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김붕준

다른 표기 언어 金朋濬 동의어 金起元
툴바 메뉴
요약 테이블
출생 1888년 8월 22일, 평남 용강(龍岡)
사망 미상
본관 의성(義城)
주요활동 1908년 이후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에서 구국운동 전개, 1919년 3・1운동 참여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 활동, 1921년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가입, 1930년 이후 한국독립당 등에서 활동, 1940년대 임시정부의 통일전선운동에 참여
포상훈격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관련 인물/단체 신민회, 청년학우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신진당

1888년 8월 22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오신면(吾新面) 구룡리(九龍里) 용동(龍洞)에서 부친 김의현(金義鉉)과 모친 김씨의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자는 군석(君錫), 호는 당헌(棠軒), 이명은 김기원(金起元)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일제 자료에는 김명준(金明濬)으로도 표기되어 있는데 김붕준의 오기이다.

김붕준

ⓒ 독립기념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895년부터 1902년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8년 상경해 보성중학교 농림과에 입학하였다.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한 서북학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고 1909년 신민회의 청년 조직인 청년학우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11년 3월 보성중학교를 졸업했으나, 당시 ‘105인사건’이 일어나자 일시 진남포로 피신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승동기독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6년에는 대동강 지류인 인황천과 동창천 하류 대안에서 수로를 개설하고 밭을 조성하는 등 개간과 간척 사업에 종사하였다. 흥사단 입단 때에 작성한 이력서에 자신의 최장기능(最長技能)을 관개(灌漑)라고 밝혔다.

흥사단 입단 이력서

ⓒ 독립기념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 서기, 임시의정원 의원, 비서장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7월 13일 대한적십자회를 발기하고 8월 29일 대한적십자회 창립 시 선언문과 결의문 선포에 참여하였다. 1921년 11월 25일 개최된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상의원에 선출되었다.

1920년 2월 21일 군무부 참사로 선임되었으며 군무부가 운영한 육군무관학교의 교육과정을 이수하였다. 1922년 손정도가 교통총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교통부 참사에 임명되어 국내로 파견되는 특파원들을 관장하였다. 이 무렵 원활한 활동과 대일 활동의 안전을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김기원(金起元)으로 개명하였다.

1921년 제4회 상해교민단 의원총선거에서 본구(本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5월에는 중국인 유력 인사들과 상호 친선을 도모하고 한국 독립운동의 지원을 위해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창립하였다. 1923년 1월 4일에는 상하이 대한교민단의 총무로 선임되어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한인 추도회를 개최하였고, 11월 17일에 교민단 주최로 독립운동이 나아갈 길을 주제로 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1923년 제1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차리석 ・ 최준 ・ 최석순과 평안도 출신 의원에 선출되었고 1924년에는 상하이 법정대학을 졸업하였다. 한편 1921년 이후에는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에 가입하였다.

박은식 대통령 아래에서 1924년 12월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어 임시헌법 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5년 4월 7일 국무원 비서장 자격으로 개정 임시헌법을 선포하였다. 1925년 10월 6일 개최된 제6회 교민단 총회에서 의사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경영난으로 발행을 중단하자 『독립신문』 경리에 임명되어 재정 문제를 해결했으며, 1926년 1월 1일자 191호부터 『독립신문』을 속간하는 데 기여하였다.

1926년 12월 24일 임시정부를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로 개편하기 위한 헌법 개정 기안위원에 임명되었지만, 흥사단원에 대한 견제가 심해지자 안창호의 권유를 받아들여 사임하였다.

1928년 이후 세계 경제공황 여파로 상하이 교민 사회의 활동이 침체되는 상황에서 대한교민단 단장과 인성학교 교장을 맡았다. 1931년 4월 흥사단 원동위원부에서는 협동조합 형식의 경제운동체인 공평사(公平社)를 만들었는데 제1조 조장에 임명되었고 1931년 6월 월례회에서는 제6반 주석에 임명되었다.

1930년 초 김구 ・ 이동녕 ・ 안창호 등과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7월 30일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세입 ・ 세출 결산서 검토하고 선출 의원의 자격을 심사하는 일을 맡았다.

