이트 리페어(Advanced Night Repair)'였다. 이른바 ‘에스티 로더 갈색병’이라고 불리는 스킨케어 제품이었다.
이 화장품은 중장년 여성까지 사회 진출을 하는 가운데 이들의 피부가 사회 활동을 하면서 쉽게 상한다는 점에 착안해 만든 것으로, ‘자는 동안 피부를 회복한다’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화장품으로 알려져 있다.
어드밴스드 나이트 리페어는 1982년 한 해에만 전 세계적으로 510만 병이 판매되었는데, 오늘날까지 에스티 로더를 상징하는 제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분당 3병, 그러니까 20초당 1병씩 팔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3년 에스티는 현역에서 물러났으며 에스티의 아들 레너드 로더(Leonard Lauder)가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1958년 그룹에 합류한 에스티 로더 최초로 연구 개발 실험실을 만들었으며, 신문과 TV 광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인물이었다.
레너드 로더는 1980년대 말 들어 프랑스의 샤넬, 크리스찬 디오르, 로레알 등의 유명 회사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자 브랜드 확장과 화장품 사용자의 연령에 따른 상품 차별화, 적극적인 해외시장 개척 등으로 이에 맞서며 그룹의 성장을 일구었다. 특히 그는 1990년대 들어 ‘블루 스카이’이라는 이름의 대형 프로젝트를 통해 대대적인 연구개발에 나서기도 했다.
1992년 에스티 로더는 유방암의 조기 검진과 예방의 중요성을 알리는 ‘핑크리본 달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애초 핑크리본 캠페인은 1991년 샬럿 할리라는 여성이 자신들의 가족이 유방암으로 고통 받자 ‘국립암연구소의 5%만이 암 예방에 쓰인다’며 의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리본을 나눠준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레너드 로더의 아내 에블린 로더(Evelyn Lauder)가 회사 차원에서 이 캠페인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에블린 로더는 ‘핑크리본 달기’ 캠페인은 “여성들이 에스티 로더 제품을 애용한 덕분에 우리 회사가 이만큼 성장했다”면서 “여성들에게 번 돈을 철저히 여성을 위해 쓰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에스티 로더는 1993년 유방암 연구 재단(Breast Cancer Research Foundation)을 설립해 유방암 예방에 힘쓰는 과학자와 의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매년 10월이 되면 한 달 동안 유방암 퇴치 캠페인을 전 세계적으로 벌이면서 캠페인에 쓸 제품을 선정하고 해당 제품의 판매 수익은 전액 유방암연구재단에 기부하고 있다.
에스티 로더는 1990년대 중반부터 M&A(인수합병)에도 적극 나서 그룹의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브랜드 맥, 바비 브라운, 스틸라, 두발 전문 회사 아베다, 피부 관련 제품 조 말런 등을 인수합병 했으며, 도너 캐런, 토미 힐피거의 향수 및 화장품 등의 판권도 소유하게 되었다.
그간 에스티 로더는 세계적인 경쟁 화장품 회사들이 M&A를 통해 몸집을 불려온 것과 달리 독자 브랜드를 개발하는 식으로 회사를 키워왔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탄생한 브랜드가 아라미스(1964), 클리니크(1968), 프리스크립티브(1979), 자연주의 화장품 오리진스(1990) 등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에스티 로더의 M&A 원칙에 대해 에스티의 손자로 에스티 로더 그룹의 회장 윌리엄 로더(William Lauder)는 훗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선 ‘카테고리의 다변화’라는 기준을 적용합니다. 가령 해당 브랜드가 스킨케어 브랜드인지, 메이크업 브랜드인지를 따집니다. ‘지역적 다변화’도 봅니다. 이 브랜드가 아시아에서 강한지, 유럽에서 강한지를 따지지요. ‘유통채널의 다변화’도 인수 잣대의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앞서는 기준이 ‘좋은 실적’을 낼 수 있는 브랜드인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1999년 현재 에스티 로더의 총 매출은 4조 원에 달했다. 전체 매출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고 있는 곳은 미국 시장으로 61%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유럽·중동·아프리카 지역이 27%, 아시아권이 12%였다.
에스티 로더의 아시아 시장 공략
1990년대 후반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화장품 유통 경로가 빠른 속도로 인터넷으로 옮겨 가자 에스티 로더는 2000년 글로스닷컴이라는 인터넷 회사를 인수해 웹상에서 에스티 로더 화장품 구매가 가능하도록 했다.
2002년엔 화장품 업계에서 가장 먼저 트렌드를 분석, 발표해 ‘트렌드 리더’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겠다는 취지에서 수석부사장 책임 하에 이른바 트렌드 팀을 발족시켰는데, 트렌드 팀은 건축, 패션, 디자인, 보석, 미술, 음악, 문학 등 각 예술 분야와 사회 경제적 흐름에서 읽어낸 문화적 메가트렌드를 제품 라인에 반영하는 역할을 했다.
