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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9년 4월 5일, 황해 평산(平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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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0년 9월 2일 |
관련 사건 | 3 ・ 1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
본관 | 고창(高敞) |
주요활동 | 1919년 3 ・ 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 1925년 흥업구락부 결성, 1927년 신간회 참여,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수감 |
포상훈격 |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관련 인물/단체 | 흥업구락부, 신간회 |
1879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金岩面) 대촌리(垈村里)에서 농사를 짓던 오석조(吳錫祚)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창(高敞)이고, 호(號)는 국사(菊史)이며, 이명으로 오하영(吳夏英)을 사용하였다.
어려서 백부(伯父)인 오석기(吳錫錡)에게 출계(出系)되었고, 고창(高敞) 오씨가 대대로 살아오던 평산군 문무면(文武面) 물안리(物安里)로 이거(移居)하여 성장하였다. 11세 때인 1890년부터 1898년까지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 무렵 동학(東學)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1900년 무렵 돌아와 27세 되던 1906년까지 곡물무역상(穀物貿易商)을 하였다. 기독교에 입신하여 1906년 5월 개성 북부교회(北部敎會)에서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크램(W. G. Cram, 奇義男)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31세 되던 1910년까지 농사의 감농(監農)으로 있으면서, 1909년 1월 남감리회전도인으로 임명되어 1911년까지 개성서구역(開城西歐域)을 담당하였다.
1911년 전도사 직첩을 받고, 1913년까지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이 시기에 미국북감리회와 남감리회가 협동으로 서울 냉천동에 교사를 마련한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후에 감리교신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1913년 9월 원산 상리교회(上里敎會, 후에 원산중앙교회로 개칭)로 전임하였다. 1914년 8월 23일 김영학(金永鶴), 최태곤(崔泰崑) 등과 함께 미국 남감리회 감독 앳킨스(Bishop James Atkins)에게 집사목사(執事牧師, deacon) 안수를 받고, 그대로 원산상리교회를 담임하였다.
1917년 9월 남감리회 연회에서 서울 종교교회(宗橋敎會) 부담임으로 파송받았다. 1918년 10월 개성에서 열린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장로목사(長老牧師, elder) 안수를 받고, 서울 종교구역 담임 목사로 파송받았다. 1918년 12월 12일 협성신학교를 제6회로 졸업하였다.
이 무렵 남감리회는 1919년 1월부터 감리교회 선교100년 기념활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2월 중순경 이 일과 관련하여 원산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친구 정춘수(鄭春洙)가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2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를 그에게 부탁했는데, 그를 통해서 서울에서 추진되고 있던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3 ・ 1운동에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2월 17일 정춘수와 함께 박희도(朴熙道)를 찾아가 독립운동 추진 상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2월 19일경 서울 서대문에 있던 피어선성경학원에서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친구 신석구(申錫九) 목사를 만나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여 추진하려고 하는 독립운동에 참가하도록 권유하였다.
박희도의 연락을 받고 2월 20일 박희도가 교감으로 있던 영신학교(永信學校) 사무실로 정춘수, 오기선(吳基善), 신홍식(申洪植) 등과 함께 찾아갔다. 마침 서울에 머물고 있던 이승훈(李昇薰)을 만나 천도교와의 합작 문제, 동지 포섭 문제등을 의논하고, 개성 지역 동지 포섭을 맡기로 하였다.
2월 21일 오후 7시경 남대문 이갑성(李甲成) 집에서 이승훈, 함태영(咸台永), 신홍식, 안세환(安世桓), 현순(玄楯) 등과 만나 천도교와의 합작 문제는 이승훈과 함태영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안세환을 일본 도쿄(東京)에 현순을 중국 상하이(上海)에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2월 22일 개성으로 가서 25일까지 친동생인 오상근(吳尙根)의 집에 숙박하면서 이경중(李敬重), 김지환(金智煥) 등을 만나 서울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이야기해주고, 그곳에서 찬성자를 모집하여 서명 날인을 받으라고 부탁하였다.
