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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 1911년 6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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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미국 |
설립자 | 찰스 플린트(Charles Flint) |
분야 | IT |
취급품목 | 정보통신기술(ICT) 통합 컨설팅 및 소프트웨어 컴퓨터 서비스 |
사이트 | http://www.ibm.com |
본사 주소 | 뉴욕 아몬크(Armonk, New York) |
요약 컴퓨터 산업의 선구자로 통하는 대표적인 하드웨어 기업이었지만 1990년대 이후부터 하드웨어 중심에서 벗어나 솔루션과 서비스에 집중하며 오늘날에는 세계 최대의 서비스․컨설팅․소프트웨어 기업 등으로 통하는 기업이다. IBM은 제품과 서비스가 통합된 형태로 고객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서비사티제이션(servitization)’을 하는 대표적 기업이기도 하다.
IBM의 탄생과 토머스 왓슨
IBM은 1911년 월스트리트의 투자가인 찰스 플린트 주도로 CTR(Computing Tabulating Recording Corporation)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플린트는 1890년 미국의 인구 총조사에 사용된 펀치카드 기계를 개발한 TMC(Tabulating Machine Company)를 인수하고 여기에 컴퓨팅 스케일 컴퍼니(Computing Scale Company of America)와 저장 장치 전문회사 인터내셔널 타임 리코딩 컴퍼니(International Time Recording Company)를 합병해 CTR을 설립했다. CTR은 초기 시계와 저울, 계산기 등을 생산했지만 각 부문 책임자들 사이에 분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적자를 면치 못했다.
오늘날 IBM의 토대를 놓은 인물은 토머스 J. 왓슨(Thomas J. Watson)이다. 그는 사무용품을 파는 NCR에서 영업 사원으로 승승장구하다 불공정 영업 관행을 조장한다는 혐의로 기소돼 해고당했다가 CTR에 입사했는데, 1914년 CTR의 CEO가 되었다. 뛰어난 세일즈맨이기도 했던 왓슨은 사장으로 취임한 후 직원들에게서 열정적인 노력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했다. 그는 임원들에게 “우리 회사가 대단한 미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달라”고 말하면서 ‘생각하라(Think)’를 경영 원칙으로 제시했다.
“우리 모두의 문제는 머리를 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로 뛰는 대가가 아니라 머리를 쓰는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THINK입니다.”
‘생각하라’는 고객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제품을 판매해야 한다는 왓슨의 영업 철학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후 IBM 주력 제품의 브랜드로 사용될 정도로 IBM 전체의 문화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왓슨 체제에서 CTR은 기업용 펀치카드 시스템을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24년 회장으로 취임한 왓슨은 이해 회사 이름을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머신(IBM: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으로 바꾸었다.(IBM이라는 이름은 1947년부터 정식으로 회사 이름이 되었다.) 이후 IBM은 유럽을 필두로 한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 시절 IBM은 도표 작성기, 출퇴근 기록기, 저울, 자동 육류 절단기 등을 주로 판매했는데, IBM을 대표한 것은 역시 펀치카드 분류기였다.
세일즈맨 출신이었지만 IBM의 미래가 기술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 왓슨은 끊임없이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29년 발생한 경제 대공황으로 대부분의 기업들이 연구개발비를 삭감했지만 왓슨은 경기가 다시 좋아지면 기술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연구개발에 매진해 IBM은 1933년 최초의 전동타자기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왓슨은 의료보험과 생명보험, 연금, 유급휴가 등을 제공하는 등 직원들의 애사심을 키우는 데에도 주력했다.
IBM의 지속적인 연구개발은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1935년 사회보장법에 서명하면서 빛을 발했다. 사회보장법의 통과로 미국 기업들은 직원들의 급여와 근무시간, 잔업수당 등의 고용 관련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연구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해온 IBM이 이를 관리하는 대규모 계약을 수주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훗날 IBM 직원들은 이 계약에 대해 ‘역사상 최대의 회계 업무’라고 했다.