2004년 전체 매출에서 49퍼센트를 차지했던 해외 시장 비율은 2010년경에 이르러선 거의 60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높아졌으며, 명실공이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에스티의 해외 시장 공략 무기는 철저한 현지화였는데, 특히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던 아시아 시장에 공을 많이 들였다.
에스티 로더의 아시아 시장 공략 교두보는 중국이었다. 예컨대 에스티 로더는 2005년 중국 상하이에 에스티로더 컴퍼니즈 아시아 혁신 센터를 설립하고 아시아 소비자들을 겨냥한 연구 개발에 돌입했다.
에스티 로더의 아시아 공략과 관련해 윌리엄 로더는 2010년 “아시아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하고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합니다. 아시아 소비자들의 피부나 제품에 대한 수요는 서구 소비자들과는 차이가 많습니다. 같은 아시아 소비자라고 해도 한 유형만 있는 게 아닙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이나 일본, 중국 북부처럼 겨울에 건조하고 여름에 습한 북쪽 지역 소비자들과 덥고 습한 남쪽 지역 소비자들의 요구가 또 다르지요. 그래서 현지 소비자에게 맞는 제품의 '적절함'을 중시합니다. 각국의 브랜드 매니저들이 끊임없이 해당 지역 소비자들의 욕구를 이야기하지요. 혁신적인 제품 중의 많은 수가 아시아 시장에서 개발되고 있습니다.……우리는 마스카라 제품을 개발할 때도, 아시아 여성들이 사용하는 방식에 맞는 제품을 내놓습니다. 서구 여성과는 사용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거든요.”
2010년 현재 에스티 로더가 소유한 화장품 브랜드는 27개에 달했는데, 에스티 로더는 어떻게 이 브랜드들을 관리했던 것일까? 윌리엄 로더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각각의 브랜드는 고유의 포지션을 갖고 있습니다. 스포츠로 비유하자면, 야구에서 필드의 모든 선수들이 각각의 포지션을 맡은 것과 비슷합니다. 브랜드들이 서로 상충되지 않고 파트너십을 발휘할 수 있지요. 이 각각의 브랜드를 사용하는 소비자들을 다 모으면, 전체 소비자가 되는 구도입니다.”
이런 철저한 현지화와 브랜드 관리 전략은 2008~2009 글로벌 금융위기도 큰 탈 없이 넘길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일까? 글로벌 소비재 기업인 P&G의 최고 마케팅책임자(CMO) 출신인 짐 스텐겔 미국 UCLA 경영대학원 교수는 2012년 에스티 로더는 이른바 ‘브랜드 이상’을 구현한 대표적 기업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브랜드 이상은 고객의 삶을 바꾸는 일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것을 일컫는 개념으로, 구글, 애플, 스타벅스 등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기업들의 성공 비결을 일러주는 용어다.
니치 향수 시장과 밀레니얼스 공략
적극적인 아시아 시장 공략으로 2011년 에스티 로더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매출은 사상 처음으로 20억 달러를 넘어섰다. 특히 중국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매출이 큰 지역으로 성장했다.
이렇듯 중국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에스티 로더는 2012년 9월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는 등 중국 시장 공략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을 교두보로 아시아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화장품업계의 경쟁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일까? 에스티 로더는 2010년대 이후로 시장 세분화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자.
에스티 로더는 2014년 그룹 차원에서 전략 기획실 형태의 ‘남성 스킨케어 그룹’을 별도로 신설했다. 이른바 ‘그루밍족’의 등장으로 남성 화장품 시장이 커진 데 따른 것이었다.
남성 스킨케어 그룹은 에스티 로더가 한 분야를 공략하기 위해 최초로 만든 전략 기획실이었는데, 에스티 로더는 2015년 9월 한국에서 아시아 최초로 남성을 위한 ‘파란병’ 세럼(피부에 영양과 수분·윤기를 공급하는 미용 농축액)을 내놓기도 했다.
에스티 로더는 니치 향수 시장에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 에스티 로더는 2014년 르 라보(Le Labo)를 인수했으며, 2015년 1월엔 고급 프랑스 향수 브랜드 프레데릭 말(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2016년 2월엔 향수 브랜드 바이 킬리안(By Kilian)을 인수했다.
대량 생산이 아닌 소수의 고객을 위해 만들어진 향수를 일러 니치 향수라 하는데, 기존의 평균적인 향수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어 화장품 업체들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다.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에게서 비싼 스킨케어 제품보다 메이크업이나 마스크팩에 투자하는 경향이 나타나자 에스티 로더는 2015년경부터는 밀레니얼 세대 공략도 강화하고 있다. 예컨대 에스티 로더가 2016년 11월 메이크업 브랜드 ‘투 페이스드(Too Faced)’를 14억 5,000만 달러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도 밀레니얼 세대 공략의 일환이었다.
그간 무료 샘플 제공과 3분 메이크업 등을 통해 화장품업계의 트렌드를 선도해온 에스티 로더가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뷰티 시장에서 또 어떤 트렌드를 제시하며 ‘뷰티 제국’을 유지해나갈지 지켜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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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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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용구, [브랜드 스타를 만드는 상상 엔진 I.D.E.A](명진출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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