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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 경찰청 산하에 있었던 대간첩 수사기관의 하나. 대간첩 혐의자의 취조를 위해 설립된 대공분실 가운데 하나로 갈월동 남영역 옆에 있어 '남영동 대공분실'이라고 불려졌다. 1976년 건축된 건물은 취조를 위해 특수하게 설계되었으며, 군사독재 시절 김근태, 박종철 등 민주화 운동가들을 취조, 고문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다. 1987년 물고문으로 인한 박종철의 죽음으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2005년 경찰청 인권센터로 기능이 변경되었다.
개요
한국 경찰청 산하에 있었던 대공 수사기관의 하나. 건물은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있었으나, 바로 옆에 서울지하철 남영역이 있어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즉 수사기관의 이름이자, 당시에는 건물 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대공분실은 경찰청 치안본부에서 대간첩 수사를 위해 1948년 특수정보과 중앙분실로 설치했던 조직으로, 1970년에는 정보과 공작분실, 1976년에는 치안본부 대공과 대공분실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남영동 외에도 여러 곳에 대공분실이 있었는데, 각각의 건물에는 대외 위장을 위해 실체가 없는 회사나 기관의 상호를 달기도 했다.
건물의 특징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물은 대지 약 8360m2에 지어진 7층 건물로, 1976년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설계, 건축되었다. 외벽은 검은색 벽돌로 되어 있는데, 행정을 위한 공간과 취조를 위한 공간이 구분되어 서로 마주칠 일이 없도록 되어 있었으며, 1층에서 5층 취조실로 올라가는 원형 계단은 중간 계단참이 없어서, 눈이 가려진 피의자가 자신의 위치나 층수, 방향을 쉽게 알 수 없는 가운데 올라갈수록 공포감이 증폭되게 설계되었다.
5층에는 16개의 취조실이 있었으며 다른 층에 비해 창문의 폭이 30cm로 아주 좁고 작게 설계되어, 안에서는 밖을 보기 어려웠고, 밖에서도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취조실은 문이 서로 엇갈려서, 동시에 열려 있어도 취조 받는 사람은 맞은쪽 방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취조실에는 욕조와 변기, 침대, 의자와 책상이 있었으며, 24시간 피의자를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피의자의 공포심을 유발하여 고문의 효과를 높일 수 있도록 조명과 전구의 형태도 지정되어 있었으며, 비명소리가 밖에서 들리지 않도록 방음시설이 설치되었다.
역사적 의미
군사독재 시기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대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운동가들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었는데, 이 건물에서 벌어진 고문사건들이 후에 세상에 알려지면서 역사적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에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김근태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사실이 후에 알려졌고, 1987년 1월에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물고문을 받고 사망한 사건이 밝혀졌다.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같은 해 6월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사건과 함께 전국민적 저항운동을 일으켜, 결국 군사정권의 포기를 상징하는 노태우의 6.29선언과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현황
남영동 대공분실은 이후에도 보안분실로 사용되다가 2005년 10월 4일 경찰청 인권센터로 변경되었으며, 2008년 6월에는 4층과 5층에 박종철 기념전시실을 개관했다.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71길 37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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