왓슨은 IBM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지만 IBM에겐 잊고 싶은 기억을 남긴 인물이기도 했다. 미국의 탐사 작가 에드윈 블랙은 2001년 펴낸 저서 [IBM과 홀로코스트]에서 IBM의 펀치 카드 분류기가 유럽 내 독일군 점령지역의 유대인 확인에서부터 강제수용소 운영에 이르기까지 나치의 유대인 처형 모든 단계에서 활용됐다고 주장해 왓슨과 IBM이 ‘홀로코스트’에 협력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니 말이다. 왓슨은 히틀러를 찬양했으며 1937년 히틀러에게서 십자훈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왓슨 2세의 도박으로 메인프레임의 강자가 된 IBM
컴퓨터 산업의 선구자로 꼽히는 기업이지만 IBM이 처음부터 컴퓨터에 주목했던 것은 아니다. 왓슨은 1943년경 전 세계에 필요한 컴퓨터는 아마 5대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컴퓨터 산업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IBM은 1944년 하버드대학과 함께 ‘마크 1’이라는 불리는 최초의 전기 자동계산기를 만들었지만 왓슨은 ‘마크 1’은 상업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게 이를 잘 시사해준다.
IBM이 컴퓨터 산업에 주목한 것은 1952년 IBM의 사장이 된 토머스 왓슨 2세( Thomas J. Watson, Jr.) 때부터였다. 타자기나 천공카드 시스템 등 사무기기에 회사의 미래가 달렸다고 생각해 컴퓨터 산업을 배척한 아버지와 달리 왓슨 2세는 회사의 미래가 컴퓨터 기술에 있다고 생각하고 컴퓨터 산업에 적극 뛰어들었다. 왓슨 2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민간 기업용 시장을 겨냥한 컴퓨터였다.
왓슨 2세는 기업용 펀치카드 시스템에서 쌓은 IBM의 역량을 집결해 1954년 기업용 컴퓨터인 중형 컴퓨터 650을 선보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기업의 컴퓨터 수요가 급증하면서 IBM의 컴퓨터는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방송에서 CBS가 IBM의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컴퓨터 업계의 강자로 등극했다.
1956년 IBM의 CEO가 된 왓슨 2세는 1960년대 들어 기계식 펀치카드 생산은 아예 중단하고 전자식 컴퓨터 사업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당시 IBM은 미국에서 기업용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유럽에서도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왓슨 2세는 1964년 IBM의 컴퓨터는 물론이고 모든 컴퓨터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왓슨 2세는 기업, 과학, 국방 등 모든 것을 커버하겠다는 뜻에서 이 시스템에 ‘시스템360’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게 시사하듯, ‘시스템360’은 일종의 다목적 컴퓨터였다. 왓슨 2세는 ‘시스템360’을 개발하는 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투자한 비용보다 더 많은 50억 달러나 투자했는데, 이에 [포천]은 “50억 달러의 도박”이라면서 “최근 들어 가장 막중하고도 위험한 비즈니스 결단”이라고 했다.
대체 왓슨 2세는 왜 그런 도박을 감행한 것일까? 그건 기존 컴퓨터가 상호 소통이 불가능한 제각각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비즈니스용은 비즈니스용으로만 과학용은 과학용으로만, 군사용은 군사용으로만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한 자원 낭비도 심각한 문제였지만 고객이 겪는 불편과 비용 지출도 매우 컸다. 예컨대 고객이 컴퓨터 업그레이드를 하기 위해선 지금까지 투자한 제품은 모두 버려야만 했다. 요컨대 왓슨 2세는 ‘시스템360’을 통해 “고객들이 기존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교체하지 않고도 부품을 교체하거나 주변기기를 추가해 성능을 높일 수 있고, 기존에 사용하던 소프트웨어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어쨌든,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판매를 시작한 ‘시스템360’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시스템360’을 통해 IBM은 1969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메인프레임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하며 메인프레임의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메인프레임은 대기업이나 은행, 대학, 연구소 등에 쓰이는 대형 컴퓨터다. 되었으며, IBM이 컴퓨터 시장을 독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시스템360을 통해 IBM은 컴퓨터 산업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했는데, 이 때문에 IBM은 끊임없이 ‘반독점 위반’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컨대 미국 법무성은 1969년 IBM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서비스를 함께 묶어서 판매하지 못하도록 조치했으며, IBM은 1980년대 초반까지 미국 법무성의 주요 독점 행위 감시 대상 기업으로 지정되었다. 1970년대 IBM은 메인 프레임 컴퓨터 시장을 선도하면서도 슈퍼마켓의 출구 계산대나 초기형 현금 지급기 등을 통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등 혁신적인 신기술을 끊임없이 내놓았다.
