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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황싱

다른 표기 언어 황흥 , 黃興 동의어 커창, 克强, 황전, 黃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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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4년 10월 25일,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부(長沙府) 산화현(善化縣)
사망 1916년 10월 31일
관련 사건 신해혁명
국적 중국
주요활동 우창기의 직후 1911년 12월 중국 망명 길에 오른 신규식(申圭植) 등과 교류, 신아동제사 조직을 통해 한국의 독립지사들과 교류, 독립운동 지원
포상훈격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관련 인물/단체 중국혁명동맹회

쑨원(孫文)과 함께 중국 혁명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힌다.

1874년 10월 25일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부(長沙府) 산화현(善化縣)에서 태어났다. 원명은 전(軫)이고 호는 커창(克强)이며 1904년에 싱(興)으로 개명하였다. 1888년에 창사에 있는 웨루서원(岳麓書院)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893년에 청난서원(城南書院)에 들어가 근대적 학문을 처음 접하였으며 1898년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1902년에는 후광총독(湖廣總督) 장즈둥(張之洞)이 추진한 신정(新政)의 혜택을 입어 관비(官費)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하였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선진문물과 진보적 정치사상을 접하게 된 그는 후난 출신 유학생들과 함께 급진적인 민족주의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유학역편(游學譯編)』, 『호북학생계(湖北學生界)』 등 혁명적 잡지를 편집하는 데 앞장섰다. 이 무렵 쑨원, 쑹자오런(宋敎仁) 등과 교류하면서 혁명파의 지도급 인물로 부상하였다. 특히 군사방면에 흥미가 깊어 일반적인 유학생들의 지식적인 접근과 달리 실제적 군사혁명에 대한 역량을 발전시키는 데에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

쑨원

ⓒ 독립기념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03년 4월 러시아의 중국 동북지역 진출에 항의하여 200여 명의 유학생들과 함께 거아의용대(拒俄義勇隊)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혁명운동을 위해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창사에서 천티앤화(陳天華), 장지(張繼), 쑹자오런 등과 교류하면서 혁명단체인 화흥회(華興會)를 조직하고 회장이됨으로써 혁명파의 지도자로 두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동구회(同仇會)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비밀결사 요원들을 혁명운동에 끌어들였다. 이러한 비밀결사 활동으로 인하여 청 황실의 주의를 받게 된 그는 1904년 상하이(上海)로 피신하였으나 완푸화(萬福華)가 거행한 광시순무(廣西巡撫) 왕즈춘(王之春)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연행되었다가 석방된 뒤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1905년 쑨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본격적인 혁명단체인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의 창립에 적극 가담하였고 총리 쑨원에 다음 가는 지위에 해당하는 서무부장에 피선되었다. 이런 까닭에 당시 동맹회는 쑨원과 그의 연합 지도체제 아래 운영되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이후 동맹회 중심의 혁명운동이 여러 차례의 혁명기의(革命起義)를 통하여 본격화되어 갈 때 그 기획, 군사동원, 무기조달, 군사작전 수립 등 직접적인 활동을 전담하는 데에 앞장섰다. 특히 중요한 혁명 동력이 되었던 비밀결사조직 즉 각종 회당(會黨) 세력을 규합하고 혁명으로 이끄는 데에 그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1907년 3월에는 쑨원과 함께 하노이로 가서 활동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진남관기의(鎭南關起義)를 주도하였다. 1908년 2월에는 혁명군을 이끌고 광시(廣西) 북부를 공격하였고, 같은 해 5월에는 윈난(雲南) 국민군총사령으로 취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지역 혁명활동으로 인하여 프랑스 경찰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11년 4월 말에 일어난 광저우신군기의(廣州新軍起義)는 그의 주도 아래 일어난 더욱 규모가 큰 혁명기의로서 청조에 대한 반대, 곧 반청(反淸)이 더이상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추세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이어서 일어나는 신해혁명, 곧 우창기의(武昌起義)의 사실상 출발점이 되었다.

조성환이 안창호에게 중국혁명 소식을 전한 편지와 무한(武漢) 형세도(1911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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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10월 10일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일어난 우창기의는 그의 지도 아래 만들어졌던 동맹회 중부총회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는데, 원래의 예상과는 달리 혁명군이 우창성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그 다음 날 우창에 최초의 혁명정부인 후베이군정부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당시 홍콩에 머물고 있던 그는 10월 28일 우한에 도착하여 혁명군을 직접 통솔하였고 한양(漢陽), 한커우(漢口)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당시 쑨원은 미국에서 유럽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고 우창기의 발발 약 2달 여 뒤인 12월 25일에야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이런 점에서 쑨원 귀국 이전까지 혁명군의 실제적인 지도자는 그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2월 말 미국으로부터 귀국한 쑨원이 난징에서 열린 각성대표대회(各省代表大會)에서 초대 임시 대총통에 선출됨으로써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의 성립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그였다. 중화민국은 실제로 그와 쑨원이 주도하여 꾸려졌던 것이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초대 육군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쑨원과 위안스카이(袁世凱)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정치적 협상 결과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을 맡게 되었다. 이에 남부 각성과 혁명단체들에서는 그를 육군총장에 유임시키도록 요구했으나 위안스카이의 반대로 무산되고 대신 뚜안치루이(段祺瑞)에게 육군총장을 맡기면서 그 휘하의 참모총장을 그에게 맡도록 하였으나 그는 결국 실권이 없는 참모총장직에 취임하지 않았다. 1913년 3월 위안스카이의 사주에 의하여 막 구성된 국회 내의 혁명파 지도자였던 쑹자오런이 암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쑨원과 함께 즉각 위안스카이에 대한 군사적 토벌을 선언함으로써 이른바 제2차혁명인 위안스카이 토벌전쟁이 발발하였다.