1930년 12월 26일 임시의정원 의원을 사직하고 광둥(廣東)으로 가서 한국독립당 광동지부를 결성하고 혁명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인 청년들의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와 중산대학(中山大學) 입학을 주선하고 학업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뒤 일본 영사관경찰이 임시정부 청사와 교민 사회를 습격했을 때 큰아들 김덕목도 체포되었다. 안창호의 체포로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어려움에 직면하자 재무를 맡아 흥사단을 정상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월대표단(駐粵越代表團) 단장에 임명되어 광둥성 당국과 연락하며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거주지인 광저우시(廣州市) 동산(東山) 와요후가(瓦窯後街)에 자리한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서는 한국독립당 기관지 『한성(韓聲)』을 발간하여 선전 활동을 펼쳤다. 또 중국 국민혁명군 상교 참의에 임명되어 한 ・ 중 양국의 항일 공동 투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4년 1월 2일 제2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윤기섭, 김철과 함께 다시 상임위원에 선임되어 새로 뽑힌 의원들의 자격을 심사하였다. 이해 간행된 윤봉길 의사의 전기인 『윤봉길전』(韓光社, 중국어판)에 김기원(金起元)이란 이름으로 쓴 서문에서 “윤봉길의 의거는 한국이 나라를 되찾고, 중국이 망국에서 구해지고, 동양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평가하였다.

흥사단 제22회 창립기념(1935.5.13)

김붕준, 김철, 양우조

ⓒ 독립기념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35년 2월 한국독립당 7차 전당대표대회에서 광동지부 대표 자격으로 업무보고를 했는데 한국독립당의 신당 참여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같은 해 10월 항저우(杭州)에서 개최된 제2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원 비서로 선출되었다. 1935년 11월 항저우에서 김구를 이사장으로 하여 새로운 내각을 옹호할 지지 정당으로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였다. 이때 이동녕 ・ 송병조 ・ 조완구 등과 이사에 선임되었다. 같은 시기에 소집된 제2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정부 광동 대표에 선임되었다. 1936년 11월에 개최된 제29회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 주석으로 선임되었고 1937년까지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2월에는 광둥 지방에서 일제 관공서 파괴 ・ 요인 처단 ・ 후방 교란 등의 특무공작을 수행하는 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하였다. 1939년 제3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의정원 15대 의장에 선출되었다.

중일전쟁의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충칭(重慶)으로 임시수도를 옮긴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 1940년 가을 임시정부도 충칭으로 옮겼다. 이때 광둥에서 충칭으로 이주하였다. 1940년 5월 치장(綦江)에서 통합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위원장에 김구를 선출하고 조완구 ・ 조소앙 ・ 엄항섭 ・ 지청천 등과 중앙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40년 6월 한교등기판법(韓僑登記辦判法)을 만들어 중국 국방최고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한인들이 거주증(居住證)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 기념(1940.5.16)

ⓒ 독립기념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독립운동 세력의 임시정부로의 통합을 강력히 주장하던 1941년 10월 제3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장 권한으로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들을 임시의정원에 등원시켜 독립운동 진영 통일의 물꼬를 트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여당 역할을 하는 한국독립당이 반발해 조선민족혁명당 대표 등 좌파 민족주의 세력의 등원이 거부되었고, 이에 책임을 물어 임시의정원 의장에서 탄핵되었고, 한국독립당에서도 제명되었다.

1942년 2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한국독립당통일동지회를 결성하고, 조선민족혁명당과는 조직 개편을 전제로 합병을 단행하였다. 일제 치하에 있는 상하이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해소를 선언하고 단원들의 명의를 도용하여 전향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칭의 흥사단원동위원부 단원들과 반박 성명서를 발표하고 바로 원동위원부의 부활을 선언하였다.

1942년 11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내에 ‘유한책임한국광복군사령부 군관소비합작사(有限責任韓國光復軍司令部 軍官消費合作社)’라는 일상생활용품을 취급하는 소비조합을 설립 운영하였다. 1944년 5월 6일에는 황학수 ・ 차리석 ・ 최석순 ・ 이상만 ・ 윤기섭 등과 임시정부의 생계설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 4월 26일 개최된 제3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약헌 개정안이 통과되고 국무위원의 수도 증원되었다. 그결과 김규식이 부주석에 선임되었고 김원봉 ・ 장건상 ・ 성주식과 함께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 ・ 한국독립당 ・ 조선민족해방동맹 ・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 4개 단체가 연합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임시정부는 실질적인 ‘통일전선정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45년 2월에는 홍진 ・ 유동열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하였다. 일본의 패망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으므로 국가 건설을 준비하기 위해 할 일이 쌓여 있는 정황에서 몇몇 인사들에 의해 임시의정원이 장악되고 있음을 우려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결단이었다고 한다. 그해 3월에는 홍진 등 50여 명과 함께 한국구제총회(韓國救濟總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신한민주당 당원 명단

ⓒ 독립기념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광복을 눈앞에 두고 흥사단 원동위원부 위원장직을 맡아 일제 항복 후 흥사단 명의로 민족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주 흥사단으로부터 흥사단의 명의로는 참가할 수 없으니 대한인국민회나 재미한족연합회의 이름으로 활동해 미주 흥사단과 보조를 맞춰줄 것을 요구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기념(1945. 11. 3)