PC 시장에 진출한 IBM
IBM은 1981년 개인용 컴퓨터(PC) 시장에 진출했다. 이때는 이미 PC 시장의 크기가 1억 달러 규모로 커진 이후였는데, 슈퍼컴퓨터 시장의 최강자였던 IBM은 왜 이렇게 뒤늦게 PC 시장에 뛰어들었을까? 그건 메인프레임 시장에서 너무나 잘나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PC가 발전할 경우,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메인프레임 시장이 쇠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실, IBM은 이보다 훨씬 일찍 PC 시장에 진출할 기회가 있었다. IBM은 이미 1975년 자체 순수 기술로 PC에 대한 프로토타입을 제작했지만 시장에서 성공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PC 시장에 진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예컨대 당시 IBM의 직원이었던 윌리엄 보위는 시장에 늦게 진출하면 경쟁력이 없다며 PC 시장에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쨌든 1980년 IBM 회장 프랭크 캐리는 IBM에서 PC 개발을 책임졌던 돈 에스트리지에게 단 1년의 시간을 주겠다면서 PC를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단 1년의 시간을 가지고선 IBM 자체 기술로 PC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에스트리지는 고민 끝에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컴퓨터 부품을 조달해 조립만 하는 방식으로 PC를 제작하기로 했다. 이때 IBM은 하드웨어는 인텔에게, 소프트웨어는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위탁 생산을 맡겼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바로 IBM의 호환용 PC였다.
PC 시장에 늦게 진입했지만 IBM 컴퓨터는 컴퓨터 산업에 지각변동을 불러왔는데, 왜 그랬을까? 이 시절 PC의 특성 때문이었다. 당시 PC의 가장 큰 문제는 컴퓨터에 대한 표준화된 규격이 없어 호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사용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는데, IBM은 컴퓨터에 대한 표준 규격을 제공하고 다른 회사들이 이 규격을 지킨 컴퓨터를 생산할 수 있도록 개방형 구조를 채택해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BM이 PC 시장에 혁명적인 불러오자 당시 PC 시장을 주름잡고 있던 애플과 IBM 사이엔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예컨대 당시 애플 CEO 스티브 잡스는 IBM의 PC엔 새로운 기술이 하나도 없다고 비난을 퍼부었으며, 1984년 미식축구 슈퍼볼 경기 광고에선 애플의 매킨토시를 광고하면서 IBM을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독재자 ‘빅브러더’에 빗대기까지 했다. 하지만 애플의 공세는 대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경제 전문지 [포천]이 1983년부터 1986년까지 4년 연속 IBM을 초우량 기업 1위로 선정했으며, 1987년에는 시가총액 787억 달러를 기록해 세계 1위 기업이 되었다. 당시 IBM은 빅 블루(Big Blue)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파란색이 IBM을 상징하는 때문에 붙은 것이다. IBM은 로고 색깔을 파란색으로 했으며, IBM 영업 사원들 역시 흰색 와이셔츠에 파란색 양복을 입었다. 이 시절 IBM의 누렸던 위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하워드 로스먼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 세상 기술 저항 세력이 가장 혐오한 기업은 IBM이었다. 거대하고 획일적인 이 빅 블루는 기술 분야 최초의 대형 기업으로 떠올라서 시종일관 업계를 지배했다. (IBM은 반독점법 위반으로 세 번이나 기소되었다.) 이들의 도표 작성기, 출퇴근 기록기, 타자기 등이 처음으로 업계 표준을 확립한 1920년대부터 PC가 데스크톱 컴퓨터의 모델이 된 1980년대까지, 기술적 측면으로 보면 그 누구도 이들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들의 악명 높은 순응주의적 기업 문화를 생각해보면, 왜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머신(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이 비판 세력의 끊임없는 분노의 표적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루 거스너의 IBM 부활 프로젝트