제2차혁명 과정에서 혁명파가 장악하고 있던 남방 각성 군대를 동원하여 위안스카이 군대와 전쟁을 벌였지만 군사적 ・ 재정적 열세로 인하여 1913년 8월 난징이 함락되면서 제2차혁명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어서 쑨원과 그를 비롯한 혁명파 지도자들은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1914년 쑨원이 일본에서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하는 과정에서는 쑨원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데에 항의하여 중화혁명당에 가입하지 않고 미국으로 가 화교들을 중심으로 혁명 선전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국내에서의 혁명운동 지지 활동으로서 호국군운동(護國軍運動)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위안스카이의 황제제 부활 운동에 반대하는 데에 적극 나섰다. 위안스카이가 돌연 병사한 다음인 1916년 7월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그러나 갑작스런 발병으로 10월 31일 서거하였다. 1917년 4월, 당시 베이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고향인 창사 웨루산(岳麓山) 기슭에 국장으로 그를 장사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의 관계는 일본 유학 시절, 곧 동맹회 활동 시기 조소앙(趙素昻)을 비롯한 일부 한국유학생들과의 교류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이는데, 이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911년 10월 우창기의 이후 그 영향을 직접 받은 한국독립지사들이 대거 중국 관내지역으로 망명해오면서 이들과의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이미 자세하게 밝혀진 바 있다. 즉 우창기의 직후인 1911년 12월 서울을 떠나 중국 망명길에 오른 신규식(申圭植)의 경우, 1912년 1월 중화민국정부 성립 직후 난징을 방문하고 그를 포함한 다수의 혁명파 지도자들과 서신을 주고받는 등 직접적인 교류에 나서고 있었다.

당시 난징을 방문한 신규식 일행이 곧바로 쑨원을 만나기는 어려웠던지, 신규식과 동행한 조성환(曺成煥)이 안창호(安昌浩)에게 보낸 보고편지에 의하면, 임시정부 측의 중요인물을 만나 수백 위안(元)을 기부하고 ‘한국민족의 정신을 담은 (우창기의의 성공을 지지하는) 글’을 써서 그에게 보냈다고 쓰고 있다. 이때 그에게 보낸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규식의 한시문집 가운데 1912년 초에 쓴 것으로 보이는, 쑨원과 그에게 바치는 형식의 한시가 5수 들어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 한시들이 바로 당시 써서 보냈다는글의 내용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이 한시들의 내용은 한마디로 새 공화국의 성립과 새 세상의 도래를 축하하며 그와 쑨원, 두 인물의 활약과 공덕을 기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예컨대 쑨원에게 바친시에서는

‘공화의 새 세월이여, 옛 천하를 새로 열었구나, 사해(四海)의 뭍 백성들이 즐거워 하니, 중산(中山)선생이여 만세 동안 존귀하소서(共和新日月, 重闢舊乾坤, 四海群生樂, 中山萬歲尊)’라고 하고 있고 그에게 바친 시에서는 ‘산하(山河)가 다시 만들어지고, 일월이 다시 새로워졌구나, 공을 이루고도 공을 취하지 아니하니, 천추에 한 분 위인이시라(山河逢再造, 日月見重新, 成功功不取, 千秋一偉人)’

라고 쓰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한국인들(의 독립요구)을 영원히 돕고 속히 성공케 하여 자유복락을 함께 누리자’고 하여 신규식 등의 기대보다 더욱 우호적이고 정성스러운 환영과 지지를 표하였다. 이 서면 답장을 보고 신규식 등이 다시 편지로 작별을 고하고 면담을 요청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1912년 초 난징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 신규식, 조성환 등과 쑨원, 그와의 교류는 이러한 서면을 통한 간접적인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계속된 한인 독립지사들과 중국 혁명파 인사들과의 교류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지 않았다고 보인다. 현재까지 알려진 범위 내에서 말한다면 1912년 7월 상하이와 난징 지역의 한인지사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와 관련된 활동이나 동제사 조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중합작 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아동제사의 멤버로 후한민(胡漢民), 랴오중카이(廖仲愷), 따이지타오(戴季陶) 등 혁명파의 중요 지도자들이 망라되어 있었던 점으로 본다면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고 신아동제사 활동을 통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고 짐작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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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민두기, 『중국의 공화혁명』, 일조각, 1999
  • ・ 배경한, 『쑨원과 한국』, 한울, 2007
  • ・ 薛君度, 「자료 : 황흥과 신해혁명」, 『아세아연구』 9-4, 1966
  • ・ 이상구, 「이차혁명 이후 혁명파의 분열과 歐事硏究會」, 『역사학연구』 58, 2015
  • ・ 蕭致治, 『黃興評傳』, 南京, 南京大學出版社, 2001

배경한 집필자 소개

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전체항목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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