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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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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열

다른 표기 언어 金武烈 동의어 김성열, 金聖烈, 이영우, 李榮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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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7년, 경상북도 대구(大邱)
사망 1929년 9월 13일
본관 미상
주요활동 1928년 북간도 훈춘의 대공단 독립운동자금 모집 중 순국
포상훈격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
관련 인물/단체 대공단

1887년 생으로 추정되며,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중구(中區) 계산동(桂山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성열(金聖烈) ・ 이영우(李榮雨)이다.

김무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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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중반에 교원을 역임했고, 1920년 4월 인천(仁川)경찰서의 순사가 되었다. 1925년경 상하이(上海)로 건너간 후 중국 각지와 만주를 돌아다니다가 1927년 11월 독립군단 조직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군자금을 조성하려고 전라북도 전주(全州) 출신 동지인 김판암(金判岩)과 함께 비밀리 입국하였다.

1928년 4월 11일 밤에 경기 고양군(高陽郡) 신도면(神道面) 삼송리(三松里)에 당도하였다. 이곳에서 정찬기(鄭瓚璣)의 잡화상에 들어가 정찬기를 권총으로 위협하고 현금 10원을 받아냈다. 그러고는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실수로 발포하였다. 총소리에 놀라 뛰쳐나온 주민 오천만(吳千萬)을 신고하러 가는 것으로 오인하여 총으로 살해하였다.

경찰이 출동하고 수배령이 내리자 피신하여, 함경남도 원산(元山)과 함경북도 회령(會寧) 및 북간도 룽징(龍井)을 거쳐 훈춘(琿春)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평안남도 출신 동지 방용신(方鏞信)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로 대공단(大公團)을 발족시켰다. 이어 12연발 브라우닝 권총과 실탄 70여 발을 휴대하고 두만강을 건너 재차 밀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러다가 동년 7월 21일 함북 종성(鍾城)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김무열 순사 이력 보도(『매일신보』 1928.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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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경찰서의 취조를 받고 동년 7월 2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29년 4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강도, 살인, 총포화약류취체규칙 위반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항소하였으나 동년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동년 9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집필자 :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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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동아일보』 1928.5.3, 1928.5.5, 1928. 7.25, 1928.7.26, 1928.7.28, 1928.7.29, 1928.8.4, 1929.3.3, 1929.3.10, 1929.3.28, 1919.4.18, 1929. 4.19, 1929.5.25, 1929.6.1, 1929.7.24, 1929.8.2
  • ・ 『매일신보』 1928.7.25, 1928.7.26, 1928.7.27, 1928.7.28, 1928.7.29, 1928.8.2, 1929.3.28, 1929.4.18, 1929.6.1, 1929.8.2
  • ・ 『조선일보』 1929.9.15
  • ・ 『조선총독부관보』 1929.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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