2월 23일 김지환의 부탁으로 개성 남부예배당(南部禮拜堂)에서 설교한 후 오후에 만월대(滿月臺)에서 이경중, 김지환 등 8~9명과 다시 만났으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서는 독립운동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저녁 10시경 북부교회에서 이경중, 김지환, 최중순(崔重淳), 오진세(吳鎭世), 이강래(李康來) 등과 다시 만나 독립운동 준비상황을 설명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2월 26일 개성에서 강조원(姜助遠)이 내방하자, 그에게 전에 개성을 방문했을 때 독립선언서 발표일이 3월 4일이라고 하였으나, 서울에서 다시 의논하여 3월 1일로 변경되었음을 알려주었다.
2월 27일 신석구 목사로부터 민족대표로 참여하겠다는 말을 듣고, 그와 함께 그날 오후 1시경 정동교회 이필주(李弼柱) 목사 사무실에서 가진 기독교측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초안을 확인하고, 자신을 포함한 기독교측 민족대표자 16인을 선정하는 데 참여하고, 개성지역 선언서 배포를 맡기로 하였다.
2월 28일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봉함하여 종교교회 부근에 사는 40세 가량의 신자에게 개성에 가서 이경중에게 전하고, 이경중이 부재중이면 강조원에게 전하도록 부탁하였다. 그 사람이 그날 밤에 돌아와 강조원에게 전했다고 알려주었다. 2월 28일 저녁 가회동 손병희(孫秉熙)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자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모임에서 독립선언식 장소를 이갑성의 장소 변경 건의와 손병희의 제안으로 명월관(明月館) 지점인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 태화관에 손병희, 이승훈 등 다른 민족대표와 함께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상순 일본 경찰과 검찰의 취조가 일단락되고, 검사국에 의해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되었다.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관할위(管轄違)’로 예심종결 결정을 받고, 최고심인 고등법원에 「내란죄」로 기소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한다.’는 특별 예심 결정을 선고하여 다시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는 ‘공소 불수리’ 판결을 하여 다시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졌다. 경성복심법원 항소심 공판은 9월 20일 시작되었는데, 그 셋째날인 9월 22일 법정에서 재판장의 “합병을 반대하고 (아직도) 독립을 희망하는가?”라는 신문에 “사천 년 역사를 가진 조선을 일조에 일본에게 빼앗겼거든 반대하는 회포와 독립하고자 하는 희망이야 어찌 다 말하리오. 그러나 다만 시간문제이나 어느 때든지 조선은 반드시 우리의 조선이 될 줄 알고, 오늘날 이 자리에서 이런 수치를 당하면서도 생명을 보존하여, 익어가는 조선 독립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정춘수에게 독립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참가한 것이라.”고 대답하여 독립의지를 피력하였다.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최남선(崔南善), 이갑성, 김창준(金昌俊) 등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소요」 혐의로 징역 2년 6월과 미결구류일수 360일을 형기에 산입하는 판결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5월 5일 이갑성과 함께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소감을 묻는 『동아일보』 기자의 질문에 “교역자의 생활을 여러 해 했으나 이번 감옥 생활을하는 동안 같이 영적 감응을 얻은 일은 없었고, 밖에 있을 때는 매우 우리민족의 전도(前道)에 대하여 비관하였으나, 감옥에 들어간 후에는 조선 사람도 금후로부터는 살 수가 있다는 생각이 났고, 조선인의 제일 급한 것은 교육이니 우리가 모두 그 방면으로 힘을 써서 배우고자 하되 학교가없는 현상을 구제하여야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출옥 후 잠시 수표교교회를 담임하였다가, 1922년 9월 다시 종교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종교교회에 시무하고 있던 1923년 1월 12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자작회(自作會)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여 ‘우리의 생도(生途)는 오직 자작자급(自作自給)’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자작회는 1922년 11월 연희전문학교 학생 염태진(廉台振) 등 50여명이 경제자립과 물산장려를 목표로 창립한 물산장려운동 단체였다. 1924년 1월 24일 혁청단(革淸團)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여 ‘풍기개선(風紀改善)에 대하여’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혁청단은 1923년 12월 서울에서 전문학교 및 중학교 교사와 종교가 등이 주도하여 일제가 공인하던 공창제(公娼制) 폐지를 비롯한 사회풍속 교정을 목표로 설립한 단체였다.
