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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에 소리꾼까지, 경성이 소란하다
희대의 운영 주무부서인 협률사에서는 처음에 어떤 일을 했을까?
전해오는 말을 들으니 최근 협률사에서 재능을 다양하게 발휘할 수 있는 창기를 조직하는데 태의원 소속 의녀와 상의사 침선비 등을 옮겨와 이름하여 관기라 하고, 무명색 삼패 등을 같은 식으로 하여 이름하여 예기(藝妓)라 하고 신음률을 교습시킨다더라.
- 「황성신문」, 1902년 8월 25일자
이는 전속기생을 두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들은 노래를 비롯한 각종 기예를 전문으로 하는 기생이었다.
기사 내용 중 관기는 조선조 관아에 소속되어 연회 때 가무를 담당한 기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궐 내의 의무 관련기관인 태의원이나 의복을 담당한 상의사에 소속된 의녀와 침선비들을 말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궁궐의 예의범절로 철저하게 교육받은 여성들이었으며, 그들을 협률사로 이관시켜 신음률을 가르쳤던 것이다.
또한 무명색 삼패는 이들보다 교양수준이 낮은 시중의 기생들을 말한다. 기생에는 일패, 이패, 삼패가 있었는데 그중 삼패는 이리저리 불려다니면서 소리와 기예를 파는 여성들을 지칭했다. 그런데 그 삼패를 불러 예기라는 칭호를 주고 역시 신음률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신음률이란 무엇일까? 이는 당시 서울에서 유행하던 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서울에서는 앉아서 부르는 잡가가 크게 유행했으며 서서 부르는 산타령 역시 어디서나 씩씩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수심가」, 「육자배기」, 「배따라기」 등 평안도, 전라도의 가락들도 널리 퍼져 있었다. 거기에 판소리까지 유명세를 타고 있어서 서울의 소리는 그야말로 팔도 소리의 집합이라 할 만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기본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이 지역 전통의 소리들, 가곡이나 가사 특히 더욱 대중화된 시조를 비롯해 다양하게 불려지는 서울소리였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대중이 쉽게 부를 수 있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단연 잡가(雜歌)라는 명칭으로 뭉뚱그려 표현한 노래들이었다.
그런 노래들은 대개 가사가 선정적이고 곡조도 비속했다. 일부러 꺾어 부르는 부분이 많고, 자지러지게 휘몰아가는 부분도 있었다. 장님을 골리기도 하고 장사치를 흉내내기도 했다. 그런데 대중은 그런 소리들을 더 좋아했다. 대중이 좋아하자 창자는 더욱 신이 났고 특정 분야를 유난히 잘 부르는 창자도 나타났는데, 대중은 이들에게도 서슴없이 명창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이런 시류를 감지한 협률사는 우선 기생들에게 유행하는 소리를 가르쳐 무대에 올리려 했다. 말하자면 국립극장을 지어놓고 가장 먼저 연희단체부터 만든 것이다. 일반 대중에게는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한 것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한 연희단체였다. 즉, 전국적인 규모의 연희단체를 조직한 것인데, 이때 주역을 맡은 이는 판소리 명창 김창환(金昌煥)과 송만갑(宋萬甲)이었다. 이들은 판소리 애호가였던 고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전국의 명창을 모으라는 칙명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모집된 전국의 소리꾼들은 모두 170여 명에 이르렀다. 주요인물은 김창환, 송만갑 이외에 박춘재(朴春載), 문영수(文永洙), 이정화(李正和), 홍도(紅桃), 보패(寶貝) 등 경서도 명창들과 이동백(李東伯), 강용환(姜龍煥), 염덕준(廉德俊), 유공렬(劉公烈), 허금파(許錦波), 강소향(姜小香) 등 판소리 명창들이었다.
이중 박춘재는 당시 가장 유명한 서울소리 명창이었고, 문영수와 이정화는 평양에서 온 명창이었다. 또 홍도와 보패는 서울기생으로서 다른 일류명창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협률사 희대에서 처음 펼쳐진 이들의 공연은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당시까지 있었던 조선 전통음악의 진수를 확인시키는 자리였다. 서울 · 경기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수백 년 전부터 가장 가깝게 교류했던 서도소리, 그리고 서울에 와서 크게 환영을 받은 판소리까지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민간신문이 나오기 전까지 유일한 한글신문이었던 「매일신보」에는 협률사 공연이 처음으로 있었던 당시의 정황을 수록한 몽외생(夢外生)이라는 사람의 투고가 실려 있다. ‘연희계 일별’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글이 눈길을 끄는 것은 협률사 공연이 얼마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알 수 있는 공연장 안팎의 분위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남녀노유를 물론하고 해가 지기 전에 그 대문 앞에 산같이 모여들어 각기 다투어 표를 사는데 좀체로 살 수도 없고, 좀체로 구경할 수도 없으며, 일변 안에서는 질탕한 풍류와 노래, 춤이 자지러짐에 더욱 마음이 요동하여 좌정우측으로 구경하고 나온 자이면 입마다 모두 벌어지고, 좋아라고 칭찬하는 소리는 귀가 아파 들을 수 없던 터이라.
- 「매일신보」, 1915년 1월 8일자
이는 백 년 전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협률사 희대라는 공연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측하기에 좋은 자료이다. 당시 서울은 민족이 부르던 소리들의 길목이었으며, 그것이 모여 처음으로 일대 향연을 벌인 곳이 바로 협률사 공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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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판사와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특히 우리나라 근현대 문화사의 뿌리를 찾는 일에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이것이 한국 최초>, <한국 최초 101장면> 등이 있다.
출처
경성시대 연예가를 주름잡은 대스타들을 만나다! 구한말부터 광복전까지 약 50년동안의 근대 경성 연예사(演藝史)를 돌아본다. 한국 최초의 극장, 최초의 흥행사, 최초의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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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기생에 소리꾼까지, 경성이 소란하다 – 여러분이시여 기쁜 소식이 왔습니다, 김은신,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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