영원할 것 같았던 IBM의 위세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컴팩을 위시한 호환 컴퓨터 업체가 등장하고 MS의 운영체제(OS) 윈도와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PC의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급격하게 사라지기 시작해 1993년 한 해 동안 IBM은 80억 달러에 이르는 손실을 기록했다. 시장에서는 ‘IBM은 이제 끝났다’는 전망마저 나왔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1993년 IBM의 구세주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IBM의 전설적인 CEO 루 거스너(Louis Gerstner)였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맥킨지&컴퍼니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했던 거스너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사장과 식품 기업 RJR 나비스코의 CEO로 활동하며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지만 애초 거스너가 IBM의 CEO로 발탁되자 업계와 시장의 반응은 매우 차가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스너의 이력이 시사하듯, 거스너는 컴퓨터와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첨단 IT기업을 위기에서 구출해낼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IBM 이사회는 왜 거스너를 CEO로 영입했던 것일까? 그건 거스너가 RJR 나비스코보여주였던 구조조정 능력 때문으로, 이 당시 IBM 이사회가 거스너에게 기대한 것은 IBM을 공중 분해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IBM 이사회는 경쟁자들의 성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IBM을 사업 부문에 따라 여러 개의 회사로 분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언론과 월스트리트 전문가, 관련 업계 종사자들도 대체로 이 주장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거스너는 IBM 이사회의 생각과 달리 IBM 분사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는 컴퓨터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면서도 다양한 사업 분야를 갖고 있는 게 IBM의 진정한 강점이라고 생각해 “전부가 아니면 전무다”를 강조하며 회사 분할에 반대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회사의 고유한 강점을 스스로 포기하고, IBM을 소규모 부품 공급업자로 분사하려는 생각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스너가 제시한 IBM 부활 비전은 기술 관련 솔루션 제공 기업으로 변모하는 것이었다. 컴퓨터 전반에 대한 IBM의 강점을 활용해 기술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 IBM이 통합된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는 게 거스너의 의중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의 비전은 이른바 ‘작은 지구를 위한 솔루션(Solution for a Planet)’이라는 광고를 통해 표출되었다. 오글비 앤드 매더가 제작한 이 광고는 체코 수녀들부터 파리의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기술적 요구를 IMB이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를 짧은 이야기로 담고 있었는데, IBM이 컴퓨터와 관련된 고객들의 모든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세계적인 기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회사가 제자리를 찾자 거스너는 PC 시장을 장악한 MS와의 대결 대신 인터넷에 주목했다. 인터넷이 기업 간 전자상거래에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직감한 거스너는 “이제 PC는 모두 잊어라”며 1996년부터 IBM을 ‘e-비즈니스 전문 기업’으로 리브랜딩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는 큰 모험이기도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인터넷을 기업의 성장 동력으로 삼는 기업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IBM이 가지고 있는 컴퓨터 기술을 활용해서 기업들이 인터넷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IT 환경을 구축해주는 사업은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2002년까지 IBM CEO로 활동한 거스너 체제에서 IBM은 완전히 새로운 기업이 되었다. 이전까지 IBM은 하드웨어 중심의 기업이었지만 거스너 체제에서 IBM은 IT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시스템 설계, 컨설팅 등을 고객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서비스와 소프트웨어 중심의 토털 솔루션 업체로 거듭난 것이다. 대대적인 혁신을 거쳐 세계 최대의 서비스 및 컨설팅,e비즈니스 회사로 다시 태어났다.
