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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1년 7월 27일, 평남 영원(寧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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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년 9월 9일 |
관련 사건 | 신민회 사건, 국민대표회의 |
본관 | 연안(延安) |
주요활동 | 1907년 신민회 활동, 평양 대성학교 설립, 1911년 신민회사건으로 체포, 1914년 기성볼단 고문, 1919년 중국 안둥에서 안동청년단 조직, 상하이에서 독립신문사 기자, 1920년 임시정부 지방선전부 이사, 1922년 임시의정원 의원, 시사책진회 참가, 1923년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1930년 한국독립당 참가, 임시의정원 부의장, 1935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
포상훈격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
관련 인물/단체 | 신민회, 기성볼단, 안동청년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흥사단, 한국독립당 |
1881년 7월 26일 평남 영원군(寧遠郡) 동면에서 아버지 차시헌(車始軒)과 어머니 서시은(徐始恩)의 4남 2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호는 동암(東巖)이다. 차시헌은 평북 선천(宣川) 출신으로 초시에 합격한 바 있는 유생 출신이었다. 차시헌은 1895년 여름 서울에서 언더우드를 만나면서, 열렬한 기독교 신자로 변모했다.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이주한 차시헌은 1897년 평양 교외의 장천마을에서 최초의 농촌교회인 장천(將泉)교회를 세우며 기독교 전파에 앞장섰다. 동암 차리석은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아버지 차시헌은 동암이 기독교적 신앙과 신학문의 지혜를 가지고 새 시대를 살아가길 바랐다. 그리하여 1897년 가을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의 '사랑방학급(숭실학당의 전신)'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혔다.
차시헌은 1898년 독립협회 평양지회가 세워질 때 장천교회의 한석진(韓錫晉) 목사, 자신의 동생 차계헌(車啓軒) 등과 함께 참가하는 등 근대 개혁에 대한 의지도 강한 사람이었다. 18세 청년 동암도 자연스럽게 평양지회를 출입했으며, 그곳에서 21세의 청년 도산 안창호를 만날 수 있었다. 1898년 쾌재정에서 행한 도산의 연설은 그가 세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1904년 최광옥(崔光玉) 등과 숭실학교를 1회로 졸업한 그는 1906년 『그리스도신문』이 공모한 '비유문제'에서 장원을 차지할 만큼 신앙심이 깊은 청년이었다. 숭실학교에 다닐 때부터 세계지리에 관심이 높아 『사민필지(四民必知)』를 늘 품에 안고 살았으며, 1906년 『공립신보(共立新報)』에 기고한 논설에서 보듯이, 새 시대의 변화에 귀를 기울였다.
졸업 후 교직에 몸담고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던 무렵, 조국은 을사늑약으로 통감정치에 놓이면서 망국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계몽주의적 인식에서 1907년 초 서우학회(西友學會)에도 가입해 보았지만, 그것은 학문이나 신앙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1907년 미국에서 도산이 들어오면서, 도산과 뜻깊은 해후를 가졌다. 새 시대를 꿈꾸던 10년 전의 만남과 달리, 이제 두 사람은 스러지는 국운을 바로잡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동암은 미주에서 발행된 『공립신보』 국내발매소를 운영, 평양지역 배포책임을 맡기도 했다. 27세의 동암은 1907년 봄 서울로 올라와 세브란스 병원 앞 김형제상회 2층 사무실에서 안태국(安泰國)과 함께 신민회 사업에 몰두하던 도산을 보좌하였다.
그리고 신민회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설립과 청년학우회의 핵심 인사로 활동했다. 이 무렵 민족교육은 구국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대성학교는 그 중에도 남달랐다. 도산의 민족관과 교육관 아래 학생들은 장래의 구국지사로서, 독립군으로서 양성되고 있었다. 대성학교 내에 중심조직을 두고 무실역행(務實力行), 충의용감(忠義勇敢)의 정신을 수양하던 청년학우회도 마찬가지였다. 조신성(趙信聖)이 경영하던 진명여학교에 출강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철혈여장부' 조신성과의 인연은 3 ・ 1운동 직후 평안도 지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독립청년단의 무장투쟁 때에도 깊게 이어져 나갔다.
1910년 3월 도산이 망명한 뒤에는 장응진(張膺振)과 함께 대성학교와 청년학우회의 운영을 맡았다.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대성학교에서 일제의 강점을 반대하는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11년 10월 '신민회사건'으로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14년 5월, 대성학교 출신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기성볼단(箕成볼團)의 고문으로 독립운동을 재개했다. 축구단을 가장한 기성볼단 은 미국의 네브라스카 무관학교, 서간도 무관학교 등에서 군사훈련을 배워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하려던 청년비밀단체였다. 1915년 3월에 발각되고 말았지만, 대성학교의 교육과 정신이 독립운동으로 계승된 사례였다.