1925년 3월 22일 신흥우 집에서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유성준(兪星濬), 장두현(張斗鉉), 구자옥(具滋玉), 유억겸(兪億兼), 이갑성, 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동지회(同志會) 계열의 국내 조직인 흥업구락부(興業具樂部)를 결성하였다. 흥업구락부는 표면상으로는 민족의 복지 향상과 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실제로는 해외 독립운동과 연계된 정치적 비밀결사였다.
그 무렵 오랜 투옥생활과 격무로 건강을 해쳐 목회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1925년 4월 종교교회 담임의 사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고 휴직 상태로 있다가, 같은 해 9월 연회에서 개성 북부교회로 파송받아 1927년 9월까지 그 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하였다.
개성 북부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1927년 2월 서울에서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협동전선의 최고 기관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될 때 51명의 본부 간사 중 한사람으로 선임되었다.
신간회는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출범하려 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각성 촉진”, “단결 공고”, “기회주의 일체 부인” 등 간결하고 온건한 강령을 내세웠지만, 그 후 본부와 각지회의 현실적 정책 제안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민족의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해방, 자치운동의 부인, 타협적 개량주의의배격, 민족의 대동단결, 민족적 권익의 실현 등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1927년 9월 서울 종교예배당에서 열린 조선남감리회 연회에서 조선감리교회의 합동과 독립을 미국 남감리회 총회에 청원하기로 하였다. 양주삼(梁柱三), 홍종숙, 윤치호, 홍병선(洪秉琁) 등과 함께 청원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연회에서 다시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으로 파송을 받아 시무하면서 신간회 본부 간사를 겸하였다.
전국 각지에 군단위의 신간회 지회가 설치되고, 간도 ・ 일본 등지에까지 지회가 설치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신간회 본부는 물론 지회들까지도 ‘과격한 불온단체’로 보고, 그 임원들을 ‘요시찰인물’로 감시하며, 집회나 활동을 불허하거나 방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정된 정기대회마저 불허하여 1929년 3월 정기대회를 앞두고는 변호사 허헌(許憲)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회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여기서 서무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일제의 불허로 이 대회도 열리지 못하고 6월 복대표대회라는 약식 대회를 개최하고 신간회 규약을 개정하여 회장제를 집행위원장제로 바꾸었다.
이 무렵 수표교교회에 적을 두고 있기는 하였으나,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 종교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자, 12월 경 이를 지원하는 민중대회를 개최하여 시위하려던 허헌, 이관용(李灌鎔), 홍명희(洪命熹), 조병옥(趙炳玉) 등의 계획에 찬동하여 참여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구속되었다.
1930년 12월 남감리회와 북감리회가 통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할 때 남감리회측의 특선위원(特選委員)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4월 28일 조선물산장려회 신임이사회에서 유성준, 설태희(薛泰熙), 김용기(金容起) 등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31년 5월 12일 서울 종로에 가난한 환자들을 진료하기 위해 설립한 사회영중앙실비진료원(社會營中央實費診療院)을 개원하고 초대 원장을 맡았다. 1932년 5월 12일 사회영중앙실비진료원유지회(社會營中央實費診療院維持會) 제2회 정기총회에서 현동완(玄東完), 이대위(李大偉), 홍병선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1934년 6월 4일 민중의원유지회 제4회 총회에서도 이사로 연임되고, 1935년 7월 9일 서울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열린 사회영민중의원 유지회 정기총회에서도 이사로 연임되었다. 그 동안 목회는 1931~1932년 서울 수표교교회, 1932~1934년 서울 상동교회, 1934~1935년 서울 연화봉교회(蓮花峯敎會)에 파송받아 담임으로 시무하였다. 1935년 조선감리회 중부연회에서 수표교교회에 파송받아 시무하다가 1937년 중부연회에서 퇴회하였다.
