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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9년 3월 9일, 전남 제주(濟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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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6년 7월 12일 |
관련 사건 | 군산 만세시위 |
본관 | 신천(信川) |
주요활동 | 1919년 3월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 공판장 만세시위 주도 |
포상훈격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
1899년 3월 9일 전라남도 제주군 중문면(中文面) 중문리(中文里, 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일대)에서 강이석(康利錫)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삼우(三憂)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1914년 중문에서 전도인(傳道人) 최대현(崔大賢)에 의해 동향 친구 강규언(姜圭彦)과 함께 기독교인이 되었다. 당시 교회에서 두 사람을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 현 군산시 구암동)에 있는 기독교계 사립 영명학교(永明學校)로 유학을 보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면서 3월 5일 군산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은 주동자 격인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동년 3월 31일 군산 만세 시위 때 체포된 30여 명의 교사와 학생이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친구 강규언의 재판 과정을 보고자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평소 존경하던 교사와 학우들이 수갑으로 묶여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방청석에서 먼저 벌떡 일어서서 모자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함께 있던 많은 방청객도 단숨에 호응하여 재판장을 만세 소리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을 주동한 일로 즉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그런데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 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자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다.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목사로 서품(敍品)되고 경남 거창(居昌), 전남 무안(務安), 서귀포(西歸浦), 한림(翰林) 등지에서 포교 활동에 진력하였다. 1942년 제주의 한림교회 목사로 부임하였고 광복이 될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1945년 7월 6일 미 공군의 공습으로 한림교회 예배당과 목사관이 모두 파괴되었다. 이때 부상을 당하였으며, 누이와 교인 몇 명은 사망하였다.
광복 후 1946년 4월 미 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한림신사(翰林神社)가 있던 곳에 한림교회를 다시 지었고, 1971년 은퇴할 때까지 목회 활동에 진력하였다. 1953년 제주대학이 개설되자 종교학 강의를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문태선 목사와 함께 『제주 선교 70년사』를 편저(編著)하여 제주도의 기독교 역사를 정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집필자 : 정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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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4.24
- ・ 「판결문」, 고등법원, 1919.5.22
- ・ 「강문호」,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출처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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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강문호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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