이무렵 진남포에서 임치정 ・ 안세환 등과 광산을 경영하다가 3 ・ 1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반드시 조국독립을 이루겠다'는 의지에서 '필성(必成)'이라 개명하고 중국 안둥(安東, 현재의 단동)으로 망명해 '안동청년단(安東靑年團)'을 조직했다. 중국 안둥일대와 서북지역은 하나의 독립운동세력권을 형성하면서, 대한독립청년단 등의 청년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는 숭실학교와 대성학교 출신의 기독교 청년들이 대거 참가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내의 청년비밀결사들과 연대를 이루며 임시정부를 지원했고, 때론 강렬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숭실학교와 대성학교 출신이 주축을 이루었던 평양 대한국민회의 대한독립청년단이나, 조신성이 맹산에서 대한독립청년단과 연결되어 활약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안동청년단'은 동암의 독립운동 이력에서도 새롭지만, 국내와의 연결을 끊임없이 꾀하던 도산의 독립운동 방략을 구체적으로 추구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안둥에서 청년단 조직 기반을 다진 뒤 상하이로 건너가 맡았던 첫 직분은 독립신문사 기자였다. 임시정부 수립 직후 도산은 임시정부 기관지로서 『독립신문』 간행에 힘을 쏟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독립신문사의 일을 보게 된 것이다. 동암의 언론활동은 1932년 한국독립당의 기관지 『상해신문』,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韓民)』,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등의 간행으로 이어졌다. 1919년 9월 부터 발행된 공보가 그 힘든 시기인 유랑과정에서도 단절 없이 발행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동암의 공로였다.
그러나 『독립신문』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이 무렵 도산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 중에 하나가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도산은 연통제를 시행했으나, 1920년 초 대부분 조직이 파괴당하면서 새롭게 시도한 것이 지방선전부였다. 지방선전부는 국내와 해외동포들의 연락을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항일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1920년 3월 임시정부에 설치된 비밀기관이었다. 동암은 1920년 5월 임시정부 지방선전부 이사의 일을 맡았다.
1921년 들어 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 문제로 혼미를 거듭했다. 임시정부가 수립 초기의 구심력을 상실하면서 독립운동계는 새로운 통할 기구수립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임시정부 노동총판직을 사퇴한 도산은 1921년 5월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창하며 국민대표회기성회를 조직했다. 동암은 지방선전부를 나와 독립신문사 편집국장으로 복귀하는 한편 국민대표회기성회에 참가했다.
국민대표회기성회에 이어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할 계획이었으나, 전략을 바꿔 1922년 2월 임시의정원에 들어가 국민대표회의를 지원했다. 제10회 임시의정원회의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놓고 찬성과 반대 측의 열띤 토론장이 되었다. 이때 동암은 임득산(林得山), 김붕준(金朋濬), 조덕진(趙德津) 등 도산 계열의 인사들과 함께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요구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저지를 받아 열띤 공방만 계속될 뿐 승인을 얻어내기 어려워지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니 '인민청원안'이 그것이다. 상해거류민 102명의 연서로 제출된 인민청원안의 요지는 임시의정원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추진운동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혼란해진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각계의 대표회인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5개월에 걸친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격론 끝에 국민대표회의 지지파의 주장대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찬성안과 대통령 불신임안을 통과시켰지만, 반대파의 거센 저항으로 세력 간의 분열만 가속시킨 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1922년 7월 임시의정원의 내분 수습과 독립운동계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할 때 참가했다. 시국문제를 먼저 장외에서 토의하여 의견을 수렴하고, 공론을 세우고자 했으나, 정파 간의 이해를 극복하지 못한 채 시사책진회도 결성된지 한 달여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 1~2차리석이 송종익에게 보낸 편지(1922. 7. 30)
1923년 5월 제1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평안도 지역 의원으로 다시 참가했다. 이 무렵 임시의정원에서는 법제 개정과 임시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광복운동의 통일적 진행 등을 골자로 하는 '대국쇄신안'을 가결시켰다. 아울러 임시대통령제의 폐지 문제도 상정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옹호파들의 반발에 부딪혀 무효화되기에 이르렀고, 임시의정원은 다시 혼란에 휩싸였다.