그후 고양군 지도면화정리로 이주하여 과수원을 경영하던 중 1938년 5월 22일 흥업구락부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신흥우, 윤치영(尹致暎), 구자옥, 정춘수 등과 함께 서대문경찰서에서 가혹한 신문을 받고 9월 4일 흥업구락부원 일동의 이름으로 이른바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1945년 9월 1일 여운형(呂運亨)이 위원장으로 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초청받았다. 9월 19일 이갑성, 남상철(南相喆), 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각당통일기성회(各黨統一期成會) 총무부를 맡았다. 10월 18일 독립운동사를 편찬하기 위하여 조직된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1월 18일 중국 동북지구를 중심으로 한 ・ 중 양국 전재동포의 근본적 구조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조직된 한중협회(韓中協會) 회장에 취임하였다. 11월 24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강당에서 실업자, 고물가, 빈민구제, 38도 남북 물자교류, 주택, 기타 사회문제를 해결코자 결성된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朝鮮社會問題對策中央協議會)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12월 22일, 남한 내 23개 정당이 합동하여 결성한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의 정치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12월 28일 신한민족당을 대표하여 신탁통치반대 결의를 표명하고, 12월 30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46년 2월 8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탁치반대국민총동원회(託治反對國民總動員會)가 통합하여 새로 조직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 무렵 「3 ・ 1운동과 나」라는 제목의 글을 『자유신문』 1946년 2월 27일자에 기고하여, “우리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3 ・ 1(운동) 그 때와 같은 충동과 결심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다시 한 번 환기(喚起)해야만 될 것 같다.”고 회고하였다.
1946년 5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국민대회 회장을 맡아 국민대회를 치르고 미군정 당국에 체포되어 5월 17일 군정재판에서 이른바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3개월과 벌금 2만원의 언도를 받았으나 집행이 유예되었다. 6월 11일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열린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주최 전국대표대회 사회를 맡았다.
이어서 6월 13일 운현궁에서 열린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선임되었다.
1947년 11월 18일 과도입법위원 시국요강심사 특별위원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1930년대 사회영민중의원을 운영할 때 함께 했던 이대위, 유석창(劉錫昶) 등과 함께 대학설립운동에도 관여하였다. 정치대학 기성회 회장을 맡아 1948년 재단법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설립하고, 그 이사 및 관장을 맡았다. 1949년 9월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정치대학(건국대학교 전신)이 되면서 초대 학장을 맡았다. 1949년 3월 12일 민족정신선양회에 참여하였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울 종로구(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월 19일 제2대 국회 개원식 사회를 맡았다. 그러나 곧 바로 6 ・ 25전쟁이 일어나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1950년 가을 납북되었다.
납북 후 북한에서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북한 당국도 70이 넘은 고령이고 독립운동 경력이 있어 함부로 대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식에서 축사를 하였고 같이 납북되었던 조소앙(趙素昻),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그 최고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1960년 9월 2일 별세하여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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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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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신보』 1920.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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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1923.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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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외일보』 1928.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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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每日申報』 1931. 5. 14
- ・ 『每日申報』 1935. 7. 11
- ・ 昭和13년(1938) 5월 28일, 京畿道 警察部長, 「京高特秘 제725호의 3, 興業俱樂部 關係者 檢擧의 건」, 『延禧專門學校 同志會 興業俱樂部 關係報告』,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동아일보』 1938.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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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신문』 1946. 2. 27
- ・ 『자유신문』 1946. 5. 19
- ・ 『조선일보』 1946. 6. 13
- ・ 오순덕, 「국사 오화영의 리더십 연구 : 3 ・ 1 독립운동과 광복 후 정치에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논문, 2011
- ・ 허동현, 「3 ・ 1운동에 미친 민족대표의 역할 재조명 : 기독교계 대표 오화영과 유여대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46집, 2006
글
출처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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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오화영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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