ⓒ 독립기념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임시정부 요인 2진으로 12월 1일 군산비행장을 통해 귀국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으로 귀국한 송종익 ・ 김병환 ・ 김성략 ・ 한시대 ・ 전경무 및 중국에서 귀국한 유진동 등과 협의하여 1946년 1월에 흥사단 국내위원부를 결성하였다. 그해 2월에는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비상정치회의 준비회의에 신한민주당 대표로 참여하여 정식 국회가 개원할 때까지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존속시키고자 하였다. 이어서 민주의원에 피선되어 시(市), 구(區) 및 도로 명칭 개정위원으로 일본식 이름의 도로 명칭을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지금의 세종로, 을지로, 충무로 등의 명칭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 결정이 알려지자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46년에는 김규식 ・ 원세훈 ・ 안재홍 ・ 최동오 등과 좌우합작위원회에 우측 대표로 참가하였다.

1946년 9월 신한민주당, 조선혁명당, 청우당, 재미한족연합회 등이 창당한 신진당(新進黨)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창당 대회사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1947년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헌법 및 선거법 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47년 12월에는 민주자주연맹에 참여하여 상무위원 겸 선전국장에 선임되었다.

1948년 3월 남북 협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자 3월 26일 홍명희 ・ 엄항섭 ・ 유림 ・ 여운홍과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발기문을 발표하고 “통일 없이 독립 없다”라는 논리를 강조하였다. 1948년 4월 21일 민족자주연맹 대표의 일원으로 38선을 넘어,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공식 일정을 마친 후인 4월 27일부터 30일까지 전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남북요인회담)에 참석하여, 외국 군대의 즉시 철수, 임시정부 수립과 총선거 실시, 통일적 민주정부수립, 남한만의 단독정부 불인정 등의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평양에서 돌아온 후 6월 1일 경교장에서 열린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대표회의에 참석하여 남북통일운동 전개 방안에 관해 협의하였다. 7월 21일 통일독립촉진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8월 5일 제1차 중앙상무위원회에서 사무국장에 선임되었다. 9월 23일에는 김구 ・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남북 각 정권 아래 주둔한 군대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유엔 국제 관리 하에 둘 것과 남북을 통한 전국적인 총선거를 새로 시행해 전 인민의 의사를 물을 것 등의 내용이 담긴 메시지를 유엔총회에 전달해 주도록 유엔조선임시위원단에 요청하였다.

1948년 5・10 총선거에서 서울시 성동구에서 낙선하였고, 1950년 제2대 5・30선거에서도 성동을구에서 차점으로 낙선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으나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김규식 ・ 조소앙 ・ 조완구 ・ 유동열 ・ 최동오 ・ 윤기섭 ・ 오화영 ・ 원세훈 ・ 엄항섭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북한군에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9월 26일 심야에 성북동을 출발하여 북으로 끌려가던 중 9월 28일 밤 황해도 서흥을 막 벗어나려 할 때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받아 9월 29일 새벽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 상하이판 『독립신문』
  • ・ 충칭판 『독립신문』
  • ・ 『時報』
  • ・ 『동아일보』
  • ・ 『국민보』
  • ・ 『자유신문』
  • ・ 臨時政府秘書局 발행,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 ・ 在上海 日本總領事館 警察部 第2課,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
  • ・ 추헌수, 『資料 韓國獨立運動』 2, 연세대학교출판부, 1972
  • ・ 國會圖書館 編,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5・33권, 2005~2011
  • ・ 국사편찬위원회 편,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3・6, 臨政篇 Ⅱ・Ⅲ・Ⅺ, 1971~1976
  • ・ 국가보훈처 소장, 「노영재 구술자료」, 1990
  • ・ 독립기념관 소장, 「도산안창호자료」, 「흥사단자료」
  • ・ 국가보훈처편, 「광복군 김정숙 구술자료」, 『독립운동자증언자료집』 Ⅱ, 2002
  • ・ 국사편찬위원회 편, 『韓國獨立運動史』 3, 1967
  • ・ 대한적십자사, 『大韓赤十字社 七十年社』, 1977
  • ・ 이태호(심경완 구술), 『압록강변의 겨울』, 다섯수레, 1992
  • ・ 김준엽 엮음, 『석린 민필호전』, 나남출판, 1995
  •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편, 『광복으로 가는 길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자료집 3), 2015
  • ・ 이명화,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와 안창호의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1994
  • ・ 최기영, 「1930년대 중산대학과 한국독립운동」, 『震檀學報』 99, 2005
  • ・ 이재호, 「김붕준의 중국에서 독립운동」, 『安東史學』 13, 안동사학회, 2008

이명화 집필자 소개

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전체항목 도서 소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독립기념관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멀티미디어 더보기 1건의 연관 멀티미디어 김붕준 유묵(1945)


[Daum백과] 김붕준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독립기념관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