1923년 초부터 개최된 국민대표회의가 창조 ・ 개조 ・ 임정옹호 등 정파 간의 이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렬되자 동암은 의원직을 사임하고 임시의정원을 떠났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난징(南京)으로 거점을 옮겨, 흥사단과 동명학원 운영 등 독립운동 인적 기반의 확대 및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23년 12월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임시위원장 대리로, 1924년 2월에는 원동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임되며 흥사단 단무를 총괄했다. 같은 해 3월에는 도산과 함께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세워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인적 기반을 확대하는데 힘을 쏟았다. 중등과정 및 대학예비과정을 설치한 동명학원은 차세대 독립운동자 양성소로서, 중국 관내에서 중등 한인교육기관으로는 유일한 것이었다. 동명학원의 기지 선정, 교사 설계 및 건축, 개교 등 학원 설립의 실무를 총괄했다.
1925년 동암의 주도로 흥사단 창립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동암은 원동흥사단을 청년중심의 단체로 개조, 발전시키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6년 동명학원이 폐쇄된 이후, 국내에서 잡지 『동광(東光)』을 창간하기도 했다.
임시의정원에 다시 돌아온 것은 7년여 만인 1930년이었다. 그동안 주로 흥사단 사업과 교육운동에 매진했으나, 1928년 이후 흥사단이 독립운동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흥사단 내부에서도 혁명운동 단체로의 전환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독립운동계는 도산의 선창으로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이 크게 일면서 '이당치국(以黨治國)'의 논리가 확산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실천적 조직으로서 정당 활동이 1930년을 전후하여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흥사단 세력과 임시정부 세력이 힘을 모아 1930년 초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이때 도산을 비롯하여 흥사단 인사들과 함께 창립 이사로 참가하는 한편 임시의정원에 복귀한 것이다.
임시의정원에 복귀해 1930년 11월 부의장에 선출되는 한편 김붕준 ・ 김홍서 등과 함께 상임위원으로 활약했다. 상임위원회는 국정처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제도로, 폐회 중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때의 임시의정원은 권력구조 면에서 정부의 위치보다 우위를 점했고, 상임위원회는 정부를 보호, 감독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1930년 12월 흥사단 임원직을 잠시 휴직하였으며, 1931년 경제적 혁명기관으로 창립된 공평사(公平社) 이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는 세계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처 피신하지 못한 도산이 의거 당일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 동암은 '도산선생구제위원회'를 결성하고 누구보다 도산을 구출하기 위해 앞장섰다. 그럼에도 도산이 국내로 압송되자, 도산의 역사를 정리해 『도산선생역사』를 저술했다.
이후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할 때까지 기나긴 유랑의 시대를 보내야 했다. 유랑의 과정에서 임시의정원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정족수조차 채우기가 어려워 정회할 때도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때로는 의장 대리를 맡아 임시의정원을 이끌었으며, 1933년부터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겸무하면서 그야말로 임시정부의 '파수꾼'으로 역할을 자임해 갔다.
1934~5년경 임시정부는 존립의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독립운동 정당을 중심으로 단일당운동의 분위기가 크게 진작되면서 대다수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해체를 전제로 신당결성운동이 전개된 것은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면서였다. 이후 독립운동 정당과제 단체들 가운데는 단일당운동 조직과 함께 임시정부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송병조(宋秉祚)와 함께 임시정부를 폐지하려는 단일당운동에 단호히 반대하였다. 이들은 한국독립당 탈당성명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사수를 위한 확고한 의지를 공표했다. 1935년 4월 8일 항저우(杭州)에서 국무위원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하니, 그 요지는 광복을 이룰 때까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는 것과 반임시정부적인 단일당운동을 배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때 김구가 5월 19일 「임시의정원 제공에게 고함」이라는 서한을 보내면서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그리하여 동암과 송병조는 김구 계열의 임시정부 지지 세력과 결합하여 임시정부를 살려낼 수 있었다. 같은 해 10월 동암의 동의로 김구 ・ 이동녕 ・ 이시영 ・ 조성환 ・ 조완구 등 5명이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국무회의 주석 이동녕, 내무장 조완구, 외무장 김구, 재무장 송병조, 군무장 조성환, 법무장 이시영 등으로 임시정부의 진용이 어느 정도 정비될 수 있었다. 이때 동암은 비서장을 맡았다.
피난길에 접어든 임시정부는 전장(鎭江) ・ 창사(長沙) ・ 광저우(廣州) ・ 류저우(柳州) 등지를 전전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는 한 곳에서 길어야 반년, 적게는 한 달 남짓 머무르다 또 다시 이동해야 하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창사에서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저격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등 혹독한 시련도 따랐다. 그러니 임시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유랑의 와중에서도 홀로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를 발행하면서 임시정부의 존재를 지켜 나갔다.
1939년 5월 임시정부는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 이르러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치장시기에 임시정부는 각 정당의 통합을 위해 힘을 기울였으나, 통일방법과 독립운동 최고기구를 놓고 의견 대립을 벌인 끝에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임시정부는 통합 노력이 결렬된 후,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을 포용하면서 임시정부의 진용을 정비해 갔다. 1940년 5월에는 한국광복진선의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3당이 통합하여 새로이 통합 한국독립당을 결성하면서 보다 강력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정착하면서 임시정부는 조직을 확대 강화하고 명실상부한 정부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9월 17일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대일항전의 무력 기반을 마련하는 등 전시체제도 확립했다.