PC 사업부 매각과 클라우드 서비스 강화
거스너의 뒤를 이어 2002년부터 IBM의 CEO 명함을 파 활동한 샘 팔미사노(Sam Palmisano) 역시 거스너의 유산을 계승했다. 팔미사노 체제에서 IBM은 확실하게 기업 체질을 바꾼 것으로 평가받는다. 팔미사노는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프린터 등 과거 주력 사업군을 매각하는 대신 소프트웨어 및 IT 서비스, 바이오 등 신사업 관련 회사 100여 개를 인수 합병하면서 IBM의 정체성을 소프트웨어와 솔루션을 제공하는 서비스 회사로 확고히 했다. 예컨대 1998년 44%를 차지했던 하드웨어 분야 매출 비중은 2011년 16.7%로 줄어든 반면 기업 컨설팅 등 서비스 사업 비중은 53%로 증가했으며, 1993년 총 매출의 27%에 불과하던 IBM의 서비스 사업은 2002년 총 매출의 45%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IBM에서 하드웨어의 비중을 줄이고 소프트웨어 분야의 키우는데 주력했던 팔미사노의 정책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은 2005년 IBM의 상징과도 같았던 PC 사업부를 중국의 레노버(Lenovo)에게 매각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PC 사업부 매각과 관련해 팔미사노는 이렇게 말했다.
“IBM은 더 이상 컴퓨터 회사가 아닙니다. 21세기에 IBM은 국가 간 경계 없이 자산과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생산수단을 통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글로벌 기업으로 변모해야 합니다.”
2012년 1월 IBM의 CEO가 된 버지니아 로메티(Virginia Marie Rometty) 역시 하드웨어 사업 분야는 축소하고 IT 컨설팅과 소프트웨어에 치중했다. 로메티는 IBM 설립 100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으로서 CEO가 된 인물이다. 로메티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영역은 빅데이터 시대의 개막에 따른 클라우드 서비스 사업이다. 클라우드는 서비스 사업자의 서버를 일컫는 말로,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를 인터넷과 연결된 중앙 컴퓨터에 저장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나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다. 빅데이터의 활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클라우드 서비스가 필요하기 때문에 구글, 애플, 아마존, 인텔 등 세계적인 IT기업들이 모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사업 영역이다.
취임 이후 계속해서 클라우드 서비스를 강조했던 로메티는 전 세계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기 위해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로메티는 2013년 호스팅 및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인 소프트레이어를 20억 달러를 인수해 13개의 데이터센터를 확보했으며, 2013년 10월엔 소셜, 모바일, 빅 데이터의 활용을 위해 프라이빗(Private)과 하이브리드(Hybrid) 클라우드를 구축하려는 고객을 겨냥해 새로운 시스템과 솔루션을 발표했다. 로메티는 또 2014년 1월엔 전 세계에 클라우드 서비스를 위한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겠다며 클라우드 컴퓨팅에 12억 달러(한화로 약 1조 2,720억 원)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로메티가 추진하고 있는 IBM의 클라우드 사업과 관련해 가장 눈여겨볼 것은 인지 컴퓨팅을 활용한 데이터 분석 서비스다. 인지 컴퓨팅(코그너티브 컴퓨팅, cognitive computing)이란 인간의 일상 언어인 자연어를 이해하고 자신이 학습한 정보를 바탕으로 해답을 제안하는 기술을 말한다. IBM은 인터넷·모바일 보급과 SNS 혁명, 사물인터넷(IoT) 기술의 등장으로 정부와 기업이 보유한 빅데이터의 양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이를 효율적으로 분석해 통찰력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전문가나 기술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에 주목해 데이터 분석 서비스에 공을 들이고 있는데, 이를 일러 코그너티브 비즈니스(Cognitive Business)라 한다. ‘코그너티브 비즈니스’란 각종 모바일 장치와 인프라,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확보된 빅데이터와 인지(Cognition) 컴퓨팅 기술을 기반으로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을 완벽하게 실현해 각 산업 영역에서 디지털 혁신을 일으킨다는 개념이다.
IBM의 코그너티브 비즈니스
IBM은 2014년 10월 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한 ‘IBM 인사이트 2015’에서 코그너티브 비즈니스를 전 비즈니스 영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는데, 이 중심에 IBM이 자랑하는 인공지능 슈퍼컴퓨터 ‘왓슨(Watson)’이 있다. 왓슨은 스스로 사물을 인식하고 이를 데이터화해 분석하며 새로운 지식을 학습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컴퓨터다. 왓슨이라는 이름은 IBM의 초창기 CEO였던 토머스 왓슨의 이름에서 따왔다.
IBM은 2005년부터 10억 달러(약 1조 2,000억 원)를 투자해 왓슨을 개발했는데, 2011년 미국의 유명 퀴즈쇼 ‘제퍼디(Jeopardy)’에 출연해 74회 연속 우승 기록을 갖고 있는 챔피언 켄 제닝스를 이겨 ‘사람보다 똑똑한 컴퓨터’로 유명해졌다. 이게 시사하듯, 왓슨은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질문을 하는 사람의 생각과 상황까지 추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수십만 개의 데이터를 내려 받아 분석하고 언어를 해석할 수 있으며, 스스로 검토한 조사에 기반해 의사 결정도 할 수 있다.
IBM은 지속적으로 왓슨의 인공지능 기술을 개량하고 있는데, IBM은 왓슨이 학습을 통해 이른바 ‘암흑 정보(Dark Data)’까지 이해하고 분석해 의미 있는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암흑 정보란 사람의 도움 없이는 컴퓨터가 인식하지 못하는 정보를 말한다. 의학 분야 데이터의 88%, 정부·교육 분야 84%, 미디어 분야의 82%가 암흑 정보로 알려져 있다.
IBM이 왓슨으로 인해 비즈니스 영역엔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컨대 IBM 수석부사장 밥 피치아노(Picciano) “산업혁명이 대량(大量) 생산의 시대를, IT 혁명이 대량 정보의 시대를 열었다면 왓슨의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결합은 ‘대량 지식’의 시대를 열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감(感)이나 운(運)에 맡겼던 수많은 일을 왓슨의 도움을 얻어 확신을 갖고 할 수 있게 됐다.”
IBM의 궁극적 목표는 세상의 다양한 기기에 왓슨을 플랫폼처럼 탑재하는 것이다. IBM은 이미 2014년부터 왓슨 플랫폼화 작업에 나서 클라우드 기반의 왓슨 기술 개발과 상용화를 전담하는 왓슨 그룹을 신설했으며, 기업들이 온라인으로 왓슨에 접속해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2016년 3월 현재 전 세계 36개 국가에서 400개 이상의 기업·단체가 왓슨을 활용하고 있는데, IBM은 일본의 소프트뱅크텔레콤과의 협업을 통해 소프트뱅크의 가정용 로봇 페퍼에 왓슨을 접목하고 실생활과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2016년 2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에서 IBM 역사상 첫 CES 기조 연설자로 나선 로메티는 IBM을 “코그너티브 솔루션과 클라우드 플랫폼 회사”로 재정의했다. 이날 로메티는 “많은 기업들이 이미 디지털화 되었지만 디지털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토대일 뿐이어서 디지털만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성공할 수 없다”면서 “차별화된 가치는 ‘코그너티브 컴퓨팅’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빅데이터 시대를 맞아 데이터를 ‘차세대 천연자원’으로 규정하며 ICT(정보통신기술) 종합 솔루션 업체를 꿈꾸고 있는 IBM의 행보를 지켜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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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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