임시의정원이 제 기능을 회복하는 것은 1940년 10월 충칭에서 열린 제32회 정기의회에서였다. 상하이를 떠난 지 8년 여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임시의정원은 피난길에서 헌법을 다듬을 기회도 없어 1927년의 약헌(約憲)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과 그에 따른 정세변화는 새로운 체제를 요구했다. 때문에 충칭시기 임시의정원 활동은 주로 개헌작업에 집중되었다. 1940년의 '약헌' 개정과 1942년부터 시작되어 1년 반 만에 완성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등은 그 결실이었다.
동암은 이 과정에서 임시헌장의 골간이 되는 의견과 제안을 주도하며 괄목할 업적을 남겼다. 먼저 의회와 정부의 권한범위를 구분할 것을 주장했다. 의회에서 정할 법과 정부에서 정할 법을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아울러 책임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 국무원을 선거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석의 권한을 대폭 강화할 것을 역설했다. 즉, 국무위원회의 주석에 불과한 체제를 정부의 주석 내지 국가의 대표로 하는 동시에 국무위원의 수반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법령은 대소를 물론하고 의회를 통과할 것 등을 주장했다. 의회민주주의 원칙을 준수하면서 광복에 대비한 행정부의 기능 강화에 역점을 두자는 것이었다.
1943년 1월 정부 명칭과 조직문제를 놓고 임시정부를 '혁명정부'로 개칭하자는 주장이 있을 때에도, '임시정부' 명칭의 역사성과 필요성을 논리정연하게 펼쳐 고수할 수 있었다. 결국 동암의 주장은 새로 고칠 임시헌장의 근간을 이루었다. 특히 임시정부 주석의 권한 강화와 국체 및 정체의 규정, 임시정부 명칭론은 건국강령을 구체화하고 독립운동을 총결산하며 광복에 대비하는 법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도 본격적 독립전쟁에 대비하면서 정부 조직을 확충해 갔다. 이때도 동암은 변함없이 비서장의 자리를 맡았다. 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헌장이 통과되면서 임시정부의 권한은 더욱 확대되었다. 임시정부의 권한 강화, 특히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는데 동암은 누구보다 앞장섰다. 임시정부가 김구 주석의 강력한 지도 체제를 확립하고,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회복하기까지 그 밑거름이요,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정정화(鄭靖和)의 『장강일기(長江日記)』에서, "광주에서 출발한 후부터 임정의 전체 살림은 임정의 비서실장이었던 동암이 주로 맡아했다. 중국에 있는 임정의 살림을 맡았던 분들 중에서 특히 우천(藕泉, 조완구)과 동암은 그 청렴함으로 해서 존경을 받았는데, 두 분은 언제나 무명으로 된 중국식 두루마기 단 두벌만으로 지내셨다... 동암과 우천 은 임정의 그런 궁색한 살림을 맡아하면서 자신들에게 만큼은 특히 인색하게 대했을 터이니, 늘 가난에 찌든 모습들이었다. 동암과 우천의 청렴결백한 인품이 오늘에 전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는 기록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았던 그는 중국 충칭에서 해방을 맞았다. 1919년 해외 망명 때, 기필코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필성(必成)'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그였다. 그 꿈이 달성된 것이며, 독립운동에 뛰어든 지 4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감격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비서장으로서 환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1945년 9월 9일, 충칭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순국하고말았다. 이때 65세의 나이였다.
임시정부 유랑시절에 언제나 임시정부 사무실을 지킨 이는 오직 동암 뿐이었다는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순국하기까지 임시정부를 지켜 나갔다. 환국 준비를 하다 과로로 쓰러진 동암이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여기서 죽는구나"하며 통곡하자, 백범도 끝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민족독립을 차마 떨칠 수 없었던 독립운동가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또 동암을 두고 "한국독립운동에 피와 살이 되었다"고 평가한 백범은 1948년 6월 아들 신(信)을 보내 유해를 봉환해 성대하게 사회장을 거행하면서 독립운동자의 의리가 무엇인지를 역사에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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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이명화, 『차리석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 ・ 박수현, 『차리석(임시정부와 흥사단을 이끈 독립운동계의 재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 ・ 장석흥, 「東岩 車利錫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학논총』23,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2001.
- ・ 장석흥,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평전』, 역사공간, 2005.
- ・ 장석흥, 「차리석의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체계 초안(1942)'과 안창호의 대공주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49,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글
출처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